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3)
본문 : 딤후 1:6-8
제목 :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6.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귀에 익숙한 단어가 축복이라는 단어입니다. 축복합니다. 복 많이 받아서 모든 일이 잘되고 영육 간에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이런 인사말들에 익숙합니다.
또 교회에 다님으로 인해서 얻는 유익들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합니다. 교회에 가면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도 할 수 있고 취미생활이나 또 함께 선한 일 좋은 일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좋은 일들이 실제로 교회 생활 속에 유익한 일들로 나타납니다. 잘되고 행복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고 이런 좋은 일들이 교회 생활을 통해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좀 성숙해지면 이런 복이나 보람된 일의 개념들이 좀 바뀌기 시작합니다. 복도 이 세상에서 누리는 육신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람된 일도 이 세상의 취미생활이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겪는 일이 보람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요 설교 제목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고난을 받으라고 하면 교회에 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복 받고 잘 된다고 해도 교회에 안 오려고 하는데 고난을 받으라고 하면 너나 받으라고 외면할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은 교회의 지도자나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엄청난 것을 주는지 아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므로’로 시작을 합니다. 여기 ‘그러므로’는 우리가 지난주에 배운 바로 앞 절의 말씀과 연관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속에 거짓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이어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거짓 없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적이고 거짓되고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정말로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믿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고 견딜 수 있고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일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거짓 없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런 고난을 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진실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챤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정도의 고난은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본문 6~7절에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를 하면서 유념해야 할 사항들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가 보면 가끔은 복음의 열정이 식어지고 믿음도 식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필요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안수받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사를 생각하고 다시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복음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목사로 안수해서 세웠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해서 그 받은 은사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과 은사라는 말은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 쓰는 용도는 다릅니다. 은혜나 은사라는 말은 다같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은혜나 은사라는 말로 씁니다.
은혜는 구원의 선물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 믿음을 지키고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사를 선물로 주신 목적은 믿음을 굳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잘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은사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방언이나 신유를 포함한 기적적인 역사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재능을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디모데가 목회자로 안수받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목회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재능이나 능력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디모데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주셨음을 말합니다.
목회자들이 처음 안수를 받을 때는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복음 외에 다른 교훈들을 전하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역사하면 그 욕심이 이끄는 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잔꾀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물질이나 명예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유익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이 생길 때 처음 안수를 받을 때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으로 시들어가는 성령님의 역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고 눈물 흘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다릅니다. 그 사람이 가진 재능을 따라서 그 재능을 잘 발휘하여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 재능을 잘 사용하게 하시면 그것이 은사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 아무렇게나 살면 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로서 이 세상에 살기에 극복해야 할 좋지 않은 습성들도 각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좋지 않은 습성들도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사로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갈라다이서 5장에 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즉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에게 사랑을, 기쁨이 없이 사는 사람에게 기쁨을, 다른 사람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화평을, 참지 못하는 사람에게 인내를 가지고 살게 해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성도답게 살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주신 성령님의 은사를 몇 가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해서 담대하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세상이 너무 크고 강하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힘이 있고 능력에 있어 보이기 때문에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나 자신을 보면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움츠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나고 내가 혼자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면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 혼자만 고생하는 것만 같이 외로울 때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길을 가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그 고난의 길이 승리의 길이었고 우리가 가는 고난의 길도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멸망을 이기는 승리의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어서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그 하나님의 능력이 있듯이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도 그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하보다 더 귀한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 세상의 복락보다 영원한 천국에서의 복락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절제하는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세상의 쾌락을 절제하는 마음, 세상의 욕심을 절제하는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생각으로 신앙생활하고 주의 일을 하려면 힘들고 여렵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늘 내 생각보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내가 가는 길에 충만하게 역사하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본문 8절에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복음과 함께 가는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그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것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고난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 복음을 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이 길을 가는 것은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다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너무나 배가 아파서 수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가 가는 길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쾌락이나 돈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하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유대교를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때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루터나 칼빈이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지적하고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할 때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받고 순교를 했습니다.
지금 다시교회 개혁하고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되신 영광의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모든 목회자나 성도들이 이 일을 위해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고 누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감옥에나 가고 순교나 하는 바울을 부끄러워합니다.
공부할 때 어떤 신학교 교수가 한 말이 평생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있을지도 모르는 내세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우리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을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고 확실하지도 않은 천국 그런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이 세상에서 서로 만나는 부모형제 이웃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인 복음과 반대의 길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웬일인지 사람들은 그런 말에 더 감동을 받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성경에 있는 말이고 우리 성도들이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그런 말에 감동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탄의 계교가 숨어 있는 위험한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신학교 교수로 임명하고 그런 말을 해도 자르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교회가 이미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도 복음이 부끄럽습니까? 천국보다도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더 좋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다도 여러분의 선행이 더 자랑스럽습니까? 아직 복음의 능력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들어서 알기는 하지만 진실로 믿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오는 고난이 힘들게 여겨질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님의 은사가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받은 그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례를 받을 때 임직을 받을 때 특별하게 주신 성령님의 은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와 은사는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데 두렵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이기고 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복음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그 고난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담대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