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16)
본문 : 벧전 2:4-5
제목 :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경에서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포도나무나, 어린 양이나, 떡이나, 문과 같은 것들로 비유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신 적이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라고 했습니다.
여기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게바’와 같은 뜻이고 ‘베드로’는 게바의 헬라어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오늘은 예수님을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좋고 아름다운 것들도 많이 있는데 하필 세상에 널려있는 돌이라고 했을까요?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돌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에 널려 있는 돌들을 가지고 여러 가지 도구들로 사용을 했습니다.
할례를 받을 때 쓰는 도구도 돌이였고 우물 뚜껑이나 무덤의 문이나 기념비를 세울 때나 경계석을 세울 때나 성을 쌓을 때나 특별히 집을 지을 때 이 돌들을 사용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돌에 대한 특별한 추억은 아마도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목이 마를 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했던 일일 것입니다.
또 구약성경 다니엘 2장에 보면 “뜨인 돌”이 나옵니다.
뜨인 돌이란 사람의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이라는 뜻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는데 다니엘이 그 꿈과 해석을 들려주는 장면에서 이 뜨인 돌이 등장을 합니다.
왕이 꿈에 거대한 신상을 보았는데 그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흙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사람의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뜨인 돌이 나타나서 그 신상을 부셔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상은 온데 간 데가 없어지고 우상을 친 돌이 세계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뜨인 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물을 나오게 했던 그 반석, 이 세상나라들을 부셔버렸던 그 뜨인 돌 이런 말씀을 기억하고 그 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10:4절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을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마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또 우리가 예수님처럼 산돌이라고 했는데 산돌 같은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1.예수님은 사람에게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돌입니다.
본문 4절 말씀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사도가 예수님을 왜 돌이라고 비유했는지는 서론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돌에 비유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신 메시야이심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메시야이시고 목마른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풀어주실 구세주가 되신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반석으로 그 뜨인 돌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1)예수님은 산 돌이십니다.
그 돌을 표현할 때 제일 먼저 산 돌이라고 했습니다.
산 돌이란 산에 있는 돌을 말하는 것이고 살아 있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징어장사를 하면서 산 오징어라고 써 붙인다는 것이 좀 유식한 체 하려고 한문으로 뫼산 자(山)를 써서 “山 오징어”라고 했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산이란 그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돌, 리빙 스톤(living Stone)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분임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돌은 생명체가 없는 무생물이지만 우리 예수님을 돌이라고 할 때는 생명이 있는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그런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린바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따라다니던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도덕적인 말씀으로 가르쳐 주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는 구름떼처럼 벌떼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시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옷을 벗어서 예수님 가시는 길에 깔고 호산나 노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반겼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을 때부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되겠다고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그 곁을 떠나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싫어하고 나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절대 사양합니다.
십자가의 구원 천국 영생 이런 말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처음 오셔서 가르치셨던 그 도덕적인 이야기 또 기적적인 성공의 길 그런 것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건물에 화려한 장식을 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자기를 뽐내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호화스럽게 살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엉터리 목사들이 그런 화려함을 앞세워서 그런 화려한 축복을 주겠다고 부추기면서 기복신앙을 가지게 하고 헌금을 많이 내게 하고 그것으로 자신도 화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없었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간판은 있으나 교회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이 교회 부흥시킨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성장 세미나라고 하면 구름처럼 벌떼처럼 모여든다고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영혼이 불쌍해서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요?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게 하기 위해서요?
아니요! 오직 목표는 하나 화려한 교회를 짓고 화려한 장식을 하고 거기 우뚝 서서 뽐내기 위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버리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거기에 장단을 맞추어서 부자가 되어 보려고 성공해 보려고 이 세상의 복을 받아 보려고 그런 교회만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거기 속아서 예수님을 버리는 성도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귀하게 여김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인정하시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존귀히 여김을 받기 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지 않는 일이라고 하면 세상에서의 영광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 연관도 없고 세상의 일로 끝이 나는 것이고 오히려 세상에서 받은 그 영광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푸대접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화려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인 저도 그렇게 잘 살아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라고 한다면 이제 그만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화려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시고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그 길을 가려고 하십시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그 길로 가려고 하십시오.
일부로라도 그 길을 가기 위해서 재산도 팔아서 나누어 줘버리고 세상의 영광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할 것인데 이왕 망하고 이왕 가진 것 없고 이왕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뭘 더 망설이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셔서 이렇게 복된 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주셨는데 뭐 때문에 애를 써서 이런 복된 길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이 좋은 길을 벗어나려고 하느냐고요.
