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후 02)
본문 : 벧후 1:3
제목 : 앎으로 받는 생명과 경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옛날에는 먼 옛날이 아니라 불과 2-30년 전만 해도 공부를 하고 싶어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또 학교에 낼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갈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특권으로 알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요즘은 나이어린 아이들은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또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고 고등학교 대학교도 장학금제도나 학자금을 빌려주는 제도가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가 다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지를 않습니다.
그냥 학교에 가서 출석이나 체크하고 졸업장이나 받는 학생들이 많아졌습니다.
학교에 가는 이유는 실력을 쌓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지식들이나 더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서 학교에 다닙니다.
졸업장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졸업장이 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력이 말을 하는 것이지 졸업장이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면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아동센터에도 보면 어떤 아이는 그냥 출석만 하면 실력이 올라가는 줄로 알고 열심히 출석만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센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왜 센터를 다니는지 생각도 안하고 그저 엄마가 가라고 하니까 왔다가 얼굴만 내밀고 놀다가 가는 아이도 있습니다.
같은 센터를 다녀도 어떤 아이는 최선을 다해서 모든 혜택들을 봅니다.
책을 사 주면 그 책 문제들을 다 풀고 강의 시간에는 선생님 강의를 잘 듣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애를 씁니다.
피아노면 피아노 바이올린이면 바이올린 모든 것을 다 배우려고 합니다.
사람은 뭔가를 더 알고 배우려고 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고 열심히 노력을 할 때 더 차원 높은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만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만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고 남에게 피해만 주고 사는 사람은 자신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니시는 성도님들을 봐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교회에 와서 눈도장만 찍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작은 일에라도 충성을 하는 것은 그만두더라도 최소한의 것도 안합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입도 꼼짝 안하고 설교 시간에 그냥 졸다가 하나님께 기도 한마디도 안하고 그냥 구경만 하다가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론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런 것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데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또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을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다 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 누릴 수 있느냐고 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앎으로 받아서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졸업장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알기 위해서 학교에 다니는 것입니다.
그 공부한 지식이 그 알게 된 것이 우리가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살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믿으면 됐지 뭐 만날 이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하느냐 라고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예배를 통해서 설교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앎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받아서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알고 그래서 더 많이 누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정말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셨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물건 같으면 우리의 눈에 받은 것이 보일 것인데 영원한 생명이고 경건생활에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받아야 되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것을 받는 방법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앎으로” 받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알아나가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성경공부를 통해서 설교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가 받은 그 영원한 생명과 경건에 대해서 알아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깨달아야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것을 알아 가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보면 내가 이미 받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으로 안다는 말과는 좀 다릅니다.
앞서 2절 말씀에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라고 하셨는데 여기 안다는 말도 단순히 우리 주 예수님을 지식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그분과 교제하고 주님의 존재하심으로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일서를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들은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귐 충만한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그분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면 정말로 참된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고 기쁘고 즐겁게 살게 됩니다.
한평생 그냥 구경꾼으로 교회 밖에서 서성거리면서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이렇게 보배로운 믿음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풀어보지도 않고 그냥 우울한 삶을 사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얼른 하나님의 선물꾸러미를 풀어헤쳐보세요 그리고 마음껏 사용을 하세요. 그 은혜의 선물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의 선물을 오늘 다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을 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음을 알라고 했습니다.
멍청하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나를 거기서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밝은 빛으로 나를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더러운 곳 지저분한 곳 죄악이 넘치는 곳에서 이렇게 거룩한 곳으로 우리를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냉정하고 차가운 세상에서 이렇게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저주받을 인생에서 축복받는 인생으로, 심판의 대상에서 상을 받을 사람으로, 영원한 멸망에서 영생의 삶으로,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엄청난 신분의 변화를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렇게 어영부영 살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정말로 체험하게 되면 세상언저리에서 세상 사람들 사는 것 부러워하면서 그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뭐가 거기 좋은 것이 있다고 아직도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왜 그렇게 미련하게 이 좋은 하나님의 전에 와서 딴 생각하고 있냐고요?
의인이면 의인답게, 거룩한 백성이면 거룩한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좀 멋들어지게 살아볼 생각은 없습니까?
