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81)
본문 : 행 5:30-32
제목 :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최근에 법정에서 위증을 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고통을 당한 부부의 이야기가 신문 방송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인천에 살다가 충북 충주로 귀농을 한 박 모 씨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부부가 귀농을 하여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경찰이 차 앞을 가로막고 음주측정을 했습니다.
아내는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술을 먹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편이 경찰단속 방법에 문제를 걸고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단속을 하다가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시비가 붙어서 서로 다투는 중에 그 남편이 경찰관의 팔을 비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무방해죄로 약식기소를 당해서 200만원의 벌금을 내게 되었습니다.
남편 박 씨가 그날 일을 생각하니까 너무 억울했습니다.
자신이 술을 먹고 경찰관에게 욕을 하기는 했지만 팔을 비틀지는 않았는데 팔을 비틀었다고 그것도 그 장면을 카메라로 찍어서 증거를 들이대면서 자신을 범죄자로 모는 것이 너무나 억울해서 정식 재판을 청구했습니다.
남편 재판 중에 아내가 증인으로 채택이 되어서 증언을 했는데 아내도 분명히 남편이 경찰관 팔을 비트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경찰관 팔을 비틀지 않았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위증죄로 아내까지 기소를 해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내 재판에 당사자인 남편이 증인으로 나가서 자신이 팔을 비틀지 않았다고 증언을 했는데 그것도 위증이라고 해서 유죄판결이 내려져서 벌금 500만원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부부는 이 사건으로 육년 동안 일곱 번의 재판을 받아서 다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내는 벌금형이 아닌 실형을 선고받아서 그동안 유치원 정교사로 일했는데 파직을 당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두 부부는 재판에 시달리고 얼울한 마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노동판에서 일을 하면서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 일을 목격한 아들은 이 일로 인해서 머리가 다 빠지는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억울해서 여기저기 호소하다가 유명한 인권변호사를 만났는데 박 씨가 경찰관 팔을 비틀었다는 동영상을 기관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그 결과 박 씨는 가만히 있는데 경찰관이 헐리웃액션으로 팔을 비튼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6년 동안 일곱 번을 유죄판결 받은 것을 여덟 번 만에 드디어 무죄선고를 받고 진실이 밝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설교가 증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증인의 중요성 그리고 증인을 잘못했을 때 받는 벌이 중대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공권력 앞에서 힘없는 백성이 자기의 결백을 증언한다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들의 증언이 얼마나 힘들게 이루어진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32절의 말씀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요
1)증인이요
본문 말씀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산헤드린공회의 재판에서 대제사장의 심문에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그들이 보고 안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자신들이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증인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보통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거짓말도 좀 하고 과장도 좀 하고 그래도 그렇거니 하고 이해를 합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있고 자기자랑을 위해서 과장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법정에서의 증언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과장을 하거나 사실이 아닌 말을 하면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자리입니다.
법정에서의 위증은 재판을 받는 사람이 죄인으로 벌을 받느냐 무죄로 선언을 받아서 죄 없는 사람이 되느냐 하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이 법정에서의 증언은 잘못했을 때 그에 대한 응분한 벌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잘못 된 증언으로 상대방이 사형을 당했다가 그것이 잘못으로 밝혀지면 자신도 그와 같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들의 증언이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증인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사도들은 시시한 지방법원에서의 증언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법정에서의 증언입니다.
법관들도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당대의 최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법정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무서운 법정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어야 할 그런 법정이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위엄을 갖춘 법정에서 참 별 볼일 없는 사람들 같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아주 담대하게 아주 당당하게 그들이 아는 바를 이야기 하고 그 이야기에 증인이 되겠다고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들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직접 두 눈으로 보고 함께 했던 일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확실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증언하고 증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또 사도들이 증언한 그 증언의 내용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 대한 증언이라고 하면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별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증언이 사실인가 거짓인가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놓고 법정공방을 벌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흉악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흉악범이라고 증언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고 한다면 유대인들은 그 피 값을 치러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해야 할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을 합니다.
