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1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49)
본문 : 요일 4:9
제목 : 나타난바 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오래전에 나온 책이지만 김경일 박사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린나라 사람들은 오랜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살고 있는데 유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사실은 진리가 아닌데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듣고 배워서 마치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지금에 와서 자세히 보면 인간을 오히려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가르친 기본적인 윤리를 삼강오륜이라고 합니다.
삼강은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삼강이라 하여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고 오륜은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합니다.
자세하게 설명을 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하는 무조건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고 자녀들은 효도를 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섬겨야 하고 어린 사람은 어른을 섬겨야 하는 것을 기본 도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 어떠냐? 당연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되시는 분들은 아직 유교 사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독재를 하고 아버지는 아주 엄한 자세로 자녀들을 마음대로 하고 남편은 아내를 종처럼 여기고 무조건 나이만 먹으면 자기보다 어린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짓누르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려는 자세보다는 힘으로 복종시키려는 자세로 산다는 것입니다.
유교가 주는 또 하나의 폐단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그 마음을 숨기는 것입니다.
사랑한다. 감사하다. 미안하다. 이런 꼭 표현해야 할 일들을 표현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닭살이 돋을 정도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라고 표현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창피한 줄로 압니다.
유교의 문화 때문에 그 좋은 말을 하지 못하고 살고 그 좋은 사랑을 나타내어 보여주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시대 때는 천주교의 잘못된 관습들을 버리기 위해서 과감하게 그들의 전통을 버리는 일에 주력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유교와 불교 샤머니즘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유교의 관습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그 사랑이 얼마나 변함이 없는 견고한 사랑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셨다면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믿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나타낸바 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우리가 보고 알도록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그 사랑을 보고 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보고 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나타내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낸바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심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교회에 다닙시다. 라고 전도를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줘라 보여주면 교회 다니겠다. 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눈에 보이는 거짓증거들을 가지고 와서 사람을 속입니다.
자격증이나 계약서나 신문에 난 기사나 그럴듯한 문서들을 위조해 가지고와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요즘은 사진까지도 합성을 해가지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속아 넘어가서 재산을 잃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섬기는 신도 눈에 보이는 신을 좋아합니다.
짐승이라도 눈에 보여주면 그것을 신이라고 섬깁니다.
소를 신으로 섬기고, 뱀을 신으로 섬기고, 심지어는 쥐까지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태양이나 달 같은 무생물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는 오래된 나무나 이상하게 생긴 돌까지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를 받아서 기적적으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며칠 동안 하나님께서 나타나 보이시지 않으니까 금방 가지고 있던 금반지 금 귀걸이 팔찌들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다가 절을 하면서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우리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서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눈의 한계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도 우리의 눈의 한계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은 것들도 볼 수 없습니다.
요즘은 현미경이나 망원경 같은 것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작은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을 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눈입니다.
내일의 일도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영의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어리석은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을 한번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물 위로 걸어가시기도 하셨고 풍랑도 꾸짖으셔서 잠잠하게 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셨고 당시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중병들을 즉시 낫게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현상에 매료되어서 어떻게 하면 병이나 고쳐볼까 배불리 먹어볼까 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몇몇 뜻있는 사람들은 아 이분이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어리석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저 특별한 사람이요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알 때 시몬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마16:16)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르다도 요한복음 11:27절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요20:3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일어난 현상들을 본 예수님을 지키는 자들과 백부장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27:5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말씀을 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게 뭐라도 대신해서 깎아 세워놓아야 믿으려고 합니다.
어떤 신비한 것이라도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우상을 섬기게 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바라게 하고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이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아야 믿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며 지혜를 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2.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요 그 사랑하심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내어 보여주셨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사랑표현을 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아이들이 사랑해, 사랑해 하는 것을 보면 아따 되게 촐싹거린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말로 하는 것이냐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은 표현이 되어져야 한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랑하다고 하면서 그 흔한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옛날 부모님들은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양반스럽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녀들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하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많은 아내들이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하고 쓸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이런 가족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외롭게 쓸쓸하게 살았던 것이 옛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랑한다고 말 하세요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표현을 하세요.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그 사랑을 보여 주세요
마음속으로만 한다고 그렇게 합리화시키지 마세요.
