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5. 광성교회 성탄감사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성탄2020)

 

2020. 12. 25. 광성교회 성탄감사예배 설교 양향모

본문 : 1:14

제목 :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즐겁고 기쁜 성탄을 맞이하였습니다.

  성탄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며칠 전에 우리 집사람 생일이 지났습니다. 생일이 되었으니까 감사헌금을 하라고 했더니 저보고 하라고 합니다. 왜 당신 생일날 나보고 감사헌금 하라고 하냐니까 우리 집사람 하는 말이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덕을 많이 본 사람이 당신이니까 당신이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말도 맞는 것 같기는 합니다. 누가 덕을 더 많이 봤는가는 나중에 따져봐야 하겠지만 제가 집사람 덕을 더 많이 본 것 같기는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일날 이렇게 기뻐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하여 가장 덕을 많이 본 사람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덕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 탄생 때문에 오히려 망한 줄도 모르고 휴일이라고 즐겁게 놉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서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께 성탄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입니다. 사람 무엇을 보면서 사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서 그의 인생관이나 목표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볼 때 그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입니다. 마태나 마가나 누가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같은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 관점이 좀 다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셨는가 하는 것보다는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보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낳아주신 요셉과 마리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누울 자리가 없으셔서 마구간 구유에서 나신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선물을 가지고 와서 경배를 드린 동방박사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도 그와 같이 선물을 드리면서 경배를 드리는 일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은 그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본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할 때 그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 11절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간단하게 생각하면 말씀으로 불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씀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이 되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을 지니게 되셨다, 멀리 떨어져 계시던 하나님이 우리 곁으로 오셨다, 인간의 생활 영역 밖에 계시던 하나님이 인간의 생활 영역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이 부셔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신 분이시고 너무나 거룩하셔서 그분을 만나는 순간 인간은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그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만나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왜 말씀으로 표현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하면 될 것인데 왜 하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을까요?

 

 

  많은 뜻이 있겠지만 우선은 말씀이라는 그 단어 속에 들어 있는 특별한 의미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잡신들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질서를 만드신 그 특별한 하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입니다.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이라는 단어 속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의 헬라 사람들에게 로고스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어였습니다.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순서대로 진행되고, 아침이 되면 저녁이 되고,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거두는 이런 우주의 조화들을 보면서 이런 질서 있는 움직임들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한 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우주 만물이 질서가 있게 움직이게 하는 원리를 가리켜 로고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로지(logy)라고 하면 sociologybiologytheology와 같이 사회학, 생태학 신학 등의 원리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로고스를 지혜요,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지혜 이 우주 만물을 움직일만한 능력 이런 것을 표현하는 말로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할 때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이 우주 만물의 질서를 만드신 분이시며, 이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여서 탄생을 축하하는 예수님은 그냥 한 아기가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그런 정도의 특별한 분이 아닙니다. 트리 몇 개 만들어 세우고 카드로 축하문을 적어서 보내고 선물이나 주고받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의 질서를 만드시고 우주 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볼 수도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고 감히 가까이 근접할 수 없었던 엄청나신 분이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9-12)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릅니다. 왜 오셨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을 이렇게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코로나 19로 인하여 이렇게 흩어져서 감사예배를 드리지만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본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1절의 말씀과 같이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제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천상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이 세상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거하시매라는 말은 스케노오(σκηνόω)라는 단어인데 장막을 치다”, “천막을 치다”, “거주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주하셨는데 장막을 치고 천막을 치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 단에는 성경에 흔하게 나오는 단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을 때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지고 특별하게 사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강해설교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장막을 치다회막을 치다로 번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회막을 치고 거기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 회막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을 때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을 회막으로 치고 거기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회막 즉 성전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그 의미를 6가지로 말했습니다.

1) 회막은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 중에 회막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2) 회막은 모세의 율법이 간직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은 회막의 지성소 안에 간직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3) 회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징적으로 회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회막은 계시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시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서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5) 회막은 제사 드리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제사 드리는 데 쓰이는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제사드림으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6) 회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처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임재하신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거하신다는 것은 이렇게 큰 의미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문 말씀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1절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라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셨지만 우리 인간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1)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받을 것이 아니라 형벌을 받을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공로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상을 줄 때나 대가를 줄 때에는 반드시 그와 걸맞은 공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런 공로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엄청난 상급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배운 로마서 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가 죄를 깨닫거나 회개하거나 새사람이 되려고 다짐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줄을 잘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얼른 알고 거기에 줄을 서야 합니다. 다른데 줄을 서 있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바르게 살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은혜는 참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만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 안에는 진리가 충만하게 들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라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래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 안에 있는 핵심의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진리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진리 우리 인간이 반드시 꼭 알아야 할 진리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이 복음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로 인해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영원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큰 은혜를 주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껏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탄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날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우리 가운데로 오신 날입니다. 그 하나님이신 말씀이 우리 눈에 보이도록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 은혜를 받고 그 진리를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우리가 얻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오신 날 마음껏 기뻐하고 감사하며 예수님이 오심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