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9. 2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36)
본문 : 요일 3:14-15
제목 :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람들이 버릇없는 행동을 할 때 욕 비슷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싸가지 없다"라는 말을 씁니다.
"싸가지 없다"는 말은 욕은 아니고 ‘싹수 없다’의 전라도 혹은 강원도에서 쓰는 사투리라고 합니다.
싸가지가 없다는 것은 싹에다가 "아지" 즉 송아지 망아지에 붙여서 소의 새끼 말의 새끼를 나타내듯이 싹의 새끼 즉 새순이 없거나 노래서 약하다는 뜻으로 미래를 기대하기 힘 든다라는 뜻으로 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싸가지라는 말이 쏘가지에서 온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속 마음의 씀씀이를 낮잡아서 나타내는 말을 쏘가지라고 하는데 이 쏘가지가 변해서 싸가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가지(쏘가지), 소갈머리, 소갈딱지 이런 말들과 같은 뜻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忍,義 ,禮,智 이 네 가지가 없는 사람 즉 사가지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전라도의 강한 억양 때문에 싸가지가 없다라는 말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忍,즉 참을성과 義, 즉 옳고 바름과 禮, 즉 예절 그리고 智, 즉 지혜 이 네 가지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데 이 네 가지가 없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을 갖추지 못한 버릇없는 사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 사가지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네 가지의 덕목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우리가.... 알거니와" "너희가 아는 바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 일서에 이런 "안다"라는 말이 열 여섯 차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안다는 말을 기록을 하면서 요한은 우리가 바르게 꼭 알아야 할 네 가지의 진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네 가지, 혹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실천을 해야 할 것을 이렇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1)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2:3-5).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2)죄를 거부하면서 삽니다(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자라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자라고 한다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3)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어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4)사랑하면서 삽니다(3:10, 14, 16, 18-19).
굳이 성경말씀들을 인용하지 않아도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일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가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구별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며 성도라면 알고 행해야 할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네 가지를 알고 행하는 사람은 사가지 즉 싸가지가 있는 성도며 이 네 가지를 알지 못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성도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네 가지 중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 중에서도 특별히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서 먼저 형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먼저 말씀을 하심으로 우리가 주 안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1.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대강령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했습니다(마22:37-40).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습니다.
강령이란 어떤 단체의 기본 목표나 정책을 요약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골자" 혹은 "본 뜻"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사랑은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기본이 되는 골자요 본 뜻이요 기본 목표요 기본 정책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대상을 이웃이라고 하셨지만 요한을 통해 말씀을 하실 때는 우리형제라고 그 이웃을 제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이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이웃의 정의는 강도만난 사람과 같이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가 우리의 이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더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 있는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시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여러 가지로 서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불이익을 당하고 어느 날 함께 붙잡혀 가서 사자 밥이 될 수도 있는 비참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도 형제라고 부르기도 하고 형제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서로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을 절대로 형제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 성도들을 주 안에서 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에는 참으로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셨기 때문에 교회 안의 형제들을 세상의 형제보다 오히려 더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성도들이 형제요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까지도 우리가 사랑을 해야 되겠지만 원수 사랑은 그 의미가 다른 사랑입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지 형제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모든 성도들이 사랑의 대상이고 특별히 이렇게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사랑의 대상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형제 사랑은 육신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이성간의 사랑일 것입니다.
교회 안의 사랑은 그런 이성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아주 옛날에는 교회를 예배당이 아니고 연애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녀가 만날 기회가 별로 없던 시절에 교회는 자연스럽게 남녀가 만나는 곳이 되었고 교인들끼리 연애를 많이 했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연애하고 결혼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형제사랑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육신적인 삶을 위해서 서로 도와주고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세상을 잘 살도록 서로 도와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살기가 힘이 들면 신앙생활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를 돌아보고 도와주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 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 본문이 말하는 형제사랑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런 일에 열중을 하게 되면 자칫 교회란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함께 협력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출입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인간적으로 뭘 좀 나누어주지 않으면 교회를 원망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오히려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세상의 헛됨을 알게 하여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형제사랑이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야 할 필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은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이 되고 천국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형제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 두 주장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서로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형제사랑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에 나타난 현상이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 형제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일도 좋은 일이고 그 결과로 얻는 영생도 너무나 좋습니다.
