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19.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전 03)

  본문 : 딤전 1:1-2

  제목 : 은혜와 긍휼과 평강.

 

 

  “1.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인사말을 세 주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인사말 가운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전적으로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울 서신서를 바울의 개인적인 글이라고 생각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바울서신이 바울의 개인적인 글이라면 그의 서신이나 그의 서신에서 강조하는 복음이 별로 귀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바울서신도 바울의 손을 빌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글자 한 자 한자까지도 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록하도록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며 성경 말씀이 주는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복음입니다.

 

  오늘은 인사의 마지막 부분인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귀한 축복이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디모데에게 축복하신 것이며 이 또한 오늘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따르는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하면서 이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라고 하시면서 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앞에서 말한 “우리 구주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뜻이 구원이라는 뜻이고 그리스도도 우리를 구원하러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야라는 뜻이고 주라는 뜻도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름도 직함도 우리가 부르는 별명도 다 구원이 그 핵심입니다. 이런 구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은혜와 긍휼과 평강입니다.

  디모데전서와 함께 시작하는 우리 광성교회 모든 성도님에게도 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넘치시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은혜가 네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교회에서 은혜라는 말을 참 많이 쓰지만 이 은혜라는 말을 대할수록 이 말처럼 귀한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은혜라는 말을 본문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오는 은혜라고 할 때는 주로 구원의 은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가 모든 은혜중에 가장 크고 귀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늘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은 자녀가 되고 또 이렇게 복음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사도가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운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율법의 의미를 잘 모르고 그냥 형식적으로만 율법을 대할 때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고 바르게 사는 의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율법이 주는 의미들을 잘 살펴보니까 겉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체하지만 속에는 악이 함께 있고 그 악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아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현대인의 성경)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조금만 노력하고 조금만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바르게 살려고 하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을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들이 같이 있고 선한 일을 하는 것보다 악한 일을 하는 데에 더 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타락한 습성에서 악한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는 것은 정말로 큰 은혜입니다. 그것도 아무런 공로나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믿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에 믿음을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은혜라는 단어는 아주 다양하게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 우아함, 매력, 아름다움, 감사, 은사, 선물, 칭찬, 친절, 기쁨. 등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은혜를 받으라고 하지 않고 “은혜가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이런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이 있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너무나 부족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은혜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그 모습이 삶이 다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우아함, 매력, 아름다움, 감사, 은사, 선물, 칭찬, 친절,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더 은혜를 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사는 것이 은혜 가운데서 사는 삶입니다. 은혜받은 것을 알고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알고 감사하면서 기쁘게 행복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를 누리면서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긍휼이 네게 있을지어다.

 

  제가 전도사가 되어서 처음 설교를 했을 때 설교 제목이 “불쌍히 여기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목회자의 마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관에 넣어서 장사지내기 위해 메고 나옵니다. 그 죽은 사람의 어머니는 과부로 혼자 사는 사람이었고 그 죽은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외아들을 키워서 행복하게 살려고 했는데 그만 젊은 나이에 죽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어 나가는 아들을 보면서 정말로 서럽게 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셔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하시니까 그 청년이 일어나서 앉기도 하고 말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어 나가는 청년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신 것은 우리 모든 인생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그 청년처럼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런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는 그런 죽음이나 이별이 없는 나라에서 살게 해주시려고 우리를 의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부터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 긍휼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았습니다. 제 나름대로 구분을 해보았는데 불쌍히 여기는 것은 동정할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면 긍휼히 여기는 것은 동정할만한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인데 우리 할머니께서 저를 바라보시는 눈은 늘 긍휼히 여기시는 눈이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 할머니는 늘 저의 편이셨고 저를 이해하셨고 아무런 조건이 없이 저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그런 우리 할머니의 눈을 발견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눈이 우리 예수님의 눈이 우리 할머니보다 더 긍휼히 여기는 눈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을 때 잡혀가신 예수님께서 그런 베드로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눈이 어떤 눈일까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너 이 자식 그렇게도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녀석이 그렇게 쉽게 배반해 너 조금 있다고 보자 넌 죽었어, 하는 그런 눈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는 동정의 눈빛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긍휼히 여기시는 눈으로 보시지 않고 공의의 눈으로 보신다면 그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즉사하게 될 것이고 다시 바람에 날려가는 티끌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우리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에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우리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우리가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에 긍휼히 여김이 없는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에게 심판을 면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하루 죽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다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동정을 받을만한 일도 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평강 네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 죄인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과 원수 사이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을 피해 다녀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영광입니다.

  이런 큰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억지로 나오지 마시고 기쁨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괴로움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즐거움을 누리셔야 합니다. 그런 즐거움이 없이 억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예배를 될 수 있는 한 그 회수를 줄이려는 것은 억지로 드리는 예배는 오히려 우리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을 드려도 정말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사이에도 서로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주안에서 한 형제 된 사이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 사이입니다.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 영원토록 함께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 디모데전서를 공부하게 되면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인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 되는 인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우리 서로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