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13.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전 36)
본문 : 딤전 5:9-12
제목 :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9.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10.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11.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12.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코로나 19로 인해서 각 가정에서 방송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런 사태를 맞이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소홀히 했던 것 우리가 잘못했던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빨리 이 사태가 지나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7장에는 이런 전염병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낙성식을 거대하게 치르고 마쳤을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3-14) 라고 하셨습니다.
성전건축 장면을 한번 읽어 보시면 참 화려하게 잘 지었습니다. 가장 좋은 백향목으로 성전을 짓고 성전 내의 기구들은 거의 금으로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잘 지었습니다. 그 정도로 성전을 화려하게 잘 짓고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 모습을 보셨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잘 살게 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실만한데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서 유행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으시고 메뚜기 재앙을 내리시고 전염병을 보내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에 벌로 그런 재앙들을 내리신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고 악한 길로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교만하여졌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죄가 있는가를 살펴보고 악한 길에서 떠나고 스스로 낮추어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상황이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하신 말씀이 아닌가 하여 마음이 고통스럽습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지 백 년이 지나면서 교회들이 엄청나게 부흥하였습니다.
많은 교회가 생겨나고 큰 교회당을 짓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도 복을 많이 받아서 부자도 되고 잘살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성도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도 생겨나고 좋은 일 좀 하고 자신이 위대한 일을 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전염병을 보내신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모든 성도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고 스스로 낮추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 같이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계속해서 참 과부에 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과부의 명부에 올릴 자의 자격과 행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과부의 명부에 올릴 자는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 과부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을 올린 우리 성도들도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본문 9절에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과부는 앞 절에서 말씀한 참 과부를 말합니다. 일반적인 과부들처럼 혼자 사는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격을 갖추고 특별히 교회에 과부로 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과부에 대한 특별한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가 구제 대상으로 특별한 과부들을 등록하게 하고 구제를 하거나 그들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이가 들고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과부들을 등록하게 하고 교회는 그들에게 생활을 보장하고 그들은 교회에서 특별히 남성 사역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전쟁이나 질병 때문에 남편이 죽고 혼자 사는 여자가 많았기 때문에 그 과부로 사는 여인 중에서 특별한 사람만 과부로 등록하도록 하였습니다.
첫째 자격 조건이 60세가 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60세 이상이라고 하면 우선 나이가 들어서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세상의 쾌락이나 세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지 못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회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자격 조건이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라고 했습니다.
결혼을 한 번만 했던 사람이라는 뜻보다는 재혼을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혼해서 함께 사는 동안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뒤에서 어쩔 수 없이 혼자된 젊은 여인에게 결혼할 것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남편이 세상을 먼저 떠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함께 결혼생활을 할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이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고 살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결혼에 관한 문제는 세월에 따라서 자주 변하기도 했습니다. 근친 간의 결혼을 허락할 때도 있었고 금한 때도 있었습니다. 일부일처제도 때로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것처럼 성경에 많은 사람이 처첩들을 거느리고 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에 대한 아주 분명하고 뚜렷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한평생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돕는 배필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와 결혼을 한다거나 여자가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칙에 확실하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야 무슨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이상한 일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모든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 보완관계로 살고 또 자녀를 낳아서 기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지금도 신부나 수녀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그깟 결혼쯤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부작용이나 고통을 생각하면 결혼을 해서 부부가 서로 힘을 합하여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 과부를 60세 이상으로 그리고 한 남편의 아내 된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결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을 지키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있는 사람은 다시 결혼해서 잘 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남편의 아내로서 살라는 것입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본문 10절에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앞 절에서는 명부에 올릴 과부의 외적인 자격에 대해서 말씀했다면 본문에서는 그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행실이 있어야 하고 그 선한 행실이 삶 속에 나타나 다른 사람들이 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단 명부에 올릴 과부만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 특별히 교회에서 주님의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선한 일을 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착한 마음이고 그 착한 마음이 삶 속에서 선한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
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가장 큰 논쟁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행함으로 구원을 받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이 어느 정도의 행함을 필요로 하는지가 논쟁거리였습니다.
중세시대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믿음보다는 행함에 더 큰 중심을 두었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다가 보니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이나 루터가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성경의 가장 큰 핵심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타락한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사람들이 믿기만 하고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거듭남을 주장하고 경건이나 성결의 삶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교회의 성도들이 고통받는 세상의 연약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잘살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을 강조하다가 보니까 이런저런 많은 종파가 생겨났고 그들 중에는 이단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 못지않게 행함을 강조하고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추세를 보면서 지금은 종교개혁시대 때처럼 다시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호를 외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바른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없는 행함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구원과 관계없이 누구나가 다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모든 사람이 보아서 알 수 있도록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과부의 명부에 올라야 할 사람은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우리 성도들도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도록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과부 명단에 올라서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역시 교회 내의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일에 쓰임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녀들의 자격을 자녀를 양육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씀은 모든 어머니는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잘 부양하고 훌륭하게 키우고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여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자녀를 잘 돌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숙박 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아서 나그네들이 여행하는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각 가정에서 집을 내어주고 나그네를 대접해야 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 세계로 다니는 전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잘 돌보아주고 대접하는 것이 성도들이 가진 임무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 나그넷길과 같은 인생길입니다. 서로 대접하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그냥 사는 것이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이 보람된 삶이요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입니다.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신발이 샌들 같은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갈 때는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힘든 일 천한 일을 하는 것이 교회에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제자들을 발을 손수 씻어주시면서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 봉사하는 것도 이런 자세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듯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시하지 말고 상대방을 존경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 기분을 생각하면서 좋은 말 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면 됩니다.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환난 당하는 사람이란 병든 사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믿음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도들이 그런 구제를 맡기기 위해서 집사들을 뽑아서 세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대로 살지만, 사고로 인해서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실직을 해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선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손해 보는 일 같지만 해보면 참 행복한 일입니다. 악하게 해서 이익을 보는 것보다 선하게 해서 좀 손해를 보는 것이 더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악한 마음을 갈아엎어서 선한 마음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워낙 타락한 인생이라 노력을 많이 해도 정말 착하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선한 마음 가지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본문 11-12절 말씀에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과부로 교회의 명단에 오른 사람은 끝까지 교회의 일을 위해서 봉사하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일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안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못할 사람은 명단에 올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젊어서는 부부생활을 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혼자 살면서 죄를 짓는 것보다는 결혼해서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 하기가 쉽습니다. 억지로 혼자 살면서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다가 그만두고 결혼을 하면 주님을 배반하는 것처럼 되니까 아예 젊은 사람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면서 함께 신앙생활 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중간에 그만둘 바에는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교회에 와서 헌신한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배반자가 되어서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몰라서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을 배운 사람이 교회를 떠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하나님께 정죄를 받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의 명부에 올릴 과부의 자격과 행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고 서로 사랑하고 자녀를 낳아서 잘 양육하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가 모든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등록된 우리 성도들은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기억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가진 성도답게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