2017. 5. 14.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59)
  본문 : 행 12:1-5 
  제목 :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1.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미국 사람들은 누구를 기다릴 때 꼭 돌아와야 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 노란 리본을 걸어 둔다고 합니다. 노란 리본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차를 타고 시골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좌석에 한 젊은이가 앉아 계속 차창 밖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상해서 그 청년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젊은이, 무슨 큰 슬픔이 있는 모양인데 나에게 얘기해 줄 수 없겠나?"

 

  그 청년은 일그러진 얼굴로 목사님께 사정 얘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자기는 약 7년 전에 부모님과 같이 시골에 살며 고등학교에 다녔었는데 어느 날 밤에 아버지가 모아둔 돈을 몽땅 훔쳐서 먼 도회지로 가출해서 여러 가지로 노력을 했으나 결국 몽땅 날려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시골집에 돌아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도심의 뒷골목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그 동안 시골 부모님께 지은 죄가 너무 가책이 되어 바로 며칠 전에 7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 전상서>
  어머니, 아버지 불효한 자식 이제야 소식 드립니다. 그 동안 부모님의 가슴에 못만 박은 이 못난 자식, 아버지의 피땀 어린 돈 몰래 훔쳐 와서 몽땅 날려 보내고 이제 뒷골목에서 방황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연락드립니다. 부모님이 이 편지를 받은 그 다음날 저는 기차를 타고 시골집 근처를 지나갈 것입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고향집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의 따뜻한 추억이 담긴 고향집을 보고 난 후에 저는 곧 열차에서 몸을 던져 이 세상을 하직하겠습니다. 끝으로 불효자식을 다시 한 번 용서해 주시기 바라며 이런 못난 자식은 낳지 않은 것으로 여기시고 잊어버리십시오. -불효자식 드림-
  추신: 혹시 저를 용서하시고 맞아 주시기를 원하신다면 저희 집 감나무 위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주십시오.

 

  드디어 기차가 그 청년의 고향집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목사님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자세히 그 청년의 집을 쳐다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청년의 집 감나무에는 수백 장의 노란 손수건이 만국기처럼 나부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알려진 이후로 미국 사람들은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 노란 리본(우리는 손수건이라고 번역했습니다)을 걸어 놓는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하늘에다가 일곱 색깔 무지개를 노란 손수건으로 걸어두셨습니다. 내게로 오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내게로 오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큰 노란 손수건은 저 갈보리 산 위에 세워졌던 우리 주님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벌하지 않고 구원하기를 원한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어떤 흉악한 죄를 지었든지 용서를 하고 은혜를 베풀겠다는 하나님의 노란 손수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이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있지만 들으면서도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은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지 이해가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냥 이해하는 것은 이 방법밖에 우리를 구원할 방법이 없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대신 형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고난의 길이기 때문이고 특별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고난의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먼저 고난의 길로 가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고난과 순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쁨과 승리의 역사도 있지만 십자가의 고난이 더 많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도 각자가 지고 갈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사도행전 12장을 공부하게 됩니다. 12장을 시작하면서 야고보사도의 순교를 이야기 하고 베드로가 잡혀간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야고보 사도를 죽게 한 헤롯의 죽음을 이야기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 가지 고난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붙잡혀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순교를 당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흥왕하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헤롯왕과 유대인들

 

  본문 1절 말씀에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헤롯왕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헤롯 왕가는 이스라엘과 그 인접지역을 예수님 오시기전 약 50년 전부터 예수님 오신 후 약 100여년까지 150여 년 동안을 통치한 왕가입니다. 이들은 유대민족이 아닌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을 하고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가입니다. 당시에 로마가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지시를 받아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헤롯대왕이 이 가문의 창시자인데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왕 자리를 빼앗길까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피해서 살았지만 그 지방의 예수님또래 아이들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왕은 그 헤롯대왕의 손자입니다. 그도 가문의 혈통을 따라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피를 흘려 죽게 한 사람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역대 이스라엘 왕들을 살펴보면 다윗 왕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방향으로 향하여 가고 백성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헤롯 왕가는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이 개종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고 알아도 그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위를 위해서 유대교로 개종을 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사에도 교회의 장로가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이 다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거나 기독교에 이익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오히려 불신자들의 눈치나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이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일 때 박수를 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유대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제사장들 장로들을 위시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이 유대교 지도자들도 자기들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들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 자리를 가지고 뭔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세상은 로마라는 나라가 다스리는 세상이었습니다. 로마가 나중에 기독교를 인정하여 기독교국가가 되었지만 기독교의 초창기에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세력이었습니다. 로마황제 가이사가 주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유대의 왕이나 유대교 지도자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오늘날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비웃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의 삶에만 집중하고 영원한 천국에 대해서 비웃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한 종교지도자로 자처하고 나섭니다. 자기의 지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종교로 이용하는 지도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세상을 사는 성도들도 십자가의 복음을 소홀히 여기고 고난의 길을 싫어합니다. 구원이나 영생이나 영원한 천국은 그냥 덤 정도로 생각하고 삽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고 우선 이 세상의 삶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

