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46)
본문 : 벧전 5:1-4
제목 :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해마다 첫 주일이 되면 교회의 성도들에게 금년에는 이렇게 사십시오.
아니면 금년에는 이런 복을 받으십시오. 라는 설교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년에 우리교회에 특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 보다는 장로 된 자 즉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교회를 이렇게 운영하고 교회의 양 무리들을 이렇게 지도해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장로는 구약시대 때부터 시작된 호칭입니다.
처음에는 주로 나이가 많은 연장자를 부르는 호칭이었으나 점차적으로 직분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장로 제도를 사용하였으며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여행을 하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 때의 장로는 오늘날의 장로와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주로 오늘날의 목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장로라고 했습니다.
목사 감독 장로가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장로를 두 가지로 나눕니다.
가르치는 장로가 있고 다스리는 장로가 있습니다.
목사는 가르치기와 다스리기를 같이 하는 장로이고 장로는 다스리기만을 하는 장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장로하고 할 때 주로 목사를 말하는 것이지만 넓게 목사와 장로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목사인 저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이 말씀을 따라 우리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성도들을 대할 것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오늘 본문 말씀 1절과 2절 말씀 중에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에게 권하노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교회의 성도들을 양 무리, 특별히 “하나님의 양 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은 양이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목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소개를 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도 양이고 성도들을 돌보는 목사를 목자 장이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양을 치는 목자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양 무리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실 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너희 중에 있지만 소속은 하나님의 양 무리라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성도들을 대할 때 성도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르게 알고 대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양이라고 하니까 어떤 목사들은 자기가 소유한 자기의 양처럼 성도들을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 때 마치 양처럼 연약하고 분별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목사의 소유이거나 또 실제로 양이 아닙니다.
성도는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목사가 털을 깎거나 젖을 짜거나 잡아먹거나 하는 그런 의미에서 양이 아니라 연약한 성도들 잘 보호해 주고 좋은 길로 잘 인도해주어야 하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성도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의 목회방법이 달라집니다.
잘못된 교회에서는 성도들을 일꾼이나 교회의 재산을 불리기 위한 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일을 많이 하게하고 또 어떻게 하든지 양의 숫자를 늘려서 교회의 세력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잘 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이고 그렇게 잘하는 목사는 훌륭한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연약한 면에서는 양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특별히 따로 불러서 구별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까지 무사히 오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훈련이 잘 안된다고 일을 많이 하지 못한다고 쫓아내거나 상처를 주어서 고통을 주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하든지 상관이 없이 우리 교회에 들어오신 모든 분들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나 장로가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볼 때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든지 억지로 하는 것 하고 자원해서 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면 여러 가지 핑계거리가 생기고 사고도 잘 나고 능력도 떨어집니다.
일을 하다가 보면 때로는 힘이 들기도 하고 짜증이 나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함을 생각하면 억지로 할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원함으로 하되 “하나님의 뜻을 따라” 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자원해서 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일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다고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광성교회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신앙생활 잘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대할 때 소중한 존재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시면 그런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2.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오늘 본문 2절 말씀 중에 양 무리를 침에 있어서 “더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교회의 목사(장로)직에 일정한 보수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17-18절에 보면 잘 다스리고 잘 가르치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고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아야 하고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목사들도 먹고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직업이 되고 또 돈을 모으기 위해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이란 참으로 큰 위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하나님 보다 더 믿고 따르기 쉬운 것입니다.
돈은 참으로 매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제일 쉬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돈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돈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부모 자식 간에도 이 돈 때문에 의가 상하기도 하고 화목을 유지하기도 하는 중요한 것이 돈입니다.
세상의 삶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거룩한 일을 하는 목사는 이 돈 때문에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만족해야 하고 돈을 모으거나 사치하기 위해서 목회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의 모습은 돈과 너무 밀착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돈을 벌 목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투자를 하듯 돈을 빌려서 큰 교회를 세우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고객을 호객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불러 모으고 물건을 파는 것처럼 헌금으로 신앙을 평가하고 회사의 사장처럼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많은 돈을 사례로 받는 목사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마케팅을 잘 하는 목사는 치부하고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우리나라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비용이 필요해서 우리 서로가 헌금을 하지만 그것으로 교회가 부자가 되거나 교회를 이끌고 가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부자가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에 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부귀영화보다는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한걸음씩 더 나아가기 위해서 세상의 부를 더러운 이익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가난하게 살면서 고생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가난하게 어렵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이 세상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가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가는 여정에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더러운 이익에 탐을 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세상의 헛된 욕망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자세로 이 일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3.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본이 되라.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야 무리를 치는 원리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목사는 교회의 주인도 아니고 군주도 아니고 지배자도 아닙니다.
