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1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02)
본문 : 벧전 1:3
제목 :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사도 바울이 서신서를 기록할 때 대부분 글을 시작하면서 인사를 마친 후 쓰는 공통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와 “하나님을 찬송하라.” 이 두 마디는 대부분 서신서에 교대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왜 우리가 기도를 하고, 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소중한 행위가 감사요 찬송입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수천만 원 수십억 원 헌금을 드리는 것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슴 깊이 진정으로 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큰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 된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찬송, 마지못해서 그냥 부르는 찬송, 남에게 목소리나 노래실력이나 자랑하려고 가식적으로 부르는 찬송 때문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알고 진리를 바르게 알고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고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장 귀한 가장 우선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북에 자주 드나들면서 선교하시는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는데 이북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깊은 산 속에 가면 나무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답니다.
나무를 꺾어서 십자가를 만들어 세워놓고 거기 숨어서 예배를 드린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선교사인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을 해서 악수를 하면서 손가락으로 십자가 표시를 하면서 사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가끔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해 보면 그들의 소원이 마음껏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려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비하면 너무나 좋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악기들과 좋은 음악들로 마음껏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찬송을 부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 찬송을 부를 때 힘껏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반주자도 안내자도 다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도 이 찬송하는 것은 남에게 빼앗기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율로게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사도도 역시 이 서신서를 시작하면서 역시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찬송해야 할 이유를 아주 간단하면서도 아주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찬송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라고 했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라함' 즉 자궁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신의 자궁에서 나온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또는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간의 감정이라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자비나 긍휼의 의미로 발전된 말입니다.
신약에서 긍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에서 잘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불쌍히 여기고 완전히 탕감을 하여 준 그 왕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거지가 되어서 돌아온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서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 비유들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 마음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은 이런 것들보다 더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하게만 보신다면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이 이 자리에 와 있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동정을 받을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여러 가지 말로 변명을 하고 핑계들을 대지만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면 참 한심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사업에 망하고, 삶에 실패하고, 사람들에게 속기나 하고, 그 흔한 아파트 한 채 없이, 뭔가 이루어 놓은 일 하나 없이, 누군가 나를 존경하는 사람 한 사람 없이,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마음이 착하기를 합니까? 성격이 좋기를 합니까? 뭐 특별히 잘난 것이 있습니까?
날마다 죄를 짓고, 남에게 상처나 주고 한심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동정의 여지도 없는, 불쌍히 여길 마음도 들지 않는 나 같은 것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놀라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만 되신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 빠질 뿐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무리 선하고 우리의 의가 하늘에 닿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눈으로 보면 그것은 다 죄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복을 받고 사는 아주 중요하고 간단한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충성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이런 노력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비의 눈으로 보시지 않으시고 공의의 눈으로 보신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짝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 우리가 찬송해야 할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우리의 죄 대신 십자가를 지시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진 것은 우리도 부활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이렇게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으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데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부활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실감이 안 나서 이런 말을 들어도 아멘이 시원치 않지 정말 이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다만 바라는 희망사항이 아니라 진짜 이루어질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장례식을 한번 가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주변의 분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여러 번 갔습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참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서글플까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시는 분들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 고생하시다가 힘들게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 아이고 참 안됐다. 라는 생각도 듭니다.
또 아버님을 어머님을 먼저 보내고 슬퍼하는 자식들을 보면서 그것도 또한 못할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없는 세상에 살았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죽음의 고통 죽음 때문에 헤어지는 고통 이런 것이 없으면 참 좋겠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이렇게 죽음을 통하여 이별을 하지만 다시 부활해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마음을 달랠 수가 있습니다.
더 다행한 것은 우리가 다시 부활하여 살게 될 다음 세상은 이런 죽음이나 이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해서 다시 갖게 될 몸은 지금 우리가 가진 이런 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시는 늙거나 병들거나 아프거나 죽는 일이 없는 완전한 몸으로 부활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19-22)
만약에 우리에게 부활이 없이 이 세상의 삶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나 다 부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부활하게 해 주신, 우리에게 부활의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감사와 찬송으로 힘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3.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부활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도록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마이클잭슨이라는 가수를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노래를 잘 불러서 인기가수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흑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화장을 잘하고 수술을 해봐도 흑인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얼굴을 하얗게 화장을 해서 백인처럼 꾸며보지만 백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가 백인으로 다시태어나지 않는 한 그는 흑인일 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죄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행실로 우리를 치장해도 우리의 속사람은 깨끗해지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깨끗해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의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어머니의 태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언제 어떻게 우리의 영혼이 거듭났는지는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다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고 교회에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도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이 없이 부모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한 것이 없이 그저 태어났습니다.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도 부모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을 한 후에는 내가 내 스스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을 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셔서 나를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어느 정도 신앙이 자랄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지만 장성하고 나면 우리가 노력을 해서 거듭난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셨는데 언제까지 옛사람 그대로 살겠습니까?
