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 1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43)
본문 : 요일 3:24
제목 :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명이라면 구약의 십계명을 위시해서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율법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명들은 사실은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들입니다.
계명들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 그 첫째 목적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시합을 시켜서 우리 서로가 잘난 척하라고 일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들을 나 자신에게 비추어 보아서 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오히려 율법을 잘 지켜보려고 노력을 하면서 은근이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자신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의 참된 의미도 모르고 교만하기만 하고 남의 잘못을 잘 지적합니다.
어떤 교회의 집사님 중에 정말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학교 교사인데 돈을 벌려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월급을 받으면 그 월급을 다 그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위해서 씁니다.
어려운 아이들의 학비를 대주기도 하고 밥을 못 먹는 아이들은 밥값을 내주기도 하고 정말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사인 제가 보기에도 저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참 착한 사람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그 착한 것이, 그 선한 일을 잘 하는 것이, 오히려 그를 아주 좋지 않은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선한 일을 많이 한다는 그 자부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처럼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을 비웃으며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조금도 남에게 굽힐 줄도 모르고 뭐든지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주장을 하고 남이 잘못하는 것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도 그와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까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자기의 의를 자랑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키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그 사람을 의롭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를 많이 지었던 세리가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고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할 때 그를 의롭다고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란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이 죄악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광성교회 성도님들은 꼭 이 바른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 다 몰라도 이것만 알면 됩니다.
믿음이 무엇이지만 바르게 알고 그 바른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영생으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 즉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자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주 안에 거하고 주님은 그의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그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그 안에 거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오늘 본문 말씀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라고 했습니다.
계명들을 지키는 자의 특권은 주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다가 보면 대강은 알 것 같은 데 정확하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단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거하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거하다"라는 말의 우리말 뜻은 "사람이 일정한 곳에 머물러 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들어가 살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내 속에 들어와서 사실까라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이 말은 우선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말입니다.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주 안에 거한다고 했으니까 다시 말하면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동의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가 집에 있는데 목사님 큰일났습니다. 교회에 불이 낫습니다.라고 하면 제가 그 말에 동의한다면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즉 그 말을 믿는다면 얼른 일어나 교회로 달려갈 것입니다.
또 제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큰일났습니다.
이 병은 얼른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영접하면 즉 그 말을 받아들이면 다시 말해서 그 말을 믿으면 예 수술해 주십시오라고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거한다는 말도 이와 같이 예수님의 품안에 안긴다는 말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하고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는 온통 이런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 이야기도 이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치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먹을 것도 시원찮고 물도 없는 이 광야로 왜 이끌어 냈느냐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 뱀을 보내서 많은 백성들이 물려 죽게 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한 가지 방법을 주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서 나무에 달고 뱀에 물려 죽게 된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면 깨끗하게 낫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절을 할 필요도 없고 거기에다 대고 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고 그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필요도 없고 그냥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약속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거하다"라고 번역된 이 말은 "머물다, 남아있다, 붙어 있다..."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약속 안에 예수님의 말씀 안에 끝까지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또 그의 명령대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자유가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 사는 것은 오히려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고 도박을 하고 남의 것을 탐내고 이런 삶이 자유입니까
아닙니다 자유라고 찾아간 그런 것들이 여러분을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술이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알콜 중독자로 만들고 그의 목숨까지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담배나 마약이나 도박이 정말로 우리에게서 참된 자유를 앗아 가 버리는 무서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참된 자유의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항 안에 금붕어 한 마리가 살고 있었고 그 아래에 고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금붕어는 자기가 어항 안에 갇혀서 산다는 것에 늘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고양이는 자기가 금붕어처럼 물 속에 들어가서 살지 못함을 기분 나쁘게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금붕어와 고양이가 서로 약속을 했습니다.
