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93)
본문 : 행 7:2-5
제목 : 약속하셨으며.
“2.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공회 앞에 서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을 매수해서 거짓증인을 세우고 심문을 하는 대제사장과 거기 모인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스데반이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답변이 기록된 7장을 우리는 스데반의 설교라고 합니다. 답변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7장 말씀을 미리 읽어보신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설교라고 하기에는 좀 정신이 없습니다. 내용도 구약성경을 일주하는 엄청나게 긴 설교입니다. 성경에는 요약만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보면 사실은 더 많은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신학자들 중에서도 이 설교를 혹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만하고 지루하다. 앞뒤가 맞지도 않고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서툴고 자만에 빠져 있고 듣기 힘이 드는 설교라고 비평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의 핵심을 바르게 파악한 사람들은 이 설교를 “정교하고 능란한 복음의 선포”라고 이야기 하면서 그 가치를 아주 높게 평가를 합니다. 스데반이 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뜻을 아는 사람은 이 설교가 왜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왜 유대교 지도자들이 스데반을 잡아다가 재판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스데반의 변명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죄목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과 성전에서의 제사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고 규례를 고치겠다고 하신 것을 전하고 다닌다는 것이 스데반의 죄목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해명을 하고 있는 것이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이나 성전의 제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을 통해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고 성전에서의 제사도 종결시키셨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이나 성전제사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민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게 하는데 공헌한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역사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게 하는 진짜 복음의 설교자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싸움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스데반의 논쟁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전 같은 곳에서 제사 같은 예배를 드릴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인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인가 이런 논쟁이 오늘날 교회의 핵심논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논쟁은 사소한 논쟁이 아닙니다. 누가 옳고 그르든지 이것을 따르나 저것을 따르나 별 차이가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요 반드시 분별을 해서 바르게 따라야 할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가, 직분자는 어떻게 세우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쟁은 서로 양보하기도 하고 적당히 하면 되겠지만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까지 오게 된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약속하셨으며”로 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이 어떤 성격을 가진 약속인지 그 약속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소명
스데반이 구약성경 창세기 12장부터 기록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26장에 이삭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 까지 아브라함을 주인공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중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메소보다미아의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시고 가나안 땅으로 와서 후에 그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한 민족을 이루며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것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과 제사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불러 주셨고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은 사람도 아닌 개나 돼지처럼 취급을 했습니다. 말도 섞지 않고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지도 않고 아주 다른 사람처럼 생각하고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선택하신분이 사람이 아니라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우신 선민이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그 율법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는 율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자신들에게 주신 아주 특별한 것이라는 자부심이었습니다.
사람들도 국가를 세우고 나름대로 법과 질서를 세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헌법을 만들고 형사법 민사법 이런 저런 법들을 만들어서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법들은 자꾸 고쳐야 하고 법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하기도 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악법을 만들어서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데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법은 수천 년이 지나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원칙을 정해주는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너무나 잘 아시고 만들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율법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들이 성전과 성전에서의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그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을 때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을 하나하나 일일이 아주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셨고 그 말씀하신 그대로 세운 것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제사에 관해서도 이런 때는 이런 제사를 드려야 하고 그 제사를 드릴 때는 어떤 짐승을 어떻게 잡아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드려야 하는지를 다 설명을 해 주셨고 그 말씀대로 드리는 것이 제사이기 때문에 성전에서의 제사를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시고 불러주셨음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것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소중한 것임은 알았지만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자신들을 선택해 주셨는지 왜 율법을 주셨는지 왜 성전을 주시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인지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자세히 잘 몰랐고 정말 중요하게 알아야 할 핵심은 오히려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주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신구약 성경 66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성경을 자유롭게 읽고 그 성경을 공부를 통해서 배우기도 하고 설교를 통해서 그 해석을 듣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예배라는 엄청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지 않아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살기도 하고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임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라고 했습니다. 신구약성경 66권이 다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기본적인 것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엉뚱한 것을 보고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이 좋은 예배를 드리게 하셨는데 그 감사함을 잘 모르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배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특권인데 그 특권을 모르고 귀찮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받은 사람은 그 좋은 것에 대한 의미를 바르게 알고 그 가치를 바르게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 중요한 것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과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소한 차이가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본문 5절에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비교적 비슷한 표현을 썼는데 5절 말씀은 뒤에 일어난 일을 정리하여 스데반이 덧붙인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문제를 덧붙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약속을 강조해서 설명을 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부르시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와서 살게 하신 것은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 것보다 미래에 아브라함과 가나안 땅과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될 그 후손들을 통해서 주실 약속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고향을 떠나라고 하면서 정확한 지명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가기는 했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하며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10)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 있음을 믿고 그 성을 향하여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 성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실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주시려고 하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왔을 때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여기서(가나안 땅에서) 발 붙일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시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으로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왔으면 다문 몇 평이라고 땅을 주시고 살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발붙일 땅도 안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속만 주셨는데 그 약속이라는 것도 믿기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아직 자식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그것도 이미 자식을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에게 그 후손에게 이 땅을 소유로 주신다는 약속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하셔도 좀 믿을만한 근거를 가지고 약속을 하셨으면 쉽게 믿기도 하겠지만 믿기 어려운 일만 가지고 약속을 하니까 아브라함이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직 거기서 바로 민족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했을 때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을 주시는 것을 후일로 미루고 약속으로만 주셨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훈련시키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나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 성도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도 항상 미래적인 것이고 믿기에 힘이 드는 것이지만 그것이 믿음의 핵심임을 알게 하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현재를 좋아합니다. 신앙생활도 오늘 복을 받아야 하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복을 받기를 좋아하지 미래의 세상 영원한 천국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한 도성 영원한 천국 영원한 생명을 별 관심이 없이 삽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믿을만한 근거가 있어야 믿고 내 머리로 이해가 되어야만 믿으려고 하지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 믿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인간의 습성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성경을 통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약속과 실천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인간들에게 하신 약속을 그대로 실천에 옮김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하십니다.
또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도 보여주시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일어난 기적들을 따라서 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해서 재현시키려고 하지만 기적은 재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반복되거나 반복해서 자꾸 함으로서 일어나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표적으로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우리에게 부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실천해 나가시는 일들을 보면서, 인간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먼 미래에 주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줄줄 외우면서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을 통해서 미래에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 안타까움을 스데반이 설교를 통해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 회원 여러분 당신들은 왜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배척을 합니까? 당신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율법이나 성전의 제사가 우리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외쳐야 합니다. 성경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을 강하게 외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특별히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성전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되찾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