이제 장성한 성도답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만날 어린유치원생처럼, 만날 어린 초등학생처럼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이들, 아이들 이젠 말만 들어도 머리가 띵합니다.
어떻게들 말을 안 듣는지 그렇게 뛰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해도 틈만 있으면 뛰고 떠들고 싸우고 다치고
청소 좀 하라고 했더니 온갖 쓰레기들을 변기통에 쓸어 넣어서 변기가 막히게 하지를 않나, 영하의 날씨에 계단을 물걸레로 닦아서 얼음판을 만들어 놓지를 않나…….
이제 좀 어른들하고 놀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들도 신앙적으로 보면 다 어린아이 같습니다.
이제 좀 어른스러워질 때가 됐는데 항상 어린 아이 같습니다.
어리광이나 하고 불평이나 하고…….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신분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의 씨를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거듭난 자 다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4.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할 이유는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은 소망인데 산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산 소망이라는 말은 죽은 소망이라는 말과 비교되는 말이고, 산 소망이라는 말은 거짓 소망이라는 말과 비교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과 다른 소망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이 헛된 소망이요 실체가 없는 거짓 소망이요 죽은 소망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이 죽은 소망이며 무엇이 산 소망인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바르게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진 원래의 소망은 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되는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 소망은 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날 잡고 잡아도 부자가 되지 못했고 어떤 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원도 한도 없이 많은 고기를 잡아보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배가 물에 잠기도록 많은 고기를 잡아보았는데 그렇게 이루어진 소망이 참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처음에는 잘못된 소망을 가지고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예수님께서 한자리 할 때 나도 한자리 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도 어느 날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줄 알았던 그 분이 힘도 못쓰고 잡혀서 끌려가서 비참하게 고문을 당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자신이 가졌던 소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나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자신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배반했던 자신을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의 그 음성도 들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도 그가 보았고 다시 오신다고 하신 그 약속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 소망이 무엇인줄을 알았습니다.
산 소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그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산 소망이 아닌 죽은 소망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죽은 소망을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기를 많이 잡는 일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일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 소망이 무엇인줄 모르고 삽니다.
산 소망의 중요성을 모르고 삽니다.
이렇게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동정의 여지도 없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 대신 죽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서 우리도 부활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감사로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본문 : 벧전 1:3
제목 :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사도 바울이 서신서를 기록할 때 대부분 글을 시작하면서 인사를 마친 후 쓰는 공통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와 “하나님을 찬송하라.” 이 두 마디는 대부분 서신서에 교대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왜 우리가 기도를 하고, 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소중한 행위가 감사요 찬송입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수천만 원 수십억 원 헌금을 드리는 것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슴 깊이 진정으로 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큰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 된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찬송, 마지못해서 그냥 부르는 찬송, 남에게 목소리나 노래실력이나 자랑하려고 가식적으로 부르는 찬송 때문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알고 진리를 바르게 알고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고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장 귀한 가장 우선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북에 자주 드나들면서 선교하시는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는데 이북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깊은 산 속에 가면 나무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답니다.
나무를 꺾어서 십자가를 만들어 세워놓고 거기 숨어서 예배를 드린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선교사인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을 해서 악수를 하면서 손가락으로 십자가 표시를 하면서 사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가끔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해 보면 그들의 소원이 마음껏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려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비하면 너무나 좋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악기들과 좋은 음악들로 마음껏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찬송을 부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 찬송을 부를 때 힘껏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반주자도 안내자도 다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도 이 찬송하는 것은 남에게 빼앗기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율로게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사도도 역시 이 서신서를 시작하면서 역시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찬송해야 할 이유를 아주 간단하면서도 아주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찬송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라고 했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라함' 즉 자궁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신의 자궁에서 나온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또는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간의 감정이라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자비나 긍휼의 의미로 발전된 말입니다.
신약에서 긍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에서 잘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불쌍히 여기고 완전히 탕감을 하여 준 그 왕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거지가 되어서 돌아온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서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 비유들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 마음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은 이런 것들보다 더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하게만 보신다면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이 이 자리에 와 있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동정을 받을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여러 가지 말로 변명을 하고 핑계들을 대지만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면 참 한심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사업에 망하고, 삶에 실패하고, 사람들에게 속기나 하고, 그 흔한 아파트 한 채 없이, 뭔가 이루어 놓은 일 하나 없이, 누군가 나를 존경하는 사람 한 사람 없이,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마음이 착하기를 합니까? 성격이 좋기를 합니까? 뭐 특별히 잘난 것이 있습니까?
