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3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79)
본문 : 행 5:30-32
제목 :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세상을 살다가 보니까 무엇이든지 부지런한 사람은 그런대로 먹고 살고 열심히 하니까 성공을 하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은 자신도 힘이 들고 옆에 있는 사람도 힘들게 합니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것도 좋은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을 내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성은 착하고 좋은 일에는 별로 열심을 내지 않고 나쁜 일에 열심을 내는 일이 많습니다.
술이나 담배 같은 것을 먹고 마시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은 참 많습니다.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중독이 될 때까지 열심히 마시고 피웁니다.
몸이 망가질 때까지 실수를 하고 인생을 망칠 때까지 정말 열심히 마시고 피웁니다.
오락이나 도박에 빠진 사람도 재산 다 탕진할 때까지 열심히 합니다.
도박이나 경마나 이런 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폐인으로 사는 것을 보면서도 끝까지 망할 때까지 합니다.
좋은 일에 선한 일에 그렇게 목숨을 걸고 열심을 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도 좋고 가족도 좋고 이웃도 좋고 국가도 좋고 무엇보다 교회도 좋고 모든 사람이 좋아지는데 그런 좋은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낼 때도 조심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좋은 일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일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인지를 살펴보고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보니까 늘 이 길은 좋은 길이고 이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돌아보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길로 갈 때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인생을 후회하게 됩니다. 아 그 때 좀 더 기도를 해 볼걸, 그 때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볼걸, 그 때 내 생각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걸 이런 후회를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말씀 드리기 전에 서론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말고 부지런하자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할 때 그 일이 선한 일에 좋은 일에 부지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하고 좋은 일이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는 선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하고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정말로 선한 일을 올바르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엄청나게 악한 일을 했더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었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일이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특별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 간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본문 30절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너희’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당시의 권력을 가진 유대교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나무에 달았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아서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자 베드로 사도가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 예수님이 구주가 되시는데 당신들이 그것을 알지 못해서 십자가에 처형을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그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재판을 받는 그 자리에 재판장으로 배심원으로 혹은 참관하는 자로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그리고 관원들과 장로들 성전을 지키는 수비대장이나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그 분야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보통의 열심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와 있었겠습니까? 운이 좋아서 조상을 잘 만나서 그런 자리에 와 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노력을 통하여 여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그런 영광스런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들이 너무 열심을 내다가 보니까 사람들의 눈에 가식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은 모든 일에 정말 열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도 이 바리새인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교에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압니다. 여기 유대교 지도자들은 다 그런 열심을 통해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으로 성공을 한 사람들입니다.
2)그들은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그들의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율법을 최선을 다하여 지켰고 어떻게 하면 다 잘 지킬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철저하게 종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일 금식을 하는 일 구제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보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을 교육의 기초로 삼았고 아이 때부터 읽고 외우고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산다는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조금도 잘못한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을 것이고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3)그들은 그들의 열심과 선한 일을 한다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들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때는 이 짐승을 잡고 저런 때는 저 짐승을 잡고 짐승을 잡아서 피는 어떻게 하고 살은 어떻게 하고 그 구별은 정말로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했지만 왜 그렇게 짐승을 잡아 죽여서 피를 흘려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흘린 짐승의 피가 우리가 흘려야 할 피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피가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릴 피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면서 그 의미를 몰랐던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를 흘려 죽게 하면서도 그 의미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받은 십계명과 거기 따르는 율법들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 이런 계명들을 열심히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형식적으로 지키면서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했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의미를 몰랐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단순히 살인을 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고 도적질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미워하지도 말고 욕을 하지도 말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해하려고 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런 깊은 의미를 모르고 살인하지 않았다고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나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착각 때문에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큰 뜻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를 알게 하고 서로서로 지킴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통하여 나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4)그들은 그런 열심을 통해서 선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최악의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열심이란 참 좋은 것입니다.
선한 일에 열심을 낸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일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일일 때 그 선한 열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가장 악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그 선한 일에 열심을 내려고 하는 잘못된 행동 때문에 예수님을 최악의 죽음을 당하게 한 것입니다.
5)오늘날 우리고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 때문에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일에 소홀히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거나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열심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일이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의 열심은 그 방향이 확실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교회 안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는데 맹목적으로 열심이 있는 사람은 좀 위험합니다.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하고 선을 많이 행하고 충성을 한다는 것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선행 자신의 자랑 때문에 교만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열심 때문에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저급한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이상한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사실은 그들이 가진 열정 때문에 빠집니다. 좀 더 잘 해보려고 좀 더 잘 믿는 길을 가려고 하다가 보니까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고 이단에 빠집니다.
정상적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 이단성이 있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더 열심이 많습니다. 정상적인 일에는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왜 이단에만 빠지면 그렇게 열심을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단에 한번 빠지면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이 가진 열심 때문입니다. 좌우를 구분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기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하는 일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른 길을 보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바르게 살았는가, 잘 못 살았는가 하는 평가 기준이 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나면 이 우주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고 그 일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0절 말씀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너희들이 알지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알지 못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악행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나가시고 계십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그런 행위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사악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염두에 두시고 일을 진행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대제사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재판을 하고 예수님을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몰라서 그런 것이고 그 예수님을 보내시고 살리신 분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섬기는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 당신들이 섬기는 당신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이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당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보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을 특별히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왜 부르셨습니까?
왜 아브라함을 부르고 왜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하셨습니까? 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특별한 언약을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에 복을 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세계만민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만민이 구원을 받게 하는 이 일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의 나라에서 우리를 구원할 예수그리스도가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후손을 통해 나라를 세우시고 이 일을 진행해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살리셨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여기 살리셨다는 말은 또 하나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일으키다”, “일어나게 하다”라는 말로도 해석이 되는 단어입니다.
신명기 18:15절에 모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일으키시리니”라는 단어와 오늘 본문의 “살리시고”라는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약속하신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신다는 뜻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 약속하신 선지자로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사도들이 어디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구약의 모든 성경을 통하여 모든 약속을 통하여 모든 율법과 모든 절기들을 통하여 예언하시고 보여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을 통해서 즉 옛 언약들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구약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발견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흉악한 죄인들처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못하고 다른 것을 따르는 것은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흉악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르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이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