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0.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11)
본문 : 마 5:14-16
제목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할 때 제일 먼저 갖게 되는 것은 마음의 부담감일 것입니다.
나 자신이 부패되어 있고 나 자신이 남들에게 떳떳하게 내보일만한 것이 없는데 나를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면 마음이 오히려 괴로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기독교를 바른 양심으로 선을 행하고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사는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즉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면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법을 잘 지키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을 오해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늘 그런 방향으로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그릇을 덮어놓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이같이 너희 착한 행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 말씀을 너희는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칭찬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엄청 부담을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핵심적인 뜻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당시의 제자들은 그렇게 할 만큼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이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있는 무리들은 세상에 그런 모범생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모범생들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심 가지고 사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세리와 창기로 구별이 되는 죄인들과 세상에서 별 볼일이 없이 사는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별 볼일이 없었던 사람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이나 받고 살던 사람들, 뭐 하나 자랑할 것이라고는 없는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만이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들만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시 것입니다.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이 빛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미 빛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미 빛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힘쓰지 않아도 우리가 가는 곳에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빛을 감추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빛을 모든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확실하게 보여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서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밝은 곳으로 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빛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시고 빛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세상의 빛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 예수님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빛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우리가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성품들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할 때 빛이 되시는 예수님의 빛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해를 합니다.
예수님을 빛이라고 할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로서 온 산 떡(요 6:51), 양의 문(요 10:7), 선한 목자(요 10:11), 포도나무(요 15:5), 부활이요 생명(요 11:25)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 그 의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들어 있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 길을 밝혀주시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밝히 보여주시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밝히 보여주신 그 빛이 이제는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도 그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보여주는 빛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생이 누구인지 죄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인지 참된 진리를 보여주는 빛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는 빛입니다.
2. 산 위에 있는 동네.
본문 14절 말씀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산 위에 세워진 동네가 많다고 합니다.
예루살렘도 시온 산에 세워졌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산 위에 세우진 동네는 숨길수가 없습니다.
산 속 골짜기에 세워진 동네라고 하면 거기 가서 보지 않는 한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산 위에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진 동네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보고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장차 제자들을 통하여 세워질 교회를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잘 보이는 다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진 동네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보고 알게 될 빛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숨어서 자기들끼리 쑥덕쑥덕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한 복판에서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에 따라서 만들어진 아주 중요한 단체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빛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빛이 없으면 이 세상이 암흑 속에 빠지듯이 교회가 없으면 이 세상이 깜깜한 암흑 속에서 멸망의 길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받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이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달하고 실천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 진리가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참된 인생의 의미가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인생의 목적이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죄 사함이 있고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겨져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밝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런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니까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외치지 못하니까 하나님나라를 바르게 보여주지 못하니까 다시 깜깜한 암흑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의 심판 같은 것은 없다 다 우리끼리 잘 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며 큰 소리를 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이웃나라 일본에서 지진과 쓰나미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던 어떤 목사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교회가 욕을 먹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보면 망루가 무너져서 죽은 사람들이 우리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이런 일들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참고 계시니까 우리가 이 정도라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크고 작은 지진들이 발생할 것이고 화산 폭발의 징후들도 계속 감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진으로 피해를 보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이 되지만 지금 백두산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엄청난 위험요소들을 가지고 살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고 큰 소리를 치면서 삽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 세상을 볼 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노인들 하고 어린아이들 하고 공통점이 있습니다.
도무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일고 있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고 최고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리 타당성이 있고 바른 이야기를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의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자기 뜻대로 살다가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신들 앞에 엄청난 위험들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무지 속에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고 그들이 밝은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3. 등경 위의 등불.
본문 15절 말씀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꼭 그렇게 구별하신 것은 아니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산 위에 세운 동네를 빛이라고 할 때 교회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집안에 켜진 등불을 생각할 때 성도 개인으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 성도 개개인이 빛이라고 한다면 15절의 집 안에 켜진 등불과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전기가 없는 세상에서는 등불로 집안을 밝혔습니다.
기름에 심지를 만들고 불을 붙이면 전기 불처럼 밝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생활은 아쉬운 대로 하도록 조금은 밝습니다.