사람들은 출세를 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다른 사람을 못되게 하고 짓밟고 올라서서라도 출세를 합니다.
영생이란 세상의 출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너무나 좋은 방법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형제를 사랑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나만 잘되고 나만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소중한 것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봉사를 많이 하고 남을 도와주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그 일을 함으로 자신이 더 기쁘다고 말합니다
남을 사랑함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법칙입니다.
이런 법칙의 결정적인 것이 형제사랑을 통한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영생을 얻는 이 귀한 법칙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영생이 그 안에 없다.
본문 14절 하반절과 15절에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살인을 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안에 없다고 했습니다.
영생이 그 속에 있는 자는 즉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그 속에 가지고 있는 자는 살인같은 흉악한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살인을 한 자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살인과 같은 흉악한 죄를 지은 자도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면 용서를 받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를 받은 자는 성령님께서 그 속에 역사하는 사람은 살인과 같은 흉악한 죄는 지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인죄까지 저지르겠습니까
살인이라는 죄는 정말로 악한 사람이나 짓는 흉악한 죄입니다.
사탄이 그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는 사람이나 살인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살인을 한 자와 같이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즉 형제 사랑이 그 마음에 없는 자는 살인을 한 자와 같이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21-22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옛 계명에는 누구든지 살인을 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라가라 즉 욕을 하는 사람도 공회에 잡혀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형제사랑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랑은 하지 못할망정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을 하거나 미련하다고 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미움이 우리를 살인하는 자와 같이 영원한 지옥 불에 가게 하는 아주 무서운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랑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지 않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와 같아지고 우리를 지옥 불에 떨어지게 하는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안에서 한 형제된 우리 성도들을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의 힘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 요일 3:14-15
제목 :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람들이 버릇없는 행동을 할 때 욕 비슷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싸가지 없다"라는 말을 씁니다.
"싸가지 없다"는 말은 욕은 아니고 ‘싹수 없다’의 전라도 혹은 강원도에서 쓰는 사투리라고 합니다.
싸가지가 없다는 것은 싹에다가 "아지" 즉 송아지 망아지에 붙여서 소의 새끼 말의 새끼를 나타내듯이 싹의 새끼 즉 새순이 없거나 노래서 약하다는 뜻으로 미래를 기대하기 힘 든다라는 뜻으로 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싸가지라는 말이 쏘가지에서 온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속 마음의 씀씀이를 낮잡아서 나타내는 말을 쏘가지라고 하는데 이 쏘가지가 변해서 싸가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가지(쏘가지), 소갈머리, 소갈딱지 이런 말들과 같은 뜻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忍,義 ,禮,智 이 네 가지가 없는 사람 즉 사가지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전라도의 강한 억양 때문에 싸가지가 없다라는 말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忍,즉 참을성과 義, 즉 옳고 바름과 禮, 즉 예절 그리고 智, 즉 지혜 이 네 가지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데 이 네 가지가 없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을 갖추지 못한 버릇없는 사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 사가지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네 가지의 덕목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우리가.... 알거니와" "너희가 아는 바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 일서에 이런 "안다"라는 말이 열 여섯 차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안다는 말을 기록을 하면서 요한은 우리가 바르게 꼭 알아야 할 네 가지의 진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네 가지, 혹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실천을 해야 할 것을 이렇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1)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2:3-5).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2)죄를 거부하면서 삽니다(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자라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자라고 한다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3)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어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4)사랑하면서 삽니다(3:10, 14, 16, 18-19).
