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65)
본문 : 행 25:13-22
제목 : 유대인의 종교와 예수님의 부활.
“13.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로마라는 강대국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았을 아주 큰 두 사람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재판이 그 재판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그 때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있는 재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시고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라고 여겼습니다.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들이 당시 많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것은 그러다가 말겠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배웠는데 다른 하나님이 또 있다고 하고 그것도 일개 인간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자신들의 신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아주 흉악한 죄였기 때문에 반드시 사형을 시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한 흉악한 죄인으로 몰아서 십자가에 처형시키고 자신들이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것으로 이 사건은 끝이 나고 더 이상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예수님이 자신이 예언한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주장하신대로 메시야가 되시며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다시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시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전파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판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고 스데반 같은 사람은 즉결심판을 받고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재판도 없이 그냥 잡혀가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많은 재판 중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재판이 사도 바울의 재판입니다. 사도 바울의 재판은 예수님의 재판보다 더 많은 사람에 의해서 더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된 재판입니다.
그 재판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베스도의 말에 의하면 이 재판의 핵심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베스도가 말하기를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19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는 것은 자기들의 종교문제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문제로 고발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어떤 국법을 어기는 죄를 지어서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유대인의 종교와 예수님의 부활”로 정했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기억하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본문 13절에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그립바 왕은 정확하게 아그립바 2세로 아그립바 1세의 아들입니다. 헤롯대왕의 증손으로 이 이스라엘 지역의 분봉왕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린 사람입니다.
이 아그립바 왕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왔습니다.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에게 인사를 하러 온 것으로 보입니다.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만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답방으로 새로 부임한 총독에게 인사차 들렸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오면서 버니게라는 사람과 같이 왔다고 했습니다. 버니게는 아그랍바 1세의 딸로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입니다. 이 여자도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라서 권력을 따라 두어 번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하고 오빠 집에 와서 있었던 때로 보입니다.
지난 시간에 당시 로마의 권력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가 있고 그 아래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이 있고 또 분봉왕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통치구조 아래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지도자로 있어도 백성들이 잘 살지 못하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통치자들이 다 반유대적인 사람들이니까 유대인들의 삶은 오죽이나 했겠습니까? 그저 식민지 백성으로 비참한 삶을 살 뿐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기를 원했습니다. 왕이 아닌 사사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도 인간을 왕으로 모시고 그 인간 왕의 통치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을 때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여쭤보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을 요구했으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나님을 따르는 다윗을 세워서 왕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뒤를 이은 거의 모든 왕들이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던 대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겼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비참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왕이 되심을 거부한 결과로 이방인의 종이 되었고 결국 사탄의 종이 되어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주후 70년에 이스라엘 나라는 완전히 망합니다. 그들이 소중하게 여긴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지키려고 했던 율법은 나라가 망할 때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 당시를 강도가 들끓는 때라고 했습니다. 강도들이 정치가들과 야합을 해서 조직폭력배가 되어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갑니다.
조폭들에게 악한 정치가들에게 도둑과 강도들에게 비참하게 당해도 누구 한 사람 도와줄 사람이 없는 비참한 나라가 되고 말았고 그나마 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천여 년 동안 남의 나라를 떠돌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시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셨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 전체가 강도의 소굴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과거 유대인들처럼 세상 왕을 따르려고 하고 자기 자신이 왕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라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
본문 18-19절에 “18.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라고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아그립바 왕에게 그간 있었던 바울의 재판에 관한 일을 설명합니다. 벨릭스 총독 때 죄수 한 사람을 넘겨주었는데 유대인들이 다시 고발을 해서 조사를 해보니까 바울이 로마 국법으로 처벌을 할 만한 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발은 자기들이 믿는 종교에 대한 문제였고 바울이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는데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고발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총독으로 볼 때 고발을 할 일도 아니고 재판을 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 유대인의 종교문제
베스도가 유대인들이 고발한 것을 우선 종교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스도가 이 재판을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라고 했을 때 별 다른 의미 없이 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고발을 하고 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말을 조금 깊이 가지고 생각을 해보면 본인은 그냥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깊은 뜻이 있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종교라는 말로 쓰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종교란 인간들이 이런저런 신을 만들고 그 신을 두려워하여 신이 싫어하는 일을 피해서 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고, 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 좋은 일을 함으로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 뒤에는 그 종교를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거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공포분위기를 만들고 신을 섬기게 하고 그 대가를 자신들이 받기 위해서 종교를 만듭니다.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그런 종교적 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우리 인간의 창조주가 되시며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하고 중간에 누가 그것을 가지고 이익을 챙기게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괴롭히려고 하시지도 않으셨고 오히려 인간이 행복하게 평화를 누리면서 잘 살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종교화 했다는 것은 율법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엄격한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사나 절기들을 이용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뭔가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중간에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들이 생기고 결국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권력도 잡고 돈도 챙기는 사람들이 생겨서 세상 종교처럼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문제점도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기독교를 종교화해서 그로 인해서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게 만들고 그것을 빙자하여 인간 자신들의 종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을 받게 한다는 것을 빙자하여 충성하게 만들고 돈을 바치게 만들고 결국 그 충성과 돈으로 자신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종교 사업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종교화 시키고 사업화 시키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에 복음은 없어지거나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가끔 설교자의 입에 오르내리기만 하는 별 볼일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없어지고 그 보잘것없는 인간의 공로만 인간의 선행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2) 죽은 것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문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바울에 대한 재판의 또 한 가지 쟁점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문제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이고 메시야라고 해서 분명히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이 살아났고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재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주장해서 죽게 한 그 예수가 만약에 바울이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증언처럼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면 이것은 아주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며 자신이 오만방자하게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아주 악한 사람이라고 사형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예언한 것처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면 이건 그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문제가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그것이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그 죄의 벌을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손들이 다 받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것이 잘못됐다면 이제 하나님께 벌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여럿이서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할 때 그 목격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하려고 일부러 순교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더 확실하고 더 좋은 부활을 위해서 더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려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증거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고함을 지르고 그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큰소리 쳤던 그 유대인들이 그들의 말대로 그들이 그들의 자손이 엄청난 벌을 받았습니다. 2천여 년 동안을 나라도 없이 살면서 나치에게 또 여러 민족에게 비참하게 박해를 당하고 살해를 당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다시 나라를 만들고 또 유대인들 중에 부자들이나 머리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교육 방법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처럼 성경을 줄줄 외우게 하고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부자가 된다고 해도 그들이 엄청난 머리를 가졌다고 해도 그들의 나라가 막강한 나라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가 강해진 것이고 그들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종교화해서 이용할 뿐이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나의 죄와 무관하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활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냥 누군가에 이용당하는 종교의 하나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부활을 소중히 여지기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이나 우리의 부활을 믿지 않거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로 나가서 하나님나라에 살게 되거나 아니면 심판의 부활로 나와서 각자가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되고 영원한 지옥형벌에 처하게 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종교가 아닙니다. 신의 환심을 사서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세상의 복이나 받아보자고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게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참된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가서 살게 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