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03)
  본문 : 행 7:35-36  
  제목 :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5.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의 말씀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이 구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늘 이런 구원에 관한 주제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가 이 구원에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성경의 핵심을 파악하고 보면 결국 그런 구원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관한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핵심을 흐르는 주요 관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구원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냥 받으면 좋고 받지 않아도 무방하다든지 구원은 특별히 부족한 사람들이나 받으면 되는 것이라든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생들이 이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참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기필코 꼭 받아야 하고 받으면 엄청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는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신분 상승을 위해서 엄청난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에서 탈피하고 서민에서 중산층 그리고 상류층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그런 신분상승이 어렵기도 하지만 상류인생이 된다고 해도 그나마 백여 년 살면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마는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신분이 변화되는 것은 세상의 그런 신분상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며 시한부가 아니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원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하든지 이 구원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이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된 사람들이 이 구원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시겠다고 하면 예 감사합니다. 라고하고 구원을 받으면 될 것인데 어쩐 일인지 선뜻 손을 내밀지 않고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에게 해 주시고 저는 다른 것 좀 있으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돈이 없어서 살기가 좀 불편한데 가능하시면 돈을 좀 주시든지 사업이나 잘 되게 해 주시고 우리 아이들 좋은 대학이나 들어가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구원 같은 것은 받지 않아도 스스로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남에게 사기를 친 일도 없고 도적질이나 살인 같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죄 용서 같은 것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또 하나는 구원을 방해하는 적군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그들입니다. 사탄과 그 졸개들이 귀신과 그 들에게 노예가 된 사람들이 이 구원을 절대적으로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력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철저하게 방해를 합니다.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고 유혹을 하고 감언이설로 속이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권보호라는 이름으로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별별 것을 다 동원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안에까지 이런 사탄의 사주를 받는 거짓선생들이 들어와서 구원이 별것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교회에서 딴 짓을 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사탄이 하는 짓인 줄 모르고 자기도 모르고 따라하는 목회자들도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매주 이 구원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구원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런 구원과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구원이 필요한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으로 보내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스데반이 이 설교를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하면서 모세를 통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관련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또 오늘날 우리들을 구원하시려는 열심을 살펴보겠습니다.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본문 35절 말씀에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신 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구원이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애굽에서 종노릇을 하면서 인간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바로 앞의 34절 말씀에서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와서 살면서 처음부터 고통스럽게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정권이 바뀌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왕이 되어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을 때는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인구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한 나라가 형성될 정도가 되자 겁을 먹고 핍박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애굽은 원래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지나고 살만한 세상이 되었으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살만한 세상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느 정도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 되었으면 누군가는 돌아가지고 외치든지 하나님께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었으면 이 고통에서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호소를 했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늦게 그 고통이 견딜 수 없게 될 때 그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호소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각 사람들의 형편에 따라 다양한 세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을 극복하고 인간답게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소 어렵지만 그런대로 지낼만하고 견딜만해서 그냥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죽지 못해서 사는 어려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편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고 이 세상의 삶은 죽음을 향해 멸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세상의 삶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삽니다. 살만하기 때문에 세상의 재미에 빠져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그런 어려움을 통해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많이 지은 자에게 은혜가 크다는 말이 지은 죄를 통해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의 주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2)관리와 재판장으로 생각하고 거절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냈습니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자기 백성들을 돌아볼 마음으로 그들이 사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때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묻어버렸습니다. 그 다음날 또 그곳에 가 보았더니 이번에는 이스라엘 동족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말립니다. 동족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서로 싸우면 되느냐고 싸움을 말립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게 하는 말이 누가 너를 우리들의 관리와 재판장으로 삼았느냐고 항의를 하고 모세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을 우리를 죽이려 왔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구원해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도망을 하고 말았던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거부한 이유는 네가 왜 우리의 관리나 재판장이 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관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콘(ἂρχων)이라는 단어는 왕, 통치자, 집권자, 관원, 당국자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 당시에 권력을 잡고 다스리는 사람들 편에서 일을 하는 애굽의 관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판장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법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관리들과 재판장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억울한 일도 많이 당했을 것이고 착취도 당하고 정말로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관리들과 재판장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관리나 재판장들은 피하고 멀리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평화롭게 잘 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관리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더 평화롭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하는가를 연구하여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재판장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잡아서 벌을 주고 못하게 하여 우리들을 보호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맡은 사람들이 그 임무를 망각하고 자기들 권력으로 삼고 바르게 집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를 하고 피하려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오해 때문에 그들을 도우려거 한 모세를 관리나 재판장이 되려하는 사람이라고 거절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불러 모으신 교회를 그들을 다스리고 재판하는 곳으로 오해를 하면서 거절을 합니다. 교회에 가면 목사가 맨날 잔소리만 해, 이것 하지 말라 저것하지 말라 이것해라 저것해라 안 그러면 벌 받는다 공갈을 하는 곳으로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다스리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른 길로 가도록 잘 안내하고 도와드리는 곳입니다. 여러분을 재판하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심판이 없는 곳으로 안내하는 곳입니다.

 

3)관리와 속량자로서 보내셨습니다.


  관리와 재판장으로 오해를 하고 모세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오해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관리와 재판장이 아닌 관리와 속량자로서 모세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낸 것은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고 재판하고 벌을 주는 사람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사하고 그들을 죄에서 종에서 노예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왕으로 통치자로 심판관으로 오셔서 그들의 권력을 빼앗고 그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괴롭히러 온 것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여기 속량자라고 하는 단어는 다른 성경에서 구속자 혹은 구원자로 번역을 했지만 속량자라고 번역을 한 것은 이 단어의 어원이 “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다.”라는 뜻을 가진 뤼트로오(λυτρόω)라는 단어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값을 치러주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를 모세에게만 적용을 한다면 좀 모순이 있는 말입니다. 모세가 애굽 백성을 구해낼 때 몸값을 주고 구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강제로 풀어주게 해서 끌고 나왔습니다. 여기에다가 이런 단어를 쓴 것은 이 모세의 모습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예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예수님의 피로 그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무렇게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서 구원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죄 값을 치러야만 됩니다. 그 반드시 치러야 할 죄의 값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보혈로 값을 지불하고 받은 구원이기 때문에 너무나 귀한 구원입니다.

 

4)가시나무떨기에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보내셨습니다.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을 “가시나무떨기에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가시나무떨기의 불을 통하여 모세를 만나주셨던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습니다.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습니다. 구원을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도 그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있으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해주셨습니다.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본문 36절에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냄을 받은 모세는 그 명령을 따라 애굽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면서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오늘 다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악착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열 가지의 재앙으로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장자들을 다 죽이고 짐승들도 먼저 난 것은 다 죽임을 당하지 마지못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고도 바로 후회하고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을 군사를 이끌고 다시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해 주셨고 애굽의 군대들은 바다 안으로 들어와서 수몰이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 40년간의 삶은 기적적인 삶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것 없이 다 입고 먹고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적들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탄의 세력들은 애굽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처럼 우리들을 죄에서 멸망에서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엄청난 방해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구원의 복음을 우리도 선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이런 구원을 중요하게 여기고 선포하는 광성교회에 보내신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가문의 구원을 위해서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하시고 시집오게 하시고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직장에 사업장에 우리의 이웃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서 우리를 여기 보내셨습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모세의 손에 든 지판이가 능력을 발휘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들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아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꼭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 구원을 받게 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 구원의 복음을 세상 만민들에게 선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