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1.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12)
본문 : 딤후 2:11-13
제목 : 미쁘다 이 말이여.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2장에 들어와서 유독 눈에 뜨이게 반복되는 단어가 ‘말’ 혹은 ‘말씀’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셨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심각하게 듣고 자세하게 살펴보고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말씀의 핵심은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말씀 진리의 말씀 구원의 말씀 영생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은 사람이 반대한다고 해서 사람이 싫어한다고 해서 변경되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그 복음을 통해서 주신 약속들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말씀이 주제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믿을만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믿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미쁘다”라는 말은 “믿을만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믿을 가치가 있는 말씀이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할만하다는 뜻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말씀만은 우리가 믿고 따를만한 확실한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본문 11절 말씀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라고 한 후에 그 말이 어떤 말인지를 서너 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산다는 말이 믿을만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것과 사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죽을 대신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아 죽으셨고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다는 소망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죽을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형벌로 인해서 죽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을 따라 살다가 순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순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고 해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순교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그런 고난을 당하지만 절망하거나 낙망하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해석이 다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은 순교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고난이나 박해나 순교까지라도 기꺼이 당하면서도 지킬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것은 물론이며 이 세상에서 사는 삶도 최고의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다. 믿음 때문에 때로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일부러 고난을 자처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살 필요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나도 그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구원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나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신 죽음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의미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여기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과거의 바울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했고 자기의 의를 내세워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과거의 모습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새롭게 변화된 삶은 그의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고 율법 대신 믿음으로 살고 영원히 죽을 옛사람 대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새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셨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따르는 것,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성경 말씀 설교 말씀 교회 지도자의 말을 잘 듣는 것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의 기초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종도 하지 않지만 우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로 시작하는 본문을 쉐마 본문이라고 해서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주야로 묵상하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손목에다가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해두고 언제나 보고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거부하고 오히려 타락한 인간의 말이나 세상 헛된 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따르다가 나라가 비참하게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는 시점에서 예언하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7:22-23)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장 근본적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시고 경고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그 결과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가장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고 여러분에게 보내준 목회자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것을 오히려 가장 싫어합니다. 성경도 거의 읽지 않고 설교도 한 30분 지나면 지루하고 심방 가서 말씀을 좀 하려고 해도 예배는 생략하고 축복기도나 해주고 가라고 합니다.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 바쁘다고 하고 간단하게 몇 분 이내로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하고 대화도 그럴 것입니다. 좀 길게 이야기하면 잔소리 그만하라고 하고 엄마가 뭘 안다고 그래하고 핀잔이나 합니다. 친구들 만나면 밤새 이야기하면서 오락하고 재미있는 일은 무제한으로 하면서 좋은 말은 듣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 바르게 하기를 원하시면 매주 복음을 선포하는 복음의 설교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담임목사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신앙의 지도자라고 생각하면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이고 여러분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너무나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본문 12절에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가 믿을만한 말씀은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참고 견디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참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방해하는 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는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으려는 사람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잡혀가고 감옥살이도 하고 순교도 당하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런 핍박을 참고 견디고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런 핍박은 없어도 또 나름대로 방해세력들이 많이 있어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비기 때문에 끝까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승리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세상의 쾌락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짧은 인생인데 좀 재미있게 살다가 죽어야지 맨날 교회나 다니고 한눈 한번 못 팔고 고리타분하게 그렇게 살아서 되겠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들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 더 출세하고 싶은 욕심 더 잘 먹고 잘살고 싶은 욕심이 우리를 타락의 길로 유혹합니다.
교회에 가서도 거짓 선생을 만나고 이단을 만나서 아주 엉뚱한 길로 가게 만듭니다. 이단들이나 거짓 선생들은 머리가 너무 좋아서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잘 알고 쉽게 넘어오게 만듭니다.
이단이나 거짓 선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서로 질투하고 오해하고 말 한마디 잘못해서 원수 같은 사람이 되게 해서 그런 사소한 일로 신앙까지 버리게 합니다.
그런 일들이 있더라도 이 믿음 안에서 참고 견뎌야 합니다. 사탄이 그런 것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가려고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조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유혹도 참고 기분 나쁜 것도 참고 욕심도 때로는 버리고 믿음만 바라보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참고 견디면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왕처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왕처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왕 노릇이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후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최고의 것을 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왕이 받는 영광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왕 노릇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왕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믿음을 가지기 이전에는 우리가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아무런 자유도 없이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우리가 종의 신분에서 왕과 같은 신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왕처럼 마음대로 누리고 오히려 이 세상을 다스리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자연을 신처럼 숭배하면서 살았습니다. 태양을 달이나 별을 신이라고 섬기고 오래된 고목이나 큰 바위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심지어 동물들까지도 신으로 섬기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자연 만물의 지배를 당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 만물을 다스리면서 삽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스리면서 살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시련들을 견디지 못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부인하게 되면 예수님도 우리를 부인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모른다고 부인하실 것이며 그 많은 혜택을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본문 13절에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을만한 말씀은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우리 예수님은 항상 미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결같지 못하고 때로는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이 항상 믿을 수 있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여기 미쁨이 없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그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은 있지만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모든 일에 다 믿을만하고 신실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한결같이 신실한 삶을 살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가 다 신실하지는 못합니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느 날 보면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날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따라 잘 살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만은 확실히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의 삶이 좀 부족하다고 해도 그 믿음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예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시고 왕 같은 삶을 살게 해주신다는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거짓말을 하시거나 한번 하신 약속을 취소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변하지 않으시고 그 예수님의 약속을 막을만한 어떤 세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위해서 참으면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실실하지 못해도 우리 주님은 믿을 수 있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믿을만한 말씀, 믿을 가치가 있는 이 복음 진리의 말씀을 늘 기억하며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