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11.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94)

본문 : 행 15:12-18

제목 :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12.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행전 15장은 예루살렘에서 모인 최초의 교회 지도자들의 총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방의 안디옥교회를 대표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참석하고 있고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과, 야고보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함께 참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회의의 주제는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가 중심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능력에 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시시때때로 제사를 드렸고 율법을 지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매를 맞고 나라도 망했는데 그런 노력도 없이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의 법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그냥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을 믿고 평생 온갖 충성을 하고 살았는데 어떤 사람은 평생 교회에 다녀도 대강 적당히 다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에 믿습니다. 한마디 하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 믿는다고 똑같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볼 때는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신 것은 인정한다고 해도 그렇다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음의 능력을 바로 알고 경험한 사람들이 볼 때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의견이 다를 때 이 의견을 정리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은 매우 힘이 드는 일입니다. 오늘날 개신교가 여러 교파 여러 교단으로 갈라져 있는 것은 서로가 가진 생각들이 서로 다르고 그것을 하나로 정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어느 것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고 어느 것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 텐데 그것을 누가 확실하게 구별을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구별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우리가 경험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같은가 하는 것을 가려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교회 지도자들의 총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증언을 듣고 베드로 사도의 증언을 들은 야고보가 그들의 증언을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봄으로 그들의 증언이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는 장면입니다.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본문 12절에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모인 예루살렘의 총회는 매우 시끄러웠을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형편이나 삶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그들이 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제사나 율법을 포기하고 할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닌 짐승처럼 여기던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한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 이전에 베드로 사도가 먼저 증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지만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 사도가 일어나서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에게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믿게 한 경험이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도했을 때 성령님께서 임하셨고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방인이라고 차별하면 안 되며 이방인들에게 멍에를 매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할례나 율법의 준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에 바나바와 바울이 일어나서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이 베드로 사도가 전한 복음과 같은 복음이었으며 베드로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임하셨던 그 성령님이 자기들이 복음을 전할 때도 임하셨고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나타내셨던 그 표적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특별히 부름을 받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사도바울이지만 먼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베드로사도였습니다. 우리교회가 작년에 “일어나 잡아 먹어라”는 표어로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고넬료라는 사람이 이방인이었고 그 가정에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한 사람이 베드로사도였습니다. 베드로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거기에도 성령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오순절에 임하셨을 때와 같은 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였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바나바와 바울도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도 성령님이 임하셨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불구였던 앉은뱅이를 일으켰던 것처럼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중심으로 베드로나 바울이 전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거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본문 13절에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증언과 바울의 증언을 듣고 난 야고보가 그들의 증언에 대답을 하려고 말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도 두 사람이나 있습니다. 큰 야고보라고 불리는 세베대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으로 알려진 야고보가 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여기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 있는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를 말합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형님인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던 형님이 어느 날 집을 나가서 자신이 메시야라고 하고 다니자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다고 할 때도 찾아가지 않았던 그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본 후에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믿게 되었고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어렸을 때 배우고 따랐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그가 야고보서를 기록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의 그런 주장은 예루살렘 총회 이전에 기록했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총회 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 이후에는 마음이 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본문의 야고보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여고보가 아니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믿음의 진실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지 행함 그 자체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엉터리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 믿음의 진실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야고보의 그런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을 들은 야고보는 그들의 주장과 경험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그들의 주장이 성경과 일치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본문 15절에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와 바울의 주장이 선지자들이 말한 것과 일치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각자가 다른 일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알고 경험한 일들을 최고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각자의 생각이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선지자들의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이 똑똑해졌고 많은 것을 알고 체험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자기의 주장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머리가 좋아지고 많은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지식은 아주 제한 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극소수의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작고 알량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2)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본문 16절에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모스 9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아모스서의 본문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맞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주전 800년경에 북 이스라엘에서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주로 북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하고 북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아모스 9장 11절은 아모스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의 멸망을 예언 한 후에 그 멸망한 다윗 왕가가 다시 회복을 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을 따라 북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고 뒤이어 남 유다도 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자손들로 이어지는 왕가도 끊어졌고 마카비 왕국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다윗 왕국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한 메시야가 오시면 다시 이 땅에 다윗의 왕국이 건설되고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셨다고 했을 때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세울 왕으로 생각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야고보는 아모스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예언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이 아모스의 예언이고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함이라.

 

17절에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 열리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의 총회의 주제는 이방인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에 대한 의논이 총회의 주제였습니다. 야고보는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주님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사탄의 종노릇을 하다가 영원한 지옥에나 가야할 불쌍한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특별한 은혜로 받은 믿음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할례나 율법의 준수나 그 어떤 인간의 행위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총회

 

현대 교회에도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총회와 같이 각 교단별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1년에 한 번씩 정기총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교단내의 여러 현안문제에 대해서 의논을 하고 때로는 이단을 가려서 정죄하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총회가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의 총회에서 의논했던 그 주제를 다시 한 번 의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가? 아니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을 다시 의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고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믿음에다가 지키지 못할 율법의 멍에를 메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왕국을 기대하며 살게 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천국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왕국을 사모하면서 살게 할 것인가를 의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영원한 천국을 사모한다고 하지만 영원한 천국이 없는 것처럼 이 땅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보다는 이 땅에 속한 세속적인 복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확실하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믿음을 외치는 교회입니다. 이 세상의 부스러기 축복보다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나가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생각이나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확실한 진리입니다. 이 믿음을 더욱 굳게 하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초대교회가 전했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바울과 바나바가 야고보가 스데반이 전했던 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믿음이 우리가 믿는 믿음입니다. 이 위대한 믿음을 바로 알고 진실 되게 고백하고 성도답게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