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57)

  본문 : 행 23:11

  제목 : 주께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하고 로마 군대에 붙잡히고 유대인들의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부활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호소하여서 공회의 재판을 마치고 다시 로마 군인들의 영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을 가까스로 모면하기는 했지만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바울의 편이 될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유대인들이 그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막강한 병력과 힘을 가진 로마 병정들이 그를 아직 죄수로 잡아서 죄만 발견되면 처형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그들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 그 위험 앞에 서있기란 참으로 외롭고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그것도 때로는 인간인지라 의심이 밀려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예수님의 부활과 믿는 사람의 부활을 믿기는 하지만 인간인지라 때로는 의심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날 밤에 주님께서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의 곁에 오셔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오늘 설교제목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바울 같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일에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나 혼자입니다. 나 혼자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살지만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혹 몹쓸 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혹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늙어서 돈도 없고 힘도 없으면 어떻게 살까? 이런저런 걱정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말씀을 듣고 아멘을 하고 그렇게 믿고는 있지만 천국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천국에 가서 그 아름다운 세상을 직접 보고 예수님하고 악수나 한번 하고 왔으면 정말로 확신을 가지고 살겠는데 그런 경험이 없어서 때로는 두렵습니다.

 

  이런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바울에게 담대하라고 하신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지만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담대한 마음으로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오늘 본문 말씀에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날 밤에”란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고 바리새인들의 도움과 로마 병정들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해 나와서 로마군의 병영 안에 와 있던 그날 밤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 때 그 시간을 가리키는 말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 또 내일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그러한 형편에 처해 있을 때에 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강해설교를 들으니까 성경말씀의 앞뒤를 다 살펴보면서 그 본문이 주는 의미들을 바르게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해설교가 아니고 그냥 어느 본문 한 부분만을 가지고 설교를 들으면 그 본문을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을 해서 잘못이해하기도 합니다.

 

  "담대 하라"는 말도 설교에 많이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만 가지고 어떤 때에 왜 담대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담대하라고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엉뚱한 일에 담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에, 죄를 짓는 일에, 나쁜 길로 달려가는 길에 담대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될 일에 담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 날 밤에'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언제 담대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 하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 본대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유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우리의 부활이라는 이 복음을 위해서 증언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 밤에 라고 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담대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당시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당시에는 너무나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믿을 수 없는 거짓말 같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걸고 적극적으로 반대를 해야 할일이었습니다. 유대교 전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고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한 그 메시야가 되시며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이시라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흉악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같이 과학이 발달된 세상에서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믿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천당", "예수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하던 구호가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어느 날 "예수 축복", "예수님 믿고 복 받읍시다."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요즘도 가끔은 "예수 천당"이라고 어깨띠를 두르고 또는 차에다가 써 붙이고 예수 천당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을 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얼굴을 찌푸리고 외면합니다. 이제 창피하게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부활의 복음을 믿는 믿음생활을 할 때에 담대 하라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참 쉬웠습니다. 워낙 어려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은 휴식이었고 평안함을 누리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노동 중에도 중노동입니다. 바쁘고 할 일 많은 세상에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주일뿐입니까? 새벽마다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큰 교회에서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교회에 와서 살다시피 합니다.

 

  헌금생활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돈을 낸다는 것은 그것도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끔은 헌금 좀 하라고 말은 하지만 여러분의 형편에서 보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돈을 가지고 부모님께 효도를 하면 정말로 효자라고 소문이 날 것입니다. 그 돈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뭍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상이나 훈장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돈을 가지고 노후를 대비하여 적금을 들거나 보험을 들면 많은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보장도 없어 보이는 교회에 헌금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믿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는 믿음으로 헌금도 하고 충성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담대 하라 모든 염려들을 다 주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6)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안에는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로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헌신을 하고 다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삽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환상으로 보이셨는지 말씀으로만 들려주셨는지 천사를 보내셨는지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멀리 계시지 않고 바울 바로 곁에 와계신다는 것입니다. 바울 곁에서 바울과 함께 계시면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멀리서 그냥 너 혼자 힘으로 한번 해봐라가 아니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함께 힘을 주시면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A. W 토저 라고 하는 유명한 설교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을 마치 광부가 땅 속에서 금광을 파고 있는 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광부가 땅 속 깊은 곳에서 금을 캐고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물을 캐고 계시지만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라는 보화를 캐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담대 하라

 

  그 밤에 주께서 사도 바울 곁에 오셔서 "담대 하라"고 하셨습니다. 담대 하라는 말은 때로는 "두려워하지 말라", "안심하라", "평안 하라"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담대 하라는 단어를 쓰셨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 안심하라, 평안하라고 번역했습니다. 특별히 죄에 빠져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구해주시면서 이 단어를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안심하라'는 단어가 '담대 하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죄로 인하여 중풍도 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러 오셔서 안심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그런 죄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구주가 오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낫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옷깃을 만졌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눅8:48))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평안'이라는 단어가 담대 하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네 믿음이 네 죄에서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제는 죄로 인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담대하지 못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지은 죄로 인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셨을 때 그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다 이 죄로 인한 것들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했을 때 우리는 안심하고 평안하여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께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고 다닙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두려움에 떨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만 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며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편안하라 안심하라 담대하라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 대신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흉악한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서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으며 담대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본문 말씀에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바울 곁에 오셔서 담대하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에게 좀 야속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담대하라고 하셨으면 이렇게 말씀을 하지 않고 다르게 말씀을 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는 복음을 전한다고 좀 고생했지만 로마에 가서는 다를 것이다. 이런 어려움도 당하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담대하게 가라고 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한번 고생길을 가는 것은 멋모르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고생을 다시 한 번 하라고 하면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떻게 같은 고생을 되풀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 말씀 가운데서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보다는 똑 같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일이라면 이보다 더한 고생도 각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는 고통을 당하는 일이고 아무런 대가도 없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나는 일은 절대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생각할 수도 없는 분에 넘치는 보상이 있는 너무나 귀한 일임을 바울은 알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그 말씀을 받았고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 세상에서는 내일이 보장되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할 수록 이 세상의 삶은 오히려 더 힘이 드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너머의 일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더 힘들수록 영원한 나라에서의 상은 엄청나게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일이 아무리 힘이 드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이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서 우리가 받게 될 영원한 하나님나라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우리 곁에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그로인해서 오는 어려움들로 인해서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