당신들이 증인이 되어서 죽인 예수님을 당신들의 조상부터 섬긴 그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대민족들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피를 그들과 그들 자손이 받아야 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중요한 일을 가지고 증언을 하고 증인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증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귀하고 복된 증언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의 길이 하나님의 뜻이요 진리의 길이요 정말로 우리 인생들이 가야할 너무나 정확하고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교회에 다니면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행함으로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믿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증언이 바로 이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쉽고도 이렇게 좋은 길을 두고도 욕심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자기 교만 때문에 고집 때문에 잘못 배운 가르침 때문에 거짓 선생이나 이단들 때문에 이 길을 가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에 대한 증언을 통하여 미련한 자들에게는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 되고 구원을 받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는 너무나 귀한 증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이 일의 증인이요
베드로와 사도들이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하면서 “이 일에”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무슨 일에 대해서 증인을 서겠다고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증인 되어야 한다고 할 때 무슨 일에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일”이란 좁게는 바로 앞에서 증언한 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라고 한 말에 대해서 증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라고 한 말에 대해서 증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서신서들처럼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말씀으로는 이 일이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아는 우리는 이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결국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그리고 승천하게 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 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이 구원을 받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영생에 대해서 영생을 얻은 자들이 살게 될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증인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3)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베드로와 사도들이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우리는”에 오늘날 우리도 포함이 된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도 이 일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으로 시작이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하셨습니다.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증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임과 동시에 증인이 되라는 명령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사명이 증인이 되는 것이고 사도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다 증인이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이 목사도 이 일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에 대해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확실하게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런 중요한 강단에서 세상 이야기나 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살자는 이야기나 하고 그러는 사람은 증인이 아니고 목사도 아닙니다.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심각한 자리인데 여기서 감히 복음은 못 전할망정 복음과 반대되는 이야기들을 겁도 없이 지껄이고 있는 사람은 간이 부은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쓸데없는 세상 욕심 버리고 쓸데없는 세상 자랑 버리고 복음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 보다고 복음을 더 사랑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우리가 가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성령도 그러하니라.
본문 32절 말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우리만 이 일에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도 이 일에 증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만 이 일의 증인이 되려고 하면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서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함께 이 일의 증인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에 증인이 되신다는 것은 너무나 광범위해서 자세히 다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강 중점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성령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이 일의 증인이 되십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을 했지만 원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성경 기자들의 마음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구약은 오실 예수님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전체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셔서 이 일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이 일에 증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일을 일으키실 때 마다 기적을 동반하셔서 이 일이 사람들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심을 보여 주심으로 이 일에 증인이 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성경을 기록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의 복음을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이 읽었다고 자랑을 하려는 사람처럼 무조건 많이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읽지만 않고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 읽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렇게 자기 생각으로 읽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발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2)오순절에 강림하심으로 이 일에 증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이제 신약의 교회가 시작이 될 때에 성령님께서 강림을 하셔서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해서 증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실 때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적들을 일으키셔서 이 일에 증인이 되셨습니다.
큰 바람소리 같은 것이 하늘로부터 일어났고 타지 않는 불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고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심을 통해서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사람들로 알게 하심으로 증인이 되셨습니다.
사도들의 마음에 담대함을 주셔서 이 일에 증인이 되셨습니다.
담대하게 그 최고의 법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증언을 하게 하심으로 이 일에 함께 증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3)우리에게 오셔서 믿음을 가지게 하심으로 이 일에 증인이 되셨습니다.
사람들 스스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교만해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영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일들을 믿을 수는 없는 사람들이 우리 인간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들도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세상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특별하게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우리 속에 와 계신 성령님 덕분입니다.
성령님께서 증언을 하시고 그 증인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 같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4)우리와 동행하심으로 증인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시어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혼자 걸어온 길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언제나 함께 해 주셔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와 있습니다.
지혜를 주셔서 갈 길을 잘 판단하게 하십니다.
능력을 주셔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해 주십니다.
많은 시련들이 있었지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복음이 사실인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모인 우리도 이 일의 증인으로서 살아야 된다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오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이 사실에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가 가진 이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신칭의의 진리에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이 일의 증인이 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