하나님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삶속에 그 분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날 불러 내에 이렇게 거룩한 곳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냥 지나가다가 한번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선택받은 사람만 불러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이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영광과 덕이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화려하고 좋은 것 가장 선하고 바른 것 좋은 의견 좋은 견해 미덕 명성 칭찬……. 이런 세상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덕이란 성부하나님의 영광과 덕이라기보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덕으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배울 때 예수님의 지위를 비하와 승귀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신 처지와 높아지신 신분으로 나눕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성육신, 고난당하심, 십자가에 죽으심, 장사되심 이 네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장사되심을 예수님의 비하 예수님의 낮아지신 처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승귀 즉 높아지심은 부활, 승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재림 이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 높아지신 신분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 그 앞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양을 치는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이 부르심을 받고 그 일에 사용되고 그 일을 보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고난을 당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고 그의 행하심과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장사되실 때 그 현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들은 그런 낮아지신 신분일 때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온 세상의 주인으로 왕으로 다스리심으로 또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시는 그 영광으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도 축하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을 하기도 하고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승천의 영광으로 만왕의 왕이 되신 그 영광으로 만물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그 능력과 영광으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누울 곳이 없어서 구유에서 태어나신 그 예수님이 그 모습으로 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좋은 이야기나 들려주시고 사람들의 병이나 고쳐주시던 그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병정들에게 이끌리어 힘없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던 그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그 능력과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 능력과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천군천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면서 화려한 영광으로 재림하시는 그 주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덕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시는 것은 가장 도덕적이고 공정하고 바르게 우리를 선발하여 부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아주 공정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불의가 없이 바르게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아이고 하나님도 좀 실수하셨지 어째 저런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백성으로 불러주셨을까 그래도 나 정도는 돼야지 어째 저런 사람까지 불러주셨을까 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뭘 몰라서 그런 말을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 보면 뭔가 다른 것이 있어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서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좀 더 배워서 아시기 바랍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2.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신기한 능력으로라는 말은 신적인 능력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때 어떤 때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헌신이나 충성을 요구하셔서 그 대가로 복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우해서 우리가 선을 행하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고행을 해서 득도를 하거나 그런 것을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앞서 배우신대로 배워서 알아 가면 실천해서 체험하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신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생명은 우리 육신의 생명을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영원한 생명 영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방적으로 우리를 불러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우리가 뭘 더 바라겠습니까?
보지 못했으니까 믿지 못해서 세상의 다른 것들을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경건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좋은”이라는 말과 “예배드리다.” 라는 말이 합해서 된 말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술 담배 안하고 죄 안 짓고 거룩하게 사는 것도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예배 더 좋은 예배 더 진실 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살아갈 때 거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여기 교회에 와서 이 예배 시간에 예배를 잘 드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예배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세상에 나가서 돈을 벌고 일을 한다면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그런 교회를 운영하는 헌금을 바치기 위해서 일을 한다면 그것이 예배입니다.
기도해서 복 받으면 여행 다니고 놀러 다니고 재미 보러 다니고 떵떵거리며 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위해서 살아갈 때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 나를 불러주신 그 부르심을 바르게 알고 체험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경건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본문 : 벧후 1:3
제목 : 앎으로 받는 생명과 경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옛날에는 먼 옛날이 아니라 불과 2-30년 전만 해도 공부를 하고 싶어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또 학교에 낼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갈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특권으로 알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요즘은 나이어린 아이들은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또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고 고등학교 대학교도 장학금제도나 학자금을 빌려주는 제도가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가 다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지를 않습니다.
그냥 학교에 가서 출석이나 체크하고 졸업장이나 받는 학생들이 많아졌습니다.
학교에 가는 이유는 실력을 쌓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지식들이나 더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서 학교에 다닙니다.
졸업장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졸업장이 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력이 말을 하는 것이지 졸업장이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면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아동센터에도 보면 어떤 아이는 그냥 출석만 하면 실력이 올라가는 줄로 알고 열심히 출석만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센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왜 센터를 다니는지 생각도 안하고 그저 엄마가 가라고 하니까 왔다가 얼굴만 내밀고 놀다가 가는 아이도 있습니다.
같은 센터를 다녀도 어떤 아이는 최선을 다해서 모든 혜택들을 봅니다.
책을 사 주면 그 책 문제들을 다 풀고 강의 시간에는 선생님 강의를 잘 듣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애를 씁니다.
피아노면 피아노 바이올린이면 바이올린 모든 것을 다 배우려고 합니다.
사람은 뭔가를 더 알고 배우려고 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고 열심히 노력을 할 때 더 차원 높은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만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만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고 남에게 피해만 주고 사는 사람은 자신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니시는 성도님들을 봐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교회에 와서 눈도장만 찍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작은 일에라도 충성을 하는 것은 그만두더라도 최소한의 것도 안합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입도 꼼짝 안하고 설교 시간에 그냥 졸다가 하나님께 기도 한마디도 안하고 그냥 구경만 하다가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론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런 것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데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또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을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다 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 누릴 수 있느냐고 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앎으로 받아서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졸업장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알기 위해서 학교에 다니는 것입니다.
그 공부한 지식이 그 알게 된 것이 우리가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살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믿으면 됐지 뭐 만날 이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하느냐 라고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예배를 통해서 설교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앎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받아서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알고 그래서 더 많이 누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정말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셨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물건 같으면 우리의 눈에 받은 것이 보일 것인데 영원한 생명이고 경건생활에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받아야 되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것을 받는 방법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앎으로” 받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알아나가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성경공부를 통해서 설교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가 받은 그 영원한 생명과 경건에 대해서 알아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깨달아야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것을 알아 가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보면 내가 이미 받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으로 안다는 말과는 좀 다릅니다.