사람들이 등잔들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말이란 곡식을 셀 때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말을 잘 압니다.
작은 량을 담아서 세는 되가 있고 열배쯤 되는 량을 담아서 세는 말이 있습니다.
불을 켠 사람이 실컷 불을 켜서 그 말로 덮어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불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높은 대를 만들어서 그 위에다가 두는 것이 상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빛이 도덕적이거나 양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면 가정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내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족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보여 줌으로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집에 돌아가면 세상 사람처럼 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우리들 보고 하는 말이 자기들은 교회에는 잘 안 나가도 삶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산다고 자랑하면서 은근히 우리를 비웃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에 가면 정말 열렬한 신자 같은데 집에 오면 세상에 나가면 불신자들처럼 똑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인들은 속내를 잘 표현하지 않는 습성이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좋아도 그렇게 좋다고 내색을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슬퍼도 그렇게 슬프다고 잘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표현도 잘 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인지 불신앙인지 잘 구별이 안 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신앙을 나타내어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감사를 하고 신앙을 표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천국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인 것을 나타나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부터 이런 작은 불빛이 식구들에게 보일 때 그런 가정들이 하나 둘 모여서 큰 불빛이 되고 산 위에 세운 동네가 되는 것입니다.
4. 착한 행실
본문 16절 말씀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또 성도들이 세상에서 가정에서 빛을 비추면서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빛을 “착한 행실”이라고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착한 행실이 무엇일까요
착한 행실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일에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보다도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선하고 바르게 살면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살면 우리의 사랑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착한 행실이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도덕적이고 양신적인 선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삶을 살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빛이라는 칭호를 주신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이나 도덕은 그들이 만든 기준에 의한 것이고 우리와 맞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산다고 해서 그들이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할 때 착한 행실이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선함이 아니라 최고의 선한 것, 지극히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1:9-10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총명이 점점 더 풍성해져서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며 그 날까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지극히 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선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그 복음을 믿으며 그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 지극히 선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천국을 바라보고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천국 백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고 아 하나님이 계시구나, 천국이 있구나, 믿어야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교회가 우리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 마 5:14-16
제목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할 때 제일 먼저 갖게 되는 것은 마음의 부담감일 것입니다.
나 자신이 부패되어 있고 나 자신이 남들에게 떳떳하게 내보일만한 것이 없는데 나를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면 마음이 오히려 괴로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기독교를 바른 양심으로 선을 행하고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사는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즉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면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법을 잘 지키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을 오해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늘 그런 방향으로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그릇을 덮어놓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이같이 너희 착한 행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 말씀을 너희는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칭찬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엄청 부담을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핵심적인 뜻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당시의 제자들은 그렇게 할 만큼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이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있는 무리들은 세상에 그런 모범생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모범생들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심 가지고 사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세리와 창기로 구별이 되는 죄인들과 세상에서 별 볼일이 없이 사는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별 볼일이 없었던 사람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이나 받고 살던 사람들, 뭐 하나 자랑할 것이라고는 없는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만이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들만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시 것입니다.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이 빛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미 빛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미 빛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힘쓰지 않아도 우리가 가는 곳에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빛을 감추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빛을 모든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확실하게 보여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서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밝은 곳으로 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빛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시고 빛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세상의 빛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 예수님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빛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우리가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성품들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할 때 빛이 되시는 예수님의 빛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해를 합니다.
예수님을 빛이라고 할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로서 온 산 떡(요 6:51), 양의 문(요 10:7), 선한 목자(요 10:11), 포도나무(요 15:5), 부활이요 생명(요 11:25)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 그 의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들어 있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 길을 밝혀주시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밝히 보여주시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밝히 보여주신 그 빛이 이제는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도 그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보여주는 빛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생이 누구인지 죄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인지 참된 진리를 보여주는 빛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는 빛입니다.
2. 산 위에 있는 동네.
본문 14절 말씀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산 위에 세워진 동네가 많다고 합니다.
예루살렘도 시온 산에 세워졌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산 위에 세우진 동네는 숨길수가 없습니다.