굳이 성경말씀들을 인용하지 않아도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일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가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구별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며 성도라면 알고 행해야 할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네 가지를 알고 행하는 사람은 사가지 즉 싸가지가 있는 성도며 이 네 가지를 알지 못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성도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네 가지 중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 중에서도 특별히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서 먼저 형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먼저 말씀을 하심으로 우리가 주 안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1.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대강령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했습니다(마22:37-40).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습니다.
강령이란 어떤 단체의 기본 목표나 정책을 요약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골자" 혹은 "본 뜻"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사랑은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기본이 되는 골자요 본 뜻이요 기본 목표요 기본 정책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대상을 이웃이라고 하셨지만 요한을 통해 말씀을 하실 때는 우리형제라고 그 이웃을 제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이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이웃의 정의는 강도만난 사람과 같이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가 우리의 이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더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 있는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시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여러 가지로 서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불이익을 당하고 어느 날 함께 붙잡혀 가서 사자 밥이 될 수도 있는 비참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도 형제라고 부르기도 하고 형제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서로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을 절대로 형제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 성도들을 주 안에서 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에는 참으로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셨기 때문에 교회 안의 형제들을 세상의 형제보다 오히려 더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성도들이 형제요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까지도 우리가 사랑을 해야 되겠지만 원수 사랑은 그 의미가 다른 사랑입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지 형제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모든 성도들이 사랑의 대상이고 특별히 이렇게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사랑의 대상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형제 사랑은 육신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이성간의 사랑일 것입니다.
교회 안의 사랑은 그런 이성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아주 옛날에는 교회를 예배당이 아니고 연애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녀가 만날 기회가 별로 없던 시절에 교회는 자연스럽게 남녀가 만나는 곳이 되었고 교인들끼리 연애를 많이 했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연애하고 결혼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형제사랑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육신적인 삶을 위해서 서로 도와주고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세상을 잘 살도록 서로 도와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살기가 힘이 들면 신앙생활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를 돌아보고 도와주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 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 본문이 말하는 형제사랑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런 일에 열중을 하게 되면 자칫 교회란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함께 협력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출입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인간적으로 뭘 좀 나누어주지 않으면 교회를 원망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오히려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세상의 헛됨을 알게 하여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형제사랑이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야 할 필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은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이 되고 천국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형제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 두 주장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서로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형제사랑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에 나타난 현상이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 형제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일도 좋은 일이고 그 결과로 얻는 영생도 너무나 좋습니다.
사람들은 출세를 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다른 사람을 못되게 하고 짓밟고 올라서서라도 출세를 합니다.
영생이란 세상의 출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너무나 좋은 방법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형제를 사랑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나만 잘되고 나만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소중한 것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봉사를 많이 하고 남을 도와주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그 일을 함으로 자신이 더 기쁘다고 말합니다
남을 사랑함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법칙입니다.
이런 법칙의 결정적인 것이 형제사랑을 통한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영생을 얻는 이 귀한 법칙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영생이 그 안에 없다.
본문 14절 하반절과 15절에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살인을 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안에 없다고 했습니다.
영생이 그 속에 있는 자는 즉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그 속에 가지고 있는 자는 살인같은 흉악한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살인을 한 자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살인과 같은 흉악한 죄를 지은 자도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면 용서를 받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를 받은 자는 성령님께서 그 속에 역사하는 사람은 살인과 같은 흉악한 죄는 지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인죄까지 저지르겠습니까
살인이라는 죄는 정말로 악한 사람이나 짓는 흉악한 죄입니다.
사탄이 그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는 사람이나 살인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살인을 한 자와 같이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즉 형제 사랑이 그 마음에 없는 자는 살인을 한 자와 같이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21-22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옛 계명에는 누구든지 살인을 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라가라 즉 욕을 하는 사람도 공회에 잡혀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형제사랑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랑은 하지 못할망정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을 하거나 미련하다고 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미움이 우리를 살인하는 자와 같이 영원한 지옥 불에 가게 하는 아주 무서운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랑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지 않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와 같아지고 우리를 지옥 불에 떨어지게 하는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안에서 한 형제된 우리 성도들을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의 힘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