앞서 2절 말씀에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라고 하셨는데 여기 안다는 말도 단순히 우리 주 예수님을 지식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그분과 교제하고 주님의 존재하심으로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일서를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들은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귐 충만한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그분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면 정말로 참된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고 기쁘고 즐겁게 살게 됩니다.
한평생 그냥 구경꾼으로 교회 밖에서 서성거리면서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이렇게 보배로운 믿음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풀어보지도 않고 그냥 우울한 삶을 사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얼른 하나님의 선물꾸러미를 풀어헤쳐보세요 그리고 마음껏 사용을 하세요. 그 은혜의 선물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의 선물을 오늘 다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을 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음을 알라고 했습니다.
멍청하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나를 거기서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밝은 빛으로 나를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더러운 곳 지저분한 곳 죄악이 넘치는 곳에서 이렇게 거룩한 곳으로 우리를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냉정하고 차가운 세상에서 이렇게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저주받을 인생에서 축복받는 인생으로, 심판의 대상에서 상을 받을 사람으로, 영원한 멸망에서 영생의 삶으로,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엄청난 신분의 변화를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렇게 어영부영 살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정말로 체험하게 되면 세상언저리에서 세상 사람들 사는 것 부러워하면서 그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뭐가 거기 좋은 것이 있다고 아직도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왜 그렇게 미련하게 이 좋은 하나님의 전에 와서 딴 생각하고 있냐고요?
의인이면 의인답게, 거룩한 백성이면 거룩한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좀 멋들어지게 살아볼 생각은 없습니까?
하나님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삶속에 그 분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날 불러 내에 이렇게 거룩한 곳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냥 지나가다가 한번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선택받은 사람만 불러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이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영광과 덕이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화려하고 좋은 것 가장 선하고 바른 것 좋은 의견 좋은 견해 미덕 명성 칭찬……. 이런 세상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덕이란 성부하나님의 영광과 덕이라기보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덕으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배울 때 예수님의 지위를 비하와 승귀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신 처지와 높아지신 신분으로 나눕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성육신, 고난당하심, 십자가에 죽으심, 장사되심 이 네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장사되심을 예수님의 비하 예수님의 낮아지신 처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승귀 즉 높아지심은 부활, 승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재림 이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 높아지신 신분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 그 앞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양을 치는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이 부르심을 받고 그 일에 사용되고 그 일을 보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고난을 당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고 그의 행하심과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장사되실 때 그 현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들은 그런 낮아지신 신분일 때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온 세상의 주인으로 왕으로 다스리심으로 또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시는 그 영광으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도 축하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을 하기도 하고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승천의 영광으로 만왕의 왕이 되신 그 영광으로 만물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그 능력과 영광으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누울 곳이 없어서 구유에서 태어나신 그 예수님이 그 모습으로 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좋은 이야기나 들려주시고 사람들의 병이나 고쳐주시던 그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병정들에게 이끌리어 힘없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던 그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그 능력과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 능력과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천군천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면서 화려한 영광으로 재림하시는 그 주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덕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시는 것은 가장 도덕적이고 공정하고 바르게 우리를 선발하여 부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아주 공정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불의가 없이 바르게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아이고 하나님도 좀 실수하셨지 어째 저런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백성으로 불러주셨을까 그래도 나 정도는 돼야지 어째 저런 사람까지 불러주셨을까 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뭘 몰라서 그런 말을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 보면 뭔가 다른 것이 있어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서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좀 더 배워서 아시기 바랍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2.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신기한 능력으로라는 말은 신적인 능력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때 어떤 때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헌신이나 충성을 요구하셔서 그 대가로 복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우해서 우리가 선을 행하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고행을 해서 득도를 하거나 그런 것을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앞서 배우신대로 배워서 알아 가면 실천해서 체험하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신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생명은 우리 육신의 생명을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영원한 생명 영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방적으로 우리를 불러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우리가 뭘 더 바라겠습니까?
보지 못했으니까 믿지 못해서 세상의 다른 것들을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경건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좋은”이라는 말과 “예배드리다.” 라는 말이 합해서 된 말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술 담배 안하고 죄 안 짓고 거룩하게 사는 것도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예배 더 좋은 예배 더 진실 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살아갈 때 거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여기 교회에 와서 이 예배 시간에 예배를 잘 드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예배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세상에 나가서 돈을 벌고 일을 한다면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그런 교회를 운영하는 헌금을 바치기 위해서 일을 한다면 그것이 예배입니다.
기도해서 복 받으면 여행 다니고 놀러 다니고 재미 보러 다니고 떵떵거리며 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위해서 살아갈 때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 나를 불러주신 그 부르심을 바르게 알고 체험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경건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