목사 마음대로 권리를 주장하고 성도들을 종처럼 일꾼처럼 부려먹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앞장서서 모범이 되어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면 자유를 잃게 되고 얽매여야 되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곳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나를 지배하거나 다스릴 수 없는 자유스러운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나라가 과거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속에서 살다가 자우민주주의적인 나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너무 자유 자유 하니까 법의 질서가 무너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을 하니까 이것이 진짜 자유인가 자유가 정말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다시 권위주의적인 통치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자유에도 질서가 있어야 하고 의무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런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유에 대한 차원 높은 지식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유란 “진리 안에서”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목사가 권위를 내세우고 군림하는 자세로 임했던 옛날 사고방식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 자유가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잘 못된 자유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941년 1월 6일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4가지 자유에 대한 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언론 및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종교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
이 네 가지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누려야 할 자유라고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진리 안에서 이런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권위주의적인 통치로 이런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됩니다.
진리 안에서이니까 이단사설을 말하는 경우는 안 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는 사실 예배의 자유(Freedom of Worship)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섬겨야 합니다.
다른 신을 섬길 자유는 사실 없습니다.
특별히 진리 안에서의 자유는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섬길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를 침해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있어서는 자유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해놓은 옛날 전통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길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자유를 억압받으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얻고 굶주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두려움에서의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나 죄책감에서의 두려움을 없애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다닙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교회 안에서 오히려 두려움을 조장합니다.
그렇게 살면 벌 받는다.
그렇게 살면 지옥 간다.
충성해야 복 받는다.
이런 가르침들을 통해서 오히려 성도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속아서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벌 받을까봐 지옥에 갈 까봐 걱정을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잘 못된 목사들 때문에 일어나는 잘 못된 현상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유인입니다.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고 속박할 수 없는 자유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광성교회가 성장이 느리다 일사천리로 움직이지 못한다. 충성도가 약하다. 이런 저런 말들을 합니다.
왜 10년이 되어도 사람들이 잘 변하지 않느냐 라고 비웃기도 합니다.
목사가 대가 약해서 강하게 가르치지 못해서 그렇다는 비난도 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목회 철학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목회관이 교회관이 다를 뿐이지 우리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강요해서 마지못해서 하는 헌신이나 충성은 참된 헌신이나 충성이 아닙니다.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참된 헌신이요 충성입니다.
자원해서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드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올 한해를 시작하는 저에게 교회의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제가 지금까지 해 왔던 목회 철학을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고 다짐을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목회 관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아셨을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리석은 양떼 같지만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잘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해서 여러분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러운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교회가 목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기꺼이 여러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군림하고 억압하는 자세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본문 : 벧전 5:1-4
제목 :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해마다 첫 주일이 되면 교회의 성도들에게 금년에는 이렇게 사십시오.
아니면 금년에는 이런 복을 받으십시오. 라는 설교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년에 우리교회에 특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 보다는 장로 된 자 즉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교회를 이렇게 운영하고 교회의 양 무리들을 이렇게 지도해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장로는 구약시대 때부터 시작된 호칭입니다.
처음에는 주로 나이가 많은 연장자를 부르는 호칭이었으나 점차적으로 직분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장로 제도를 사용하였으며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여행을 하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 때의 장로는 오늘날의 장로와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주로 오늘날의 목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장로라고 했습니다.
목사 감독 장로가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장로를 두 가지로 나눕니다.
가르치는 장로가 있고 다스리는 장로가 있습니다.
목사는 가르치기와 다스리기를 같이 하는 장로이고 장로는 다스리기만을 하는 장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장로하고 할 때 주로 목사를 말하는 것이지만 넓게 목사와 장로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목사인 저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이 말씀을 따라 우리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성도들을 대할 것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오늘 본문 말씀 1절과 2절 말씀 중에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에게 권하노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교회의 성도들을 양 무리, 특별히 “하나님의 양 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은 양이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목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소개를 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도 양이고 성도들을 돌보는 목사를 목자 장이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양을 치는 목자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양 무리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실 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너희 중에 있지만 소속은 하나님의 양 무리라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성도들을 대할 때 성도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르게 알고 대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양이라고 하니까 어떤 목사들은 자기가 소유한 자기의 양처럼 성도들을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 때 마치 양처럼 연약하고 분별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목사의 소유이거나 또 실제로 양이 아닙니다.
성도는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목사가 털을 깎거나 젖을 짜거나 잡아먹거나 하는 그런 의미에서 양이 아니라 연약한 성도들 잘 보호해 주고 좋은 길로 잘 인도해주어야 하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성도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의 목회방법이 달라집니다.
잘못된 교회에서는 성도들을 일꾼이나 교회의 재산을 불리기 위한 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일을 많이 하게하고 또 어떻게 하든지 양의 숫자를 늘려서 교회의 세력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잘 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이고 그렇게 잘하는 목사는 훌륭한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연약한 면에서는 양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특별히 따로 불러서 구별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까지 무사히 오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훈련이 잘 안된다고 일을 많이 하지 못한다고 쫓아내거나 상처를 주어서 고통을 주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하든지 상관이 없이 우리 교회에 들어오신 모든 분들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나 장로가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볼 때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든지 억지로 하는 것 하고 자원해서 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면 여러 가지 핑계거리가 생기고 사고도 잘 나고 능력도 떨어집니다.
