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0. 광성교회 주일 낮 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 (산상보훈65)
본문 : 마 7:26-27
제목 : 모래 위에 지은 집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누구보다도 십자가의 복음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제 자신이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고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물 한 모금도 그냥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 다님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 너무나 엄청난 것들인데 그런 엄청난 것들을 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돈 없이 값없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엄청난 은혜를 잘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라면 그 탕감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고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교회라고 한다면 그 교회는 은혜가 넘쳐야 하고 사랑이 넘쳐야 하고 너무나 좋은 곳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어디 그렇습니까?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부정이나 부패나 불륜 같은 세상에서도 손가락질을 받는 나쁜 것들이 버젓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한 일들이 교회라는 거룩한 곳에서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책임을 이신칭의의 교리를 너무 많이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행함을 강조하지 않고 믿음만 강조하다가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습니다. 믿습니다만 하면서 바르게 살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님 같은 유명한 분에게도 그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을 너무 많이 강조해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폐단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제 윤리나 도덕의 행함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행위를 가져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그와 반대로 생각을 합니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이신칭의의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강조하지 않아서 교회가 타락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를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믿는 체 하면서 살 수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잘 모르니까, 그 은혜를 잘 모르니까 그 은혜로 받은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모르니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자답게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보고 봐라 행함이 있어야 된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못하고 가식적은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해서 질책을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오히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은 자는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해서 정말로 귀한 말씀들을 들려주셨습니다.
이런 귀한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행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1)그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해서입니다.
산상보훈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하실 수가 없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말씀들을 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씀을 소홀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그 말이 소중한 말도 아니고 또 믿을 수도 없는 말이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도 죽어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구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그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어서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그 믿음만 있다면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 강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하신다고 믿는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냥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지도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2)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행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그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지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합니다.
늘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하니까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오해합니다.
쉬운 예로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들을 재해석하시면서 더 엄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무시를 하는 자도 살인을 한 자와 같이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대하는 성도들이 아이고 틀렸어 어떻게 그렇게 살아 무시하거나 포기해 버립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의 목표인 것은 분명합니다.
미워하지도 말아야 하고 욕도 하지 말아야 하고 미련하다고 무시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체 하고 자신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길은 열려 있지만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하고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른다. 도덕적인 말씀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착각을 버리고 내가 그렇게 삶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고백하고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살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입니다.
3)너무나 쉽고 행복한 길임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알고 보면 어렵고 힘든 길이 아니라 너무나 쉽고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만 받았으면 됐지 어떻게 어려운 길을 가느냐고 포기를 해 버립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참 쉬운 일입니다.
부자가 되어 한다고 말씀을 하셨다면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뭐 어렵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잘해서 떳떳해야 된다고 말씀을 하셨다면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잘못을 저지르고 그 잘못에 대해서 애통해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뭐 어렵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 즉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화평을 이루면서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참 행복한 것입니다.
세상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허락을 하지 않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딱딱한 마음을 가지고 전쟁을 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서 그렇지 온유 화평 청결 이런 것 너무나 좋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예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말씀이요 우리를 구원하셔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귀한 말씀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오히려 쉬운 것이며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세상을 살면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보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유행가 중에 가장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입니다.
세상을 바르게 산다고 노력을 하고 살았지만 지나고 보니까 참 바보처럼 살았고 한심하게 살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잘 한 것 보다는 잘 못한 것이 더 많고 어찌 그리 바보처럼 살았을까 라고 생각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이런 시 한 구절이 늘 생각이 납니다.
“누가 다만 그 한 자락만이라도 돌려줄 수 있을 것인가
젊은 날의 그 청춘을...”
며칠 전 뒷산에 올라갔더니 할머니 대여섯 분이 아침부터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
못 다한 그 사랑도 태산 같은데/ 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가느냐”
돌려달란다고 돌려집니까?
바보처럼 산 인생은 다시 오지를 않습니다.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부분은 신앙생활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귀한 진리의 말씀이 성경에 있는 줄 알았으면 열심히 성경을 읽었을 것인데,
이렇게 말씀대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 줄 알았으면 더 철저하게 말씀대로 살았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이렇게 귀한 것인 줄 알았으면 이 은혜에 감격하면서 살았을 것인데.
왜 바보처럼 그렇게 살았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귀하게 대우해주신 것을 알았으면 그 신분에 맞게 도도하게 살았을 것인데 왜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살았을까?
참 어리석게도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모래 위에 지은 집이란 자기 자신의 공로위에 집을 지은 것입니다.
반석은 예수님을 가리킬 때 쓰기도 합니다.
“주님 같은 반석은 없도다”라는 찬양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또 반석은 신앙고백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반석 즉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그 믿음의 고백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자신의 행위와 자기 자신의 공로에다 신앙을 세우려고 합니다.
자신의 의로움 자신의 공로 자신의 선행을 가지고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이나 공로나 선행을 자랑하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의롭게 살고 선을 행하면서 살고 공로를 많이 세우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래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무너져버릴 줄 모르는 아주 위험한 깃입니다.
그런 선함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차라리 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의롭게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깨달은 사람은 십자가를 철저하게 붙잡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믿는 신앙은 반석위에 세운 신앙이고 자신을 믿는 신앙은 모래위에 세운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모래위에 지은 집이란 이 세상의 부귀영화 위에 집을 지은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그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삶에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즘 성도들은 약아서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아서 잘 살고 또 천국에도 가고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복을 많이 받아서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저렇게 잘 사는데 저런 사람이 천국도 간다면 배가 아플 정도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어쩔 수 없이 양지택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래위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도 아니고 든든한 것도 아닙니다.
어느 날 비가 오면 창수가 나면 바람이 불면 그냥 무너지고 그냥 없어지고 마는 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바람 한번 불면 날아가고 말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더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더 완전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비가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무너짐이 심하니라.
본문 27절 말씀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도 평소에는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양도 같고 용도도 같고 별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같은 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비가 올 때, 창수가 날 때, 바람이 불 때 그 지나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다 같이 교회에 나오고 다 같이 예배도 드리고 다 같이 충성도 하니까 다 같은 신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려움을 당할 때 시험을 치를 때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설 때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누가 시비를 하지 않습니다.
누가 잡아가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화의 시대가 가고 바람이 불 때가 되면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이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비바람까지 불지 않는다고 해도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조금만 불이익을 당하면 조그만 싫은 소리만 해도 헌신짝처럼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등록을 하고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도 희생하지 못하고 어떻게 이렇게 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까?
일주일에 예배 한 시간 참석하는 것 그것도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구원받아라. 영원한 생명을 받아라.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진리를 몰라서 안타깝게 생각은 들지만 모르고도 안 배우고 안 듣겠다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억지로 데리고 온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음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엄청난 것입니다.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더 핑크는 본문을 설교하면서 비와 창수와 바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비는 하늘에서 오는 것 즉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비란 하나님의 섭리적인 시련과 역경의 때에 대한 상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를 테스트하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그냥 두시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오히려 그 시련들을 통하여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시험에 실패하여 자기 갈 길로 가는 자입니다.
창수가 나는 것은 누가복음의 말씀대로 큰물이 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우리를 핍박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쾌락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취미생활 스포츠 오락 더 나아가서 술이나 마약 음란물들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면 교회는 못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람은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의 활동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너무나 교활하기 때문에 정말로 조심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타종교로 이단으로 거짓선생으로 양의 탈을 쓴 이리로 우리 곁에 접근을 해서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친구가 심지어 우리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사탄의 도구가 되어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위험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든든한 반석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이런 비바람이 칠 때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까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까?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반석위에 든든하게 집을 지은 사람답게 지혜로운 사람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