산 속 골짜기에 세워진 동네라고 하면 거기 가서 보지 않는 한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산 위에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진 동네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보고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장차 제자들을 통하여 세워질 교회를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잘 보이는 다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진 동네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보고 알게 될 빛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숨어서 자기들끼리 쑥덕쑥덕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한 복판에서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에 따라서 만들어진 아주 중요한 단체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빛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빛이 없으면 이 세상이 암흑 속에 빠지듯이 교회가 없으면 이 세상이 깜깜한 암흑 속에서 멸망의 길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받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이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달하고 실천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 진리가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참된 인생의 의미가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인생의 목적이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 죄 사함이 있고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겨져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밝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런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니까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외치지 못하니까 하나님나라를 바르게 보여주지 못하니까 다시 깜깜한 암흑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의 심판 같은 것은 없다 다 우리끼리 잘 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며 큰 소리를 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이웃나라 일본에서 지진과 쓰나미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던 어떤 목사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교회가 욕을 먹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보면 망루가 무너져서 죽은 사람들이 우리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이런 일들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참고 계시니까 우리가 이 정도라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크고 작은 지진들이 발생할 것이고 화산 폭발의 징후들도 계속 감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진으로 피해를 보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이 되지만 지금 백두산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엄청난 위험요소들을 가지고 살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고 큰 소리를 치면서 삽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 세상을 볼 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노인들 하고 어린아이들 하고 공통점이 있습니다.
도무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일고 있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고 최고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리 타당성이 있고 바른 이야기를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의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자기 뜻대로 살다가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신들 앞에 엄청난 위험들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무지 속에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고 그들이 밝은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3. 등경 위의 등불.
본문 15절 말씀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꼭 그렇게 구별하신 것은 아니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산 위에 세운 동네를 빛이라고 할 때 교회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집안에 켜진 등불을 생각할 때 성도 개인으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 성도 개개인이 빛이라고 한다면 15절의 집 안에 켜진 등불과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전기가 없는 세상에서는 등불로 집안을 밝혔습니다.
기름에 심지를 만들고 불을 붙이면 전기 불처럼 밝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생활은 아쉬운 대로 하도록 조금은 밝습니다.
사람들이 등잔들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말이란 곡식을 셀 때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말을 잘 압니다.
작은 량을 담아서 세는 되가 있고 열배쯤 되는 량을 담아서 세는 말이 있습니다.
불을 켠 사람이 실컷 불을 켜서 그 말로 덮어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불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높은 대를 만들어서 그 위에다가 두는 것이 상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빛이 도덕적이거나 양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면 가정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내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족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보여 줌으로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집에 돌아가면 세상 사람처럼 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우리들 보고 하는 말이 자기들은 교회에는 잘 안 나가도 삶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산다고 자랑하면서 은근히 우리를 비웃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에 가면 정말 열렬한 신자 같은데 집에 오면 세상에 나가면 불신자들처럼 똑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인들은 속내를 잘 표현하지 않는 습성이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좋아도 그렇게 좋다고 내색을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슬퍼도 그렇게 슬프다고 잘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표현도 잘 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인지 불신앙인지 잘 구별이 안 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신앙을 나타내어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감사를 하고 신앙을 표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천국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인 것을 나타나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부터 이런 작은 불빛이 식구들에게 보일 때 그런 가정들이 하나 둘 모여서 큰 불빛이 되고 산 위에 세운 동네가 되는 것입니다.
4. 착한 행실
본문 16절 말씀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또 성도들이 세상에서 가정에서 빛을 비추면서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빛을 “착한 행실”이라고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착한 행실이 무엇일까요
착한 행실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일에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보다도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선하고 바르게 살면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살면 우리의 사랑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착한 행실이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도덕적이고 양신적인 선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삶을 살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빛이라는 칭호를 주신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이나 도덕은 그들이 만든 기준에 의한 것이고 우리와 맞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산다고 해서 그들이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할 때 착한 행실이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선함이 아니라 최고의 선한 것, 지극히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1:9-10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총명이 점점 더 풍성해져서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며 그 날까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지극히 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선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그 복음을 믿으며 그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 지극히 선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천국을 바라보고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천국 백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고 아 하나님이 계시구나, 천국이 있구나, 믿어야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교회가 우리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