날마다 죄를 짓고, 남에게 상처나 주고 한심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동정의 여지도 없는, 불쌍히 여길 마음도 들지 않는 나 같은 것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놀라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만 되신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 빠질 뿐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무리 선하고 우리의 의가 하늘에 닿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눈으로 보면 그것은 다 죄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복을 받고 사는 아주 중요하고 간단한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충성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이런 노력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비의 눈으로 보시지 않으시고 공의의 눈으로 보신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바짝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 우리가 찬송해야 할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우리의 죄 대신 십자가를 지시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진 것은 우리도 부활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이렇게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으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데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부활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실감이 안 나서 이런 말을 들어도 아멘이 시원치 않지 정말 이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다만 바라는 희망사항이 아니라 진짜 이루어질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장례식을 한번 가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주변의 분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여러 번 갔습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참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서글플까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시는 분들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 고생하시다가 힘들게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 아이고 참 안됐다. 라는 생각도 듭니다.
또 아버님을 어머님을 먼저 보내고 슬퍼하는 자식들을 보면서 그것도 또한 못할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없는 세상에 살았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죽음의 고통 죽음 때문에 헤어지는 고통 이런 것이 없으면 참 좋겠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이렇게 죽음을 통하여 이별을 하지만 다시 부활해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마음을 달랠 수가 있습니다.
더 다행한 것은 우리가 다시 부활하여 살게 될 다음 세상은 이런 죽음이나 이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해서 다시 갖게 될 몸은 지금 우리가 가진 이런 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시는 늙거나 병들거나 아프거나 죽는 일이 없는 완전한 몸으로 부활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19-22)
만약에 우리에게 부활이 없이 이 세상의 삶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나 다 부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부활하게 해 주신, 우리에게 부활의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감사와 찬송으로 힘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3.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부활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도록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마이클잭슨이라는 가수를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노래를 잘 불러서 인기가수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흑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화장을 잘하고 수술을 해봐도 흑인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얼굴을 하얗게 화장을 해서 백인처럼 꾸며보지만 백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가 백인으로 다시태어나지 않는 한 그는 흑인일 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죄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행실로 우리를 치장해도 우리의 속사람은 깨끗해지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깨끗해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의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어머니의 태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언제 어떻게 우리의 영혼이 거듭났는지는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다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고 교회에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도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이 없이 부모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한 것이 없이 그저 태어났습니다.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도 부모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을 한 후에는 내가 내 스스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을 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셔서 나를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어느 정도 신앙이 자랄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지만 장성하고 나면 우리가 노력을 해서 거듭난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셨는데 언제까지 옛사람 그대로 살겠습니까?
이제 장성한 성도답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만날 어린유치원생처럼, 만날 어린 초등학생처럼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이들, 아이들 이젠 말만 들어도 머리가 띵합니다.
어떻게들 말을 안 듣는지 그렇게 뛰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해도 틈만 있으면 뛰고 떠들고 싸우고 다치고
청소 좀 하라고 했더니 온갖 쓰레기들을 변기통에 쓸어 넣어서 변기가 막히게 하지를 않나, 영하의 날씨에 계단을 물걸레로 닦아서 얼음판을 만들어 놓지를 않나…….
이제 좀 어른들하고 놀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들도 신앙적으로 보면 다 어린아이 같습니다.
이제 좀 어른스러워질 때가 됐는데 항상 어린 아이 같습니다.
어리광이나 하고 불평이나 하고…….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신분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의 씨를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거듭난 자 다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4.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할 이유는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은 소망인데 산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산 소망이라는 말은 죽은 소망이라는 말과 비교되는 말이고, 산 소망이라는 말은 거짓 소망이라는 말과 비교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과 다른 소망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이 헛된 소망이요 실체가 없는 거짓 소망이요 죽은 소망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이 죽은 소망이며 무엇이 산 소망인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바르게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진 원래의 소망은 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되는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 소망은 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날 잡고 잡아도 부자가 되지 못했고 어떤 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원도 한도 없이 많은 고기를 잡아보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배가 물에 잠기도록 많은 고기를 잡아보았는데 그렇게 이루어진 소망이 참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처음에는 잘못된 소망을 가지고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예수님께서 한자리 할 때 나도 한자리 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도 어느 날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줄 알았던 그 분이 힘도 못쓰고 잡혀서 끌려가서 비참하게 고문을 당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자신이 가졌던 소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나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자신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배반했던 자신을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의 그 음성도 들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도 그가 보았고 다시 오신다고 하신 그 약속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 소망이 무엇인줄을 알았습니다.
산 소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그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산 소망이 아닌 죽은 소망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죽은 소망을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기를 많이 잡는 일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일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 소망이 무엇인줄 모르고 삽니다.
산 소망의 중요성을 모르고 삽니다.
이렇게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동정의 여지도 없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 대신 죽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서 우리도 부활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감사로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