차라리 진실 되게 사랑하지 못했음으로 인정을 하십시오.
지금이라도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시거나 말로만 사랑하시거나 대강 적당히 사랑하시는 척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확실히 사랑을 하시고 그 사랑을 정확히 표현을 하시고 그 사랑하심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늘 말씀을 하십니다.
성경전체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다음 주에 배우게 될 10절 말씀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말로만 하신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실제로 나타내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어 보여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독생자라는 말은 “유일한”이라는 뜻과, “사랑하는”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해서 보내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 하나 나누어주면서 사랑한다고 생색을 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사람 이이다 후미히꼬라는 사람이 “사랑의 논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연정이라는 것과 사랑의 차이점을 말합니다.
연정이란 사랑의 감정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때그때 느낌이 오는 대로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연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런 연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그래서 때때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력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능력 있게 행동에 옮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랑을 능력 있게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행동이 강하게 나타날수록 그 사랑은 강한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은 감정만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듣기 좋은 말로만 사랑을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최고의 표현으로 즉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시는 유일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사랑하심을 나타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3.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나타내 보여주심
어떤 목사님이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설교도 뜨겁게 하고 그래서 교회도 부흥을 하고 사람들이 훌륭한 목사님이라고 존경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목사님의 안을 들여다보니까 엄청나게 호화롭게 살고 재산도 많이 축적을 해 놓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이 아 우리 목사님이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을 한 목적이 바로 돈을 벌기 위해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 호화롭게 살기 위해서 그랬구나. 라고 실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을 하는 목적이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의 행복보다 사랑하는 대상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신다면 우리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표현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목적이 정말로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적을 말씀을 하시기를 “…….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예수님을 보내주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려고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죽을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0절 말씀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31절에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죽은 우리를, 죽어가는 우리를,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유일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우리대신 죽게 하신 그 사랑이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가 위로를 받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키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목적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바르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 요일 4:9
제목 : 나타난바 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오래전에 나온 책이지만 김경일 박사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린나라 사람들은 오랜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살고 있는데 유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사실은 진리가 아닌데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듣고 배워서 마치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지금에 와서 자세히 보면 인간을 오히려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가르친 기본적인 윤리를 삼강오륜이라고 합니다.
삼강은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삼강이라 하여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고 오륜은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합니다.
자세하게 설명을 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하는 무조건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고 자녀들은 효도를 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섬겨야 하고 어린 사람은 어른을 섬겨야 하는 것을 기본 도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 어떠냐? 당연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되시는 분들은 아직 유교 사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독재를 하고 아버지는 아주 엄한 자세로 자녀들을 마음대로 하고 남편은 아내를 종처럼 여기고 무조건 나이만 먹으면 자기보다 어린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짓누르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려는 자세보다는 힘으로 복종시키려는 자세로 산다는 것입니다.
유교가 주는 또 하나의 폐단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그 마음을 숨기는 것입니다.
사랑한다. 감사하다. 미안하다. 이런 꼭 표현해야 할 일들을 표현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닭살이 돋을 정도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라고 표현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창피한 줄로 압니다.
유교의 문화 때문에 그 좋은 말을 하지 못하고 살고 그 좋은 사랑을 나타내어 보여주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시대 때는 천주교의 잘못된 관습들을 버리기 위해서 과감하게 그들의 전통을 버리는 일에 주력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유교와 불교 샤머니즘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유교의 관습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그 사랑이 얼마나 변함이 없는 견고한 사랑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셨다면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믿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나타낸바 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우리가 보고 알도록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그 사랑을 보고 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보고 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나타내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낸바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심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교회에 다닙시다. 라고 전도를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줘라 보여주면 교회 다니겠다. 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눈에 보이는 거짓증거들을 가지고 와서 사람을 속입니다.