 

  본문 2-4절 까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신약성경에 야고보라는 이름은 여러 명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로 활동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로 큰 야고보라고 하고 그는 작은 야고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도 야고보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고보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부를 때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런 순서로 불릴 만큼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서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야고보도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수님께서 특별한 일을 하실 때 늘 함께 있었던 인물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는 변화산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서 광채가 났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아주 특별한 광경을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목격한 사람이 야고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셨으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고 내려왔는데 감히 사마리아 사람들 같이 천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영접하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라고 명령해서 태워버리자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형제 즉 요한과 야고보에게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우레’는 뇌성과 번개를 동원한 천둥을 우레라고 합니다.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베드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좀 운이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스데반은 설교하고 돌에 맞아 죽었는데 베드로는 설교할 때 3천명이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붙잡혀서 바로 죽임을 당했는데 베드로는 붙잡혀가지만 다행히 그날이 유대교 명절인 무교절이라 죽이지는 못하고 옥에 갇혔는데 천사가 와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을 여러 방법으로 사용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살려두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바로 순교를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며 다니며 여러 교회들을 세우고 많은 일들을 한 사람이나 제대로 복음 한번 전하지 못하고 순교를 한 사람이 누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가는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순교자들은 비록 일찍이 죽임을 당하지만 그 죽음을 통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도 많은 순교자들처럼 특별히 한 일이 없이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죽음으로 충성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

 

  본문 5절 말씀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위기에서 구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 진심으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죽임을 당하고 또 붙잡혀 갔다면 교회는 최고의 위기를 당한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든지 믿음의 길을 포기하든지 피난을 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함께 모여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들도 죽음을 각오한 기도의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기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여쭈어보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교회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에는 이런 위기의 국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른 믿음을 위해서 순교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하는 일을 늘 시비하였기 때문에 진리가 바르게 선포될 때 교회는 늘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런 위기를 당할 때 모든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힘을 합했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이보다 더 복음적이고 더 바르게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위기를 당하면 자기만 살겠다고 빠져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가 분열이 되고 비 진리와 타협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사참배를 하고 배교의 길을 갔습니다. 뜻 있는 사람들이 진리 따라 살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잡혀가서 옥고를 치를 때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 기도를 하고 힘을 합했다면 일제가 아무리 힘이 강해도 교회를 쉽게 무너뜨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일제와 타협을 하고 자진해서 신사참배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교회는 쉽게 무너져버렸습니다. 진리를 외면하고 참된 신앙을 버린 교회도 아닌 교회들이 교회의 모습을 하고 흉내나 내게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진리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교회는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합니다. 복음을 바로 전하는 목사들이 핍박 아닌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으며 대접도 받지 못하고 외로운 진리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철저하게 바른 복음 진리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 진리를 바르게 알고 진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영원한 천국을 향해서 가는 교회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비웃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라는 곳에서도 우리를 비웃기도 합니다. 감옥에 잡혀가거나 순교는 당하지 않고 살지만 이미 고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런 참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교회를 위해서 이런 진리의 복음을 위해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를 놓고 기도하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 사도가 잡혀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다 교회를 핍박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고 미력한 힘이지만 함께 모았을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들이 가진 복음이 더 왕성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들도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이 진리의 복음을 위해 참된 교회를 위해 순교자의 각오로 최선을 다하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