서로 바꾸어서 살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 두울 셋 하면 서로 자리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하나 두울 셋 하고 자리를 바꿨는데 그 결과는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즉 믿음을 가지는 것 또 사랑으로 사는 것 이것은 우리를 억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게 특권을 주시는 것이고 그 특권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오늘 본문 말씀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절 이하에 한 앉은뱅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전 미문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이 늘 구걸을 해서 먹고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그 사람이 구걸하러 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발과 발목이 힘을 얻게 되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안에 있던 것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안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그도 받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그에게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삶이란 가난한 거지에다가 걷지도 못하는 불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인생에 들어오시자 그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고 거지로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도 이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 속에 계시지 않으셨을 때 우리는 앉은뱅이 거지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는 서글픈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변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가 목적이 변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참된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산다고 해도 아무리 재미있는 삶을 산다고 해도 아무리 존경을 받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호화로운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은 헛된 것이며 허무한 것이며 아무 것도 아니며 영원히 멸망해 버리는 비참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우리가 비록 초라하고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비참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염려할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승리자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자이고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면서 살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도 참으로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기에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혹 주님을 떠날지라도 주님은 항상 우리 안에서 우리 인생을 살피시며 지키시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3.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는 것인가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알고 무엇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말씀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언뜻 들으면 그렇다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방언을 하고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도 그 증거를 받기 위해서 방언을 하든지 예언을 하든지 기도를 해서 능력을 받아서 기적을 일으키면 된다라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초대교회는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기적을 동원해서 믿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꼭 그렇게 역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기적적인 방법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나타난 현실을 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말도 그런 뜻입니다.
아무나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미든 사람은 그 속에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든지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 시집을 왔던지 장가를 갔던지 또 예수님을 믿는 친구가 있었든지 예수님을 믿는 학교를 다녔든지 병에 걸려서 혹은 너무나 외로워서 장가나 가 보려고.... 이런 저런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연들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 속에 오셨기 때문이고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시는 것은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나를 희생하면서 얻는 것도 없는 일에 남을 위해서 나선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기적인 것이 우리 인생인데
욕심이 배 밖으로 나온 채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그런 우리가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은 성령님께서 그 속에 계시는 사람이며 성령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주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사람은 그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 열매 중에 가장 귀하고 중요한 열매가 사랑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 성령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그 속에 있는 사람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은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큰 축복들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요일 3:24
제목 :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명이라면 구약의 십계명을 위시해서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율법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명들은 사실은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들입니다.
계명들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 그 첫째 목적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시합을 시켜서 우리 서로가 잘난 척하라고 일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들을 나 자신에게 비추어 보아서 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오히려 율법을 잘 지켜보려고 노력을 하면서 은근이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자신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의 참된 의미도 모르고 교만하기만 하고 남의 잘못을 잘 지적합니다.
어떤 교회의 집사님 중에 정말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학교 교사인데 돈을 벌려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월급을 받으면 그 월급을 다 그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위해서 씁니다.
어려운 아이들의 학비를 대주기도 하고 밥을 못 먹는 아이들은 밥값을 내주기도 하고 정말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사인 제가 보기에도 저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참 착한 사람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그 착한 것이, 그 선한 일을 잘 하는 것이, 오히려 그를 아주 좋지 않은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선한 일을 많이 한다는 그 자부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처럼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을 비웃으며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조금도 남에게 굽힐 줄도 모르고 뭐든지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주장을 하고 남이 잘못하는 것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도 그와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까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자기의 의를 자랑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키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그 사람을 의롭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를 많이 지었던 세리가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고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할 때 그를 의롭다고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란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이 죄악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광성교회 성도님들은 꼭 이 바른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 다 몰라도 이것만 알면 됩니다.
믿음이 무엇이지만 바르게 알고 그 바른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영생으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 즉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자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주 안에 거하고 주님은 그의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그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그 안에 거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오늘 본문 말씀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라고 했습니다.
계명들을 지키는 자의 특권은 주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다가 보면 대강은 알 것 같은 데 정확하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단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거하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거하다"라는 말의 우리말 뜻은 "사람이 일정한 곳에 머물러 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들어가 살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내 속에 들어와서 사실까라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이 말은 우선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말입니다.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주 안에 거한다고 했으니까 다시 말하면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동의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가 집에 있는데 목사님 큰일났습니다. 교회에 불이 낫습니다.라고 하면 제가 그 말에 동의한다면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즉 그 말을 믿는다면 얼른 일어나 교회로 달려갈 것입니다.