일을 하다가 보면 때로는 힘이 들기도 하고 짜증이 나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함을 생각하면 억지로 할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원함으로 하되 “하나님의 뜻을 따라” 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자원해서 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일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다고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광성교회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신앙생활 잘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대할 때 소중한 존재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시면 그런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2.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오늘 본문 2절 말씀 중에 양 무리를 침에 있어서 “더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교회의 목사(장로)직에 일정한 보수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17-18절에 보면 잘 다스리고 잘 가르치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고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아야 하고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목사들도 먹고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직업이 되고 또 돈을 모으기 위해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이란 참으로 큰 위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하나님 보다 더 믿고 따르기 쉬운 것입니다.
돈은 참으로 매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제일 쉬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돈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돈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부모 자식 간에도 이 돈 때문에 의가 상하기도 하고 화목을 유지하기도 하는 중요한 것이 돈입니다.
세상의 삶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거룩한 일을 하는 목사는 이 돈 때문에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만족해야 하고 돈을 모으거나 사치하기 위해서 목회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의 모습은 돈과 너무 밀착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돈을 벌 목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투자를 하듯 돈을 빌려서 큰 교회를 세우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고객을 호객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불러 모으고 물건을 파는 것처럼 헌금으로 신앙을 평가하고 회사의 사장처럼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많은 돈을 사례로 받는 목사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마케팅을 잘 하는 목사는 치부하고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우리나라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비용이 필요해서 우리 서로가 헌금을 하지만 그것으로 교회가 부자가 되거나 교회를 이끌고 가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부자가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에 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부귀영화보다는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한걸음씩 더 나아가기 위해서 세상의 부를 더러운 이익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가난하게 살면서 고생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가난하게 어렵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이 세상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가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가는 여정에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더러운 이익에 탐을 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세상의 헛된 욕망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자세로 이 일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3.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본이 되라.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야 무리를 치는 원리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목사는 교회의 주인도 아니고 군주도 아니고 지배자도 아닙니다.
목사 마음대로 권리를 주장하고 성도들을 종처럼 일꾼처럼 부려먹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앞장서서 모범이 되어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면 자유를 잃게 되고 얽매여야 되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곳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나를 지배하거나 다스릴 수 없는 자유스러운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나라가 과거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속에서 살다가 자우민주주의적인 나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너무 자유 자유 하니까 법의 질서가 무너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을 하니까 이것이 진짜 자유인가 자유가 정말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다시 권위주의적인 통치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자유에도 질서가 있어야 하고 의무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런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유에 대한 차원 높은 지식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유란 “진리 안에서”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목사가 권위를 내세우고 군림하는 자세로 임했던 옛날 사고방식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 자유가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잘 못된 자유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941년 1월 6일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4가지 자유에 대한 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언론 및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종교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
이 네 가지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누려야 할 자유라고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진리 안에서 이런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권위주의적인 통치로 이런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됩니다.
진리 안에서이니까 이단사설을 말하는 경우는 안 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는 사실 예배의 자유(Freedom of Worship)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섬겨야 합니다.
다른 신을 섬길 자유는 사실 없습니다.
특별히 진리 안에서의 자유는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섬길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를 침해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있어서는 자유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해놓은 옛날 전통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길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자유를 억압받으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얻고 굶주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두려움에서의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나 죄책감에서의 두려움을 없애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다닙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교회 안에서 오히려 두려움을 조장합니다.
그렇게 살면 벌 받는다.
그렇게 살면 지옥 간다.
충성해야 복 받는다.
이런 가르침들을 통해서 오히려 성도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속아서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벌 받을까봐 지옥에 갈 까봐 걱정을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잘 못된 목사들 때문에 일어나는 잘 못된 현상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유인입니다.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고 속박할 수 없는 자유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광성교회가 성장이 느리다 일사천리로 움직이지 못한다. 충성도가 약하다. 이런 저런 말들을 합니다.
왜 10년이 되어도 사람들이 잘 변하지 않느냐 라고 비웃기도 합니다.
목사가 대가 약해서 강하게 가르치지 못해서 그렇다는 비난도 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목회 철학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목회관이 교회관이 다를 뿐이지 우리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강요해서 마지못해서 하는 헌신이나 충성은 참된 헌신이나 충성이 아닙니다.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참된 헌신이요 충성입니다.
자원해서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드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올 한해를 시작하는 저에게 교회의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제가 지금까지 해 왔던 목회 철학을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고 다짐을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목회 관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아셨을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리석은 양떼 같지만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잘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해서 여러분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러운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교회가 목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기꺼이 여러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군림하고 억압하는 자세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