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 2)
본문 : 딤후 1:3-5
제목 : 네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
“3.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임과 동시에 올해에 우리가 배우게 될 디모데후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목회자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성도들에게 바르게 전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가짜가 너무 많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도 바르지 못한 양심으로 성경을 잘못 보고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진리와 반대 방향의 설교를 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것들을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고 디모데와 다시 만나기를 원하는 이유는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눈물과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이 다시 한번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이유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옳게 분별하여서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되고 또 자신이 맡은 교회에서 그 복음을 전하여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게 하려는 디모데를 생각만 해도 감사하고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지시고 누군가에게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생각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본문 3~4절에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될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평생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했는데 그에게 온 것은 감옥행이고 사형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원망이나 불평이 나오고 신세타령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을까, 내가 전한 복음이 진짜일까, 의심도 해볼 만한 그런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을 하고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도 대우가 시원치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자기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면 원망부터 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참으로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원망이 나오고 불평을 한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원망이나 불평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감사 이유가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가 생각나고 그 디모데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디모데가 사도바울에게 특별하게 뭘 잘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생각날 정도로 잘한 일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사도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되고 디모데 자신도 사도바울의 뒤를 이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서 사도바울의 뒤를 따랐다는 것이 사도바울에게 감사 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웠을 것이고 그 복음을 듣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처럼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을 보면 너무 기쁘고 감사가 나왔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사례도 받고 목회가 잘 되면 호화로운 생활도 하고 노후도 보장이 되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는다면 목회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그런 보장은커녕 목숨도 보장받지 못하는 아주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고 잡혀가서 순교를 당할 수도 있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자신의 뒤를 이어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디모데를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을 것입니다.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원래 전통적인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잘 섬겼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자신을 이런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청결한 양심으로”라는 말을 왜 붙였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과거부터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는지 지금은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말인지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청결한 양심은 과거에 가지지 못했던 또 다른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양심으로는 이런 불리한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복 받고 잘살고 출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한다면 지금은 원망하고 불평할 때이지 감사할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때의 양심이 아닌 새로운 양심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섬기기 때문에 감사드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라고 하셨습니다.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깨끗한 마음을 가진다고 해도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청결한 마음에서 청결이 오늘 본문에서의 청결과 같은 단어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청결한 양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마음을 청결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바울은 그런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청결한 양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뜻을 보게 되고 그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디모데의 눈물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언제 눈물을 보였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를 떠날 때였는지 사도바울이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고별설교를 했을 때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눈물을 흘릴 수 있었겠지만 아마도 복음을 듣고 흘린 감격의 눈물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 되려고 하면 복음을 듣고 흘린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들었는데 그런 뜨거운 감동이 없다면 진실된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일까요?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며 나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만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일까요?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도 없고 만나서 기뻐할 사람도 없는 그런 사람일까요? 머리에 떠올리기도 싫어하고 저주하면서 나를 피하려는 사람이 많은 그런 사람일까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예수님께서 나를 생각할 때마다 고마워하시고 나를 볼 때마다 기뻐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사는 성도들을 생각하고 볼 때마다 성도들은 목사를 생각하고 볼 때마다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믿음을 소중하게 여길 때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자가 되었을 때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이런 감사와 기쁨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본문 5절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하고 기쁨이 넘치게 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위대합니다. 그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문제는 그 믿음에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진실하게 고백해야 그 믿음이 효력을 발생하는데 가짜로 거짓으로 위선적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니까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까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주여 주여 하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사실은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 아니고 가짜 믿음 즉 믿는 척만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거짓이 없다”라는 말은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닌”, “가장하는 것이 아닌”, “꾸민 것이 아닌”이라는 말입니다.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것처럼 자신의 진심이 아니라 대본에 있는 대로 하는 고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가장하고 꾸며서 남들 앞에서만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일부러 연기를 하면서 거짓말로 신앙을 고백하고 남을 속이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인이 된다고 해서 특별히 교회에서 얻을 것도 없는데 자신을 속이고 믿는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믿음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잘못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배워서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처음 보고 배운 것에 대해서 애착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웬만해서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고수하면서 일평생을 보냅니다. 교회에 오는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와서 처음 듣고 배운 신앙을 최고로 생각하고 그것이 진짜 믿음으로 믿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해도 교회가 많은 종파나 교단이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신학도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 정반대의 신학을 가진 교파도 있습니다. 정반대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도 서로가 자신이 아는 신학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교적 오랫동안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로는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진리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작은 차이들까지 말씀드리려만 끝이 없겠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거짓 없는 믿음을 이야기할 때 반대로 거짓된 믿음이란 무엇을 말한 것일까요? 아마도 바울이 조상 대대로 섬겨 오던 유대교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성경에 기록된 각종 계명이나 율법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줄 알고 지키고 사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신앙이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것이 최고인 줄 알고 율법을 제일 잘 지키는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우리가 그것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나 역사들이 오실 예수님에 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엉뚱하게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것이 잘못된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유대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율법을 바로 지키며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율법을 잘 지킬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가식적으로 형식적으로 잘 지키는 척하는 것이 잘못된 신앙이고 위선적인 신앙입니다.
중세시대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하는 거짓 신앙은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받아서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은 그들이 가진 아주 작은 것 조금 나누어주면서 선한 사람인 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처럼 바르게 살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바른 신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 한번 살펴보십시오. 남들 볼 때 남에게 보여주려고 선한 척만 하지 진짜로 선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진짜 신앙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멸망해야 할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 없는 진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 거짓 없는 믿음이 있습니까?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칭찬이 되고 기쁨이 되는 진실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