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25.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00)
본문 : 행 15:36-41
제목 :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36.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총회에서 받아 온 판결문을 낭독하여 그동안 자신들이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시킴으로 안디옥의 교회가 굳건하게 서가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거짓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교회가 안전해 지자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여행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여 개척한 교회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교회들도 교회 내에 복음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 같은 문제로 성도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 간에 심하게 다툴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 때 동행했던 마가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했고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서 거부했습니다. 이런 다툼이 해결이 되지 못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나버렸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계획을 변경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은 새로운 도시인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서 교회들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분쟁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고 처한 형편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쟁 가운데서도 복음은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갑니다. 때로는 서로 다른 견해와 그로인한 분쟁들을 통해서 복음은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분쟁 가운데서도 교회는 더욱 견고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의견들이 서로 조정이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더 분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교회를 견고하게 하는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견고하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도 굳고 단단한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사상이나 의지가 흔들림이 없이 확고한 것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서도 이 ‘견고하다’로 번역한 단어는 강하고 굳센 것을 말하는데 ‘더욱’이라는 단어를 첨가해서 “한층 더 강하고 굳세게 했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고 때로는 서로간의 다툼도 있지만 이런 일들을 통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면 안 됩니다. 이런 일들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목표는 교회가 믿음이 더욱 더 견고하게 되어나가야 합니다.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본문 36절에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라고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일어난 사건을 수습하고 난 바나바와 바울은 앞서 복음을 전했던 교회들에도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전에 복음을 전했던 교회로 가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자고 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여러 시간 살펴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외국으로 선교를 떠난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거짓 선생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행하고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섬겨오던 사람들이 한 말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도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유대교식으로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가, 바울이 전한 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그렇게 해도 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해야 되는가, 안 해도 되는가? 금요 철야 기도를 해야 되는가, 하지 않아도 되는가? 예배의 시간이나 순서나 방법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이런저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절대로 바꾸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에 관한 진리는 절대로 바뀌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복음보다 다른 것을 우위에 두면 안 됩니다. 이 복음에 다른 것을 섞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 때문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똑바로 살지 않고 아무렇게나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천주교 사람들이나 기독교 내의 인본주의 교단의 교인들보다 복음을 믿는 개혁주의 교회 사람들이 좀 덜 선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은 참 착하고 좋은 일 많이 합니다. 순복음교회 교인들은 정말로 열심이 특별합니다. 또 이단교회의 교인들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믿음보다 인간의 보잘 것 없는 행함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믿음보다 행함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여러 시간에 걸쳐서 초대교회의 갈등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의 일에 얼마나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일, 율법을 지키는 일, 선을 행하는 일에 정말로 열심을 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제 그런 일은 소용없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에 사사건건 방해를 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전파하고 있는 사도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기 전에는 그런 일에 열심을 내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기를 자신도 과거에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5:5-6)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알게 된 후에 그런 것들을 다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에 다른 것을 적당히 섞어서 전하는 것은 아닌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위장된 믿음이나 거짓된 믿음은 아닌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믿음에 따른 진실한 고백이 있는가, 없는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고백이 말로만인가 삶으로까지 연결되어 있는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행도 이 믿음에서 나오는 선행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 믿음을 통하지 않는 선행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갈라서니
본문 37절-39절에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라고 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교회에 거짓선생이나 이단이 들어와서 성도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다시 그 교회들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일은 교회를 바로 세우고 견고하게 하는 정말로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면서 두 사람이 심히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다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 삐쳐서 갈라서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바울도 말리지 않고 실라를 데리고 다른 길로 가버렸습니다.
그 두 사람이 다툰 이유는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1차 선교 여행 때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라고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힘들다고 가버렸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고 힘이 좀 든다고 떠나버린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간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배신자를 다시 데리고 가지 못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마가는 나이도 어리고 부잣집 아들이라서 곱게 자란 사람이라 평소에도 마음이 약하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잘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가버리는 습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 자신이 기록한 마가복음 14장에 한 청년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14:51-52) 주석가들은 이 청년이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평소 나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강하고 담대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그런 나약한 사람을 데리고 선교를 떠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 때 비록 도망을 가기 했지만 마가가 신앙심이 깊고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외삼촌이었기 때문에 생질인 마가를 사랑하기도 했었겠지만 누구보다도 마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자기 집을 그 유명한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기도처소로 내어주고 함께 기도하던 신실한 성도였기 때문에 어머니를 따라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잘 했던 사람입니다. 또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서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보고 많이 배운 사람입니다. 비록 나약한 부분이 있지만 이렇게 신앙훈련을 받은 마가를 선교에 데리고 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나바와 바울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또 각자가 생각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조금도 양보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도 누가 옳은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생각이 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보면 바나바의 생각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가는 미록 심약하여 두어 번 도망을 간일은 있지만 그가 신앙을 버렸거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지 않았고 점점 더 훌륭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마가라고 불리는 요한이었습니다. 후일 다시 사도바울의 동역자가 되어서 함께 일을 하였고 바울의 사랑도 받았습니다. 역사가에 의하면 마가는 말년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세우고 이집트에서 선교 활동에 전념하며 헌신된 봉사자로 살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이런저런 다툼이 있습니다. 내 생각이 절대로 옳은 것 같지만 다른 사람도 자기 생각을 옳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런 다툼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의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조금씩 양보할 줄도 알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지금보기에는 좀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좀 부족해도 장래에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지금 기대를 하는 사람 중에도 큰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스스로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고 이해를 해 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본문 40-41절에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일로 인해서 심히 다툰 후에 서로 헤어졌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다고 했습니다. 구브로는 키프로스라는 섬으로 바나바와 바울이 처음 선교하러 갔던 지역이고 바나바의 고향이었습니다. 마음이 상해서 자기 고향으로 먼저 갔기는 했지만 바울과 함께 선교지를 다시 돌아보기로 했기 때문에 처음 갔던 그곳으로 먼저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나바의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없어집니다. 성경의 기록에는 없지만 그 또한 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떠나자 사도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바나바와 함께 전에 방문했던 선교지를 방문하기로 했지만 바나바가 그 길로 떠나자 바울은 선교하지 않았던 다른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길리기아 지방은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 자기 고향을 좋아하고 고향 사람들을 먼저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싸우고 헤어졌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복음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바로 받들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한 교회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흩어져서 각 자의 길을 가게 하심으로 한편으로는 교회가 견고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되어서 교회가 더 많아지게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다르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서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서로 다툼 때문에 교회가 상처를 입고 교회가 갈라지고 교회가 연약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교회가 더욱 견고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전하는 교회가 연약합니다. 세상에서 복 받고 잘산다고 외치는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복 받으려고 헌금도 많이 하고 충성도 잘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복음을 바로 전하고 진리를 따르는 교회는 사람들이 싫어하고 헌금도 충성도 잘 안 합니다. 그래봤지 얻는 이익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일수록 교회가 든든하게 서 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충성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힘을 합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같이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전파하는 교회가 강해져야 된다고 믿습니다. 이런 좋은 교회 바른 교회가 끝까지 보존되고 점점 더 견고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더 견고해지고 더 바른 교회가 되어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도 바른 신앙을 따라 살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힘이 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이런 바른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가 더 부흥하고 더 잘되게 하는 일에 동참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신앙도 더 견고하게 하시고 여러분의 삶도 더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귀한 일을 하는데 우리들에게 더 큰 힘을 주옵소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 견고하게 하는 일에 더 충성할 수 있도록 더 큰 능력을 주옵소서! 저의 기도제목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의견도 있고 다툼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견고하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더욱 견고해지고 그런 우리의 모임인 우리 교회가 더욱 견고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