자격증이나 계약서나 신문에 난 기사나 그럴듯한 문서들을 위조해 가지고와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요즘은 사진까지도 합성을 해가지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속아 넘어가서 재산을 잃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섬기는 신도 눈에 보이는 신을 좋아합니다.
짐승이라도 눈에 보여주면 그것을 신이라고 섬깁니다.
소를 신으로 섬기고, 뱀을 신으로 섬기고, 심지어는 쥐까지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태양이나 달 같은 무생물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는 오래된 나무나 이상하게 생긴 돌까지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를 받아서 기적적으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며칠 동안 하나님께서 나타나 보이시지 않으니까 금방 가지고 있던 금반지 금 귀걸이 팔찌들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다가 절을 하면서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우리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서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눈의 한계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도 우리의 눈의 한계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은 것들도 볼 수 없습니다.
요즘은 현미경이나 망원경 같은 것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작은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을 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눈입니다.
내일의 일도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영의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어리석은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을 한번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물 위로 걸어가시기도 하셨고 풍랑도 꾸짖으셔서 잠잠하게 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셨고 당시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중병들을 즉시 낫게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현상에 매료되어서 어떻게 하면 병이나 고쳐볼까 배불리 먹어볼까 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몇몇 뜻있는 사람들은 아 이분이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어리석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저 특별한 사람이요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알 때 시몬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마16:16)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르다도 요한복음 11:27절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요20:3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일어난 현상들을 본 예수님을 지키는 자들과 백부장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27:5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말씀을 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게 뭐라도 대신해서 깎아 세워놓아야 믿으려고 합니다.
어떤 신비한 것이라도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우상을 섬기게 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바라게 하고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이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아야 믿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며 지혜를 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2.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요 그 사랑하심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내어 보여주셨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사랑표현을 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아이들이 사랑해, 사랑해 하는 것을 보면 아따 되게 촐싹거린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말로 하는 것이냐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은 표현이 되어져야 한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랑하다고 하면서 그 흔한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옛날 부모님들은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양반스럽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녀들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하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많은 아내들이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하고 쓸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이런 가족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외롭게 쓸쓸하게 살았던 것이 옛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랑한다고 말 하세요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표현을 하세요.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그 사랑을 보여 주세요
마음속으로만 한다고 그렇게 합리화시키지 마세요.
차라리 진실 되게 사랑하지 못했음으로 인정을 하십시오.
지금이라도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시거나 말로만 사랑하시거나 대강 적당히 사랑하시는 척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확실히 사랑을 하시고 그 사랑을 정확히 표현을 하시고 그 사랑하심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늘 말씀을 하십니다.
성경전체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다음 주에 배우게 될 10절 말씀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말로만 하신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실제로 나타내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어 보여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독생자라는 말은 “유일한”이라는 뜻과, “사랑하는”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해서 보내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 하나 나누어주면서 사랑한다고 생색을 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사람 이이다 후미히꼬라는 사람이 “사랑의 논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연정이라는 것과 사랑의 차이점을 말합니다.
연정이란 사랑의 감정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때그때 느낌이 오는 대로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연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런 연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그래서 때때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력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능력 있게 행동에 옮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랑을 능력 있게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행동이 강하게 나타날수록 그 사랑은 강한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은 감정만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듣기 좋은 말로만 사랑을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최고의 표현으로 즉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시는 유일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사랑하심을 나타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3.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나타내 보여주심
어떤 목사님이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설교도 뜨겁게 하고 그래서 교회도 부흥을 하고 사람들이 훌륭한 목사님이라고 존경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목사님의 안을 들여다보니까 엄청나게 호화롭게 살고 재산도 많이 축적을 해 놓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이 아 우리 목사님이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을 한 목적이 바로 돈을 벌기 위해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 호화롭게 살기 위해서 그랬구나. 라고 실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을 하는 목적이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의 행복보다 사랑하는 대상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신다면 우리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표현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목적이 정말로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적을 말씀을 하시기를 “…….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예수님을 보내주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려고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죽을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0절 말씀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31절에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죽은 우리를, 죽어가는 우리를,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유일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우리대신 죽게 하신 그 사랑이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가 위로를 받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키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목적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바르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