또 제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큰일났습니다.
이 병은 얼른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영접하면 즉 그 말을 받아들이면 다시 말해서 그 말을 믿으면 예 수술해 주십시오라고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거한다는 말도 이와 같이 예수님의 품안에 안긴다는 말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하고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는 온통 이런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 이야기도 이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치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먹을 것도 시원찮고 물도 없는 이 광야로 왜 이끌어 냈느냐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 뱀을 보내서 많은 백성들이 물려 죽게 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한 가지 방법을 주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서 나무에 달고 뱀에 물려 죽게 된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면 깨끗하게 낫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절을 할 필요도 없고 거기에다 대고 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고 그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필요도 없고 그냥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약속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거하다"라고 번역된 이 말은 "머물다, 남아있다, 붙어 있다..."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약속 안에 예수님의 말씀 안에 끝까지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또 그의 명령대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자유가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 사는 것은 오히려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고 도박을 하고 남의 것을 탐내고 이런 삶이 자유입니까
아닙니다 자유라고 찾아간 그런 것들이 여러분을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술이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알콜 중독자로 만들고 그의 목숨까지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담배나 마약이나 도박이 정말로 우리에게서 참된 자유를 앗아 가 버리는 무서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참된 자유의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항 안에 금붕어 한 마리가 살고 있었고 그 아래에 고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금붕어는 자기가 어항 안에 갇혀서 산다는 것에 늘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고양이는 자기가 금붕어처럼 물 속에 들어가서 살지 못함을 기분 나쁘게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금붕어와 고양이가 서로 약속을 했습니다.
서로 바꾸어서 살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 두울 셋 하면 서로 자리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하나 두울 셋 하고 자리를 바꿨는데 그 결과는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즉 믿음을 가지는 것 또 사랑으로 사는 것 이것은 우리를 억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게 특권을 주시는 것이고 그 특권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오늘 본문 말씀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절 이하에 한 앉은뱅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전 미문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이 늘 구걸을 해서 먹고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그 사람이 구걸하러 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발과 발목이 힘을 얻게 되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안에 있던 것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안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그도 받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그에게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삶이란 가난한 거지에다가 걷지도 못하는 불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인생에 들어오시자 그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고 거지로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도 이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 속에 계시지 않으셨을 때 우리는 앉은뱅이 거지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는 서글픈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변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가 목적이 변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참된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산다고 해도 아무리 재미있는 삶을 산다고 해도 아무리 존경을 받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호화로운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은 헛된 것이며 허무한 것이며 아무 것도 아니며 영원히 멸망해 버리는 비참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우리가 비록 초라하고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비참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염려할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승리자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자이고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면서 살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도 참으로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기에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혹 주님을 떠날지라도 주님은 항상 우리 안에서 우리 인생을 살피시며 지키시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3.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는 것인가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알고 무엇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말씀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언뜻 들으면 그렇다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방언을 하고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도 그 증거를 받기 위해서 방언을 하든지 예언을 하든지 기도를 해서 능력을 받아서 기적을 일으키면 된다라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초대교회는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기적을 동원해서 믿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꼭 그렇게 역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기적적인 방법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나타난 현실을 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말도 그런 뜻입니다.
아무나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미든 사람은 그 속에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든지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 시집을 왔던지 장가를 갔던지 또 예수님을 믿는 친구가 있었든지 예수님을 믿는 학교를 다녔든지 병에 걸려서 혹은 너무나 외로워서 장가나 가 보려고.... 이런 저런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연들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 속에 오셨기 때문이고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시는 것은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나를 희생하면서 얻는 것도 없는 일에 남을 위해서 나선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기적인 것이 우리 인생인데
욕심이 배 밖으로 나온 채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그런 우리가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은 성령님께서 그 속에 계시는 사람이며 성령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주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사람은 그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 열매 중에 가장 귀하고 중요한 열매가 사랑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 성령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그 속에 있는 사람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은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큰 축복들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