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83)
본문 : 행 5:36-39
제목 :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36.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우리말에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객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손님이 와서 주인노릇을 하고 주인은 손님 노릇을 하는 뒤바뀐 관계를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본말전도(本末顚倒)라는 말도 있습니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과 지엽적인 것 즉 말단의 중요하지 않는 것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원래 주인이 있고 손님이 있는 것처럼 또 근본적인 것이 있고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중요하지도 않고 근본적인 것도 아닌 것을 붙잡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바뀌어서는 안 될 것들이 뒤바뀐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피조물이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주인노릇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그저 인간들이 행복하게 잘 살게 해주는 종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의 옛 언약이나 율법들은 신약의 새로운 언약으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에 불과한 것인데 때로는 구약의 약속들이 신약의 약속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질 때기 많습니다.
구약에 약속된 이 세상의 복들을 신약에 약속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인데 행함을 그 믿음의 증거라고 해서 행함을 오히려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때도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이 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본질적인 것을 무시하고 본질적인 것 보다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정말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 줄 알고 그 근본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 충실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본질적이고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중요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과의 싸움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고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중요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신구약 성경의 중요한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름대로의 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조상대대로 섬겼던 그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그동안 배운 대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제사도 열심히 드리고, 율법도 최선을 다해서 지키고, 기도도 하루에 세 번 이상 하고, 일주일에 하루는 금식을 하고, 불쌍한 이웃을 도와주기도 하고 나름대로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통적으로 해오던 일들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핵심적인 일을 놓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그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거나 본말이 전도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근본이요 핵심이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바르게 사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부수적으로 해야 하 일들입니다. 믿음이 없이 하는 모든 일들은 그냥 헛된 일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재판을 하는 장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속해서 증언하자 유대교 지도자들 중에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인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내보내고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다와 유다 이야기
본문 36-37절 말씀에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가짜 메시야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 메시야라고 증언하자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과거에 일어난 드다와 유다의 사건을 상기시키며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드다'라는 사람이 본문 외에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유대인 역사가들의 이야기를 빌어서 대강 짐작을 할 뿐입니다. 이 사람도 세례요한처럼 요단강에서 나름대로 자기를 나타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이고 자기도 요단강을 가로막아서 맨땅으로 사람들을 지나가게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름대로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외쳤던 사람이고 또 이런저런 기적들도 행하였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던 사람이라 고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얼마 못가서 로마총독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유다'라는 사람은 로마당국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호적을 할 때 그것을 방해하고 일어섰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로마당국이 호적을 하게 하는 것은 인구 숫자대로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였는데 유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해서 우리가 언제까지 로마나라에게 세금을 바쳐야 되겠는가. 이제 우리가 반항하고 일어서서 거부를 하자고 부추겼던 것 같습니다. 이 유다도 로마총독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죽음을 당하거나 도망가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드다라는 사람은 자칭 선지자로서 유대인들의 신앙심에 호소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사람이라면 유대라는 사람은 유대인들의 국가에 대한 애국심에 호소를 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그들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신비한 이적을 일으켜서 마치 자신이 선지자나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자신을 나타내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앞으로 엄청난 일을 할 것처럼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좋아하면서 따라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신비한 것을 좋아하고 뭔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처럼 애국심에 호소를 하거나 사람들 편에 서서 인권운동이나 자연보호 운동이나 사회사업 같은 좋은 일을 통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사서 인기를 끌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든 사람들이 선한 일로 생각하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기가 좋고 사람들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한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부수적인 일일 뿐 근본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본문 38-39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드다나 유다처럼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이 자기들의 생각을 갖고 하는 일이라면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처럼 주장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스스로 무너지거나 하나님께서 누구의 힘을 통해서든지 없애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혹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우리가 잘못 알고 건드렸다가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개인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 일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가지고 거짓 주장을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가 없어지고 했습니다. 사람의 주장은 허점이 있기 마련이고 얼마동안은 속아 넘어가지만 오래 가보면 진실과 거짓은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복음은 2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이 살아서 역사하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계만방에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저런 이단들이 또 거짓선생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이론들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잘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옳게 생각이 되면 쉽게 잘못된 사람들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선생들을 따라가는 것은 그것이 잘못된 길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따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복음에다가 뭘 좀 더해서 가르치면 그것이 그저 조금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정말로 조심을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
강해설교의 대가이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오늘 본문을 설교하면서 이 본문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 세 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귀한 말씀이라 그대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재능과 교양과 합리성과 법적 공정성과 인간적인 지혜는 영적인 영역과 전적으로 무관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중요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재능이 많거나 교양이 바르거나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말을 하면 그 말이 진실하다고 믿고 그 말이 진리라고 따릅니다. 그러나 그러 것들은 영적인 진리를 발견함에 있어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법정에 서서 사도들의 재판하는 유대인들이 재판을 받는 사도들에 비하면 엄청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사회 각계의 지도자들이었고 가말리엘은 당대의 제일 훌륭한 율법 교사였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나게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성경을 잘 아는 신학자라고 해도 열광적인 신앙인이라고 해도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것들을 가지고 복음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에 속한 사람이란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은 그 속에 성령님께서 들어가셔서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한 사람이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연인들은 성령님께서 하신 일들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어리석은 일로 보이고 말씀을 들어도 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냥 종교 활동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시고 그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 영혼이 거듭나고 성령의 하신 말씀 즉 성경말씀을 바르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만이 이 복음의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여러분이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거부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부한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입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처럼 격렬하게 거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잡아 죽일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거부를 하기도 합니다. 가말리엘 같은 사람은 혹시 이 사람들의 주장이 사실이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대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중하게 대하고 조심스럽게 대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조심스럽게 대하고 정중하게 대하고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그것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셋째로, 복음은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전부든지 아니면 아니든지이지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이것저것 섞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다른 것은 섞는 것은 안 됩니다.
전적으로 오직 믿음이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좋은 일도 하고 예수님도 믿고 그런 것으로 생각하며 안 됩니다.
교회에 와서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아서 잘 살고 영원한 천국도 가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 이 세상의 복을 받는 것 그것이 복음 속으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어떤 시골 할머니가 서울에 있는 아들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번호가 9712인데 9713번을 눌렀습니다. 당연히 다른 집에 전화를 건 것입니다. 할머니 여기는 9713이니까 전화를 다시 걸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서울 사람들 참 인정머리가 없다고 세상에 끝 번호 하나 틀렸다고 전화를 다시 걸라고 한다고 섭섭해 하더라는 것입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고 지금은 이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는 그럴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숫자 중에 하나라도 틀리면 엉뚱한 곳에 전화가 걸리는 것처럼 복음에 있어서는 조금만 틀려도 엉뚱한 믿음을 가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만 다닌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바르게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비슷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입니다. 똑같은 것을 가져야 합니다. 확실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드다나 유다 같은 이단들이 지금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이나 조금 관용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도 복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바르게 믿지 못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