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4.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29)
본문 : 행 19:23-27
제목 :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3.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만방에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성장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세력의 끊임없는 방해공작도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떠돌이 유대인 마술사들이 사도바울의 흉내를 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다가 귀신에게 망신을 당하고 나서 마술사들이 마술책을 다 모아서 불태워버린 사건을 통해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도 많이 와서 자복하며 그동안 바르게 믿지 못했음을 공적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에베소에서의 복음전도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탄은 다시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공격해옵니다. 사탄이 복음이 전파되어 자기들이 설 자리를 잃는 것을 그대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공격해 온 사람들은 은장색들이라고 했습니다. 은으로 신상의 모양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람들이 자신들 밥벌이 사업이 망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바울과 복음 전파자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 19장 끝 절까지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23절에서 27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에는 그들이 왜 이 도 때문에 적지 않은 소동을 벌렸는지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도로 말미암아
본문 23절에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그리고 26절에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도’라는 단어가 나오면 특별히 반복해서 이 도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도’란 단어의 뜻은 단순히 ‘길’이라는 뜻이지만 성경에서 ‘도’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혹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는 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도’를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말했습니다.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신26:17)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인간들의 가장 흉악한 죄는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참신이신 하나님을 몰라보고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면서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서 만들어주신 율법이나 여러 규례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기를 좋아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앞서 인용한 신명기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도를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듣고 따르는 것이 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전한 도로 인하여 소동이 일어났는데 그 도를 설명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그 외에 사람이 만든 모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이 도’는 더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도’는 “믿음의 도”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말로 “십자가의 도”라고 하기도 합니다.
유다서 1장 3절에서 믿음의 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믿음의 도는 “일반으로 받은 구원”을 말하고 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을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라고 말하면 흔히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길이 십자가를 진 것과 같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십자가의 도를 잘못 이해한데서 오는 생각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도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저항을 받았고 타락한 중세의 교회에 저항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행함이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비웃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십자가의 도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일들을 많이 하는 사람이나 교회일수록 이 십자가의 도를 무시합니다.
제가 지난주 낮예배 설교에 제 꿈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은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 꿈이 조금 이루어져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지난 주 오후에 세종로에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운동이라는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고 동참했던 죄를 회개하고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자는 주제로 기도회를 했습니다.
제가 순교자들의 유족을 대표해서 30초 동안 이야기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간단히 감사하다는 인사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있는데 말을 끊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 몇 마디 해버렸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만 회개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하여 한국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외쳐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 도’로 인해 과거에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십자가의 도를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두 마디하고 말아서 그냥 넘어갔지만 좀 더 강하게 이야기 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본문 24절-25절에 이 도로 말미암은 소동을 이렇게 말합니다.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있었습니다. 은장색이란 은 세공업자를 말하는데 은을 녹여 물건을 만들거나 은을 두들겨 펴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은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서 적잖은 돈을 벌었습니다. 자신도 돈을 벌었고 자신과 함께 하는 직원들도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데미 신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며 주신인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 태어난 신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의 수호신이며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신으로 믿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여신을 ‘디아나’(Diana)로 불렀습니다. 진짜 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리로 상상하여서 만든 가짜 신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신화라고 합니다. 우주의 기원이나 국가나 씨족의 기원들을 인간의 머리로 상상력으로 그럴듯하게 만든 이야기를 신화라고 합니다.
데메드리오에게 있어서 이 신이 진짜 신인지 가짜인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유명한 수호신으로 믿고 있고 이 신상을 많이 사갔습니다. 그로 인해서 돈을 많이 벌고 호화스러운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렇게 가짜 신상을 만들어 팔아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 신이 가짜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제 그런 호화스러운 삶을 살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소동을 벌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돈으로 연결이 되는 세상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돈이면 뭐든지 해결이 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모든 것들이 다 돈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스포츠나 오락이나 여행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상술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텔레비전 프로도 좀 보려고 하면 얼마나 상품선전을 많이 해대는지 모릅니다. 신문도 인터넷으로 보면 장사꾼들의 선전이 얼마나 집요한지 모릅니다. 공짜로 신문 좀 본다고 하다가 잘못하면 큰돈을 잃도록 유혹을 합니다. 스포츠도 다 장사를 위한 것이고 도박까지 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종교에도 이 상술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거짓종교들이 신을 빙자해서 복을 받게 한다는 것을 빙자해서 돈을 받아 챙기고 있습니다. 중세시대 타락한 교회는 면죄부를 팔기도 하고 신부직을 돈으로 사고팔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도 진리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돈에만 눈이 어두웠습니다. 이단들의 교회를 보면 엄청나게 재산이 많습니다. 종교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복을 받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돈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참 가난하고 못살았던 시절에 복을 받아서 잘 살아보려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은 미신에서 벗어났고 공부를 할 기회도 주어졌고 출세를 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를 더욱 잘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잘 살게 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교회를 세상에서 잘 살게 해주는 복을 받는 곳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도 세상 복 받기를 좋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종교를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들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서 자신들이 얼마나 악한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던 은장색들처럼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평안한 삶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지옥에 빠지게 하는 엉터리 종교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재물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를 당하게 되고
본문 27절에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그들의 사업은 승승장구 했는데 이제는 그 사업이 망할 위험에 처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만들어 파는 아데미의 신전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제는 무가치한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데미라는 여신의 위엄마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신전의 모형을 팔면서 이 신전을 가지고 있으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그것이 거짓말로 탄로가 나고 말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이제는 사기꾼이라고 핀잔을 받을 것이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악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우리가 그냥 이대로 있다가는 다 망한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복음전하는 사람들을 내쳐야 한다고 선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옳은 일인지 옳지 않은 일인지를 구별하려면 이성적으로 그것이 왜 옳은 일인지를 잘 설명하여서 거기에 동의를 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이성적이거나 설명을 듣고 깨달을만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냥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느냐에 따라서 행동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제일 큰 문제가 이런 선동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나라를 위해서 옳고 바른 일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여론으로 판단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촛불부대에 몇 명이 모였는가, 태극기 부대에 몇 명이 모였는가? 그것으로 판단을 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항의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 꼭 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자기의 이익의 기준에 맞춰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많은 다수의 편에 있지 않고 소수의 편에 있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사람은 소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길을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힘들고 어렵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길이고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복음은 비밀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무나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백성만 이 진리를 알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알고 바른 믿음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소수지만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이 십자가의 도로 말미암아 소동을 벌린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그들의 장사를 방해하고 풍족한 삶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들이 섬기던 우상이 헛된 것임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이 십자가의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귀한 믿음을 세상 재물과 세상 욕심과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