하나님 못살면 어떻습니까? 고생 좀 하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좀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에게 좀 비난을 받은들 어떻습니까?
하나님만 나를 인정해 주시면 하나님만 나를 귀하게 여겨 주시면 나는 만족하겠습니다.
2.성도들은 산 돌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앞서 인용한 본문 4절 말씀에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아와“라는 말은 현재분사로 사용이 되어서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한번만 나아오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끊임이 없이 나아와야 된다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 사람들이 평생 한번 그 물을 마셨다고 해서 갈증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물은 매일 매일 수시로 마셔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서 은혜를 받는 것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두 번 은혜 받은 것 가지고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매일 매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을 주고 그 말씀으로 평생을 살게 하셨으면 성경만 필요하고 설교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매주 매주 새롭게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목사를 세우고 설교를 하게 하셨습니다.
매일 매일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또 여기 예수님께로 나아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
수십 년 동안 평생을 교회에 오면서도 그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그 횟수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모태신앙이야 나는 할아버지 때부터 교회에 다닌 집안의 사람이야.
나는 교회에 다닌 지 오십년 됐어 육십년 됐어 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 오랜 세월동안 몇 번이나 그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왔는지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뭘 생각을 해 교회에 오면 당연히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고 당연히 십자가 앞에 나온 것이지 뭘 따지기를 따지냐 라고 반문을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교회에 다녀서 그렇지 정말로 우리의 마음 자세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오는 것과 그렇지 않고 그냥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기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이 그냥 성전에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는 자세부터 틀립니다.
하늘을 향하여 자신 있게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이렇게 정장을 하고 넥타이를 매고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는 멋, 없는 멋 다 부리고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속에는 욕심 시기 질투 미움 온갖 추악한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처럼 의로운 사람처럼 잘난 척하고 의시대면서 교만한 모습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목사님들 중에 강단에 서면서 정장을 하지 않고 와이셔츠나 티셔츠 바람으로 설교를 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고 목사가 정장도 안하고 강단에 서 되게 건방지네. 라고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알고 보면 그렇게 욕할 수만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별 볼일이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을 꼭 비웃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서 마음자세도 중요하고 또 외형적으로 깨끗한 옷을 입고 오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속이 더럽다고 느껴진다면 차라리 잘난 척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형보다는 우리의 마음속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겉모습을 단장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단장하고 나아오십시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이 되면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오시면 됩니다.
바리새인이 그렇게 교만하게 기도할 때 그 옆에 세리는 참으로 자신이 죄인인줄 알고 겸손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저는 가끔 제가 늙어서 은퇴한 후에 별 볼일이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봅니다.
벌어놓은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보험 하나 변변히 들어놓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교회가 부흥을 해서 노후를 돌봐준다는 보장도 없고 어떻게 살아갈 까 요즘은 죽는 것도 잘 안된다는데 입이 방정이라고 하던데 정말로 종이나 주어서 먹고 살아야 될까…….
비슷한 형편의 목사님하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시골에 땅이라도 좀 있으면 가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 텐데 땅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어떻게 살까 누구 하나라도 잘 되면 같이 가서 살자
장담은 못하겠지만 그 때가 되면 저는 정말로 기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아주 가까이 갈 것 같습니다.
할 일도 없고 바랄 것도 없고 자랑할 일도 없는데 어디 가서 무엇 하겠습니까? 주님 십자가 앞에 바짝 다가가서 그 십자가의 구원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감사하면서 노래하면서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야 이놈아 젊었을 때부터 좀 그렇게 하지 늦게 철들면 뭐하냐? 라고 나무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나는 손 바짝 들고 십자가 앞으로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갈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우리 광성교회는 참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십자가 앞으로 날마다 나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도 자기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겸손하게 말씀에 잘 순종하고 십자가의 길을 잘 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 길이 복된 길입니다.
이 길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이 길을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잘 해 오셨지만 앞으로도 날마다 날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는 십자가의 보혈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흉악한 죄인임에 불과하지만 이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거듭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그 영원한 나라를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교만한 마음일랑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로 살겠다는 생각은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가는 이 길이 고통스러운 길이라고 할지라도 비참하고 어려운 삶을 살지라도 이 길을 자랑스럽게 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산 돌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인정을 받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께로 날마다 나아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우리도 그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복을 주시는 참된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