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54)
본문 : 엡 4:2-3
제목 : 합당한 삶의 원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1장에서 3장까지는 교리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 6장까지는 실천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4장의 시작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진리를 알았으므로 이런 진리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실천 편을 시작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4장을 통하여 합당한 삶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4장 4절로부터 16절까지가 그 말씀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부분의 주제를 "영적 연합"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경건한 삶에 관한 것입니다.
17절부터 32절까지의 말씀인데 로이드 존스 목사는 5:17절까지 묶어서 그 주제를 "영적 광명"으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두 가지를 합해서 즉 하나됨과 경건한 삶을 합해서 하나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된 삶을 살기 위해서나 또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의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삶의 원리를 다섯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 하나 됨 이 다섯 가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삶의 원리는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삶의 자세가 됩니다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본 자세가 갖추어지지 않는 삶의 행동은 거짓된 삶이거나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위선이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겸손 
겸손이란 말은 참 쉬어 보이면서도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매우 힘든 것입니다.
겸손이란 그저 자세를 낮추고 인사나 잘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어서 교만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등치 때문에 그런 것인지 저를 보기만 하면 교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겸손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인사도 꾸벅 꾸벅 잘하고 앞에 나가서 이야기 할 때도 자세를 낮추고 공손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깨닫고 나서 보니까 그런 외형의 모습 때문에 교만하게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삶의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삶 속에서 겸손한 삶이 없는데 겉으로만 겸손한 척 했기 때문에 아무리 굽신거리면서 인사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저를 겸손한 사람으로 보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1)겸손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자랑하고싶어 하고, 명예가 있는 자들은 명예를, 학벌이 좋은 사람은 학벌을 자랑합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신앙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그렇게 하고 싶어하고 당연한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엡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사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특별히 신앙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자랑해야지 그것을 누리고 있는 우리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말속에는 꼭 자기 자랑을 하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따른 행동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자기 자랑 자기 신뢰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도 자기 자랑 즉 교만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경험한 것 중에는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많고 그 경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도 소중히 여겨 줄줄 아는 것이 겸손한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원칙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또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3-4절 말씀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라고 했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자기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겸손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고집을 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볼 줄 아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 즉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겸손하고 멋있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와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 아 이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구나 아 이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소한 일이지만 2층에 들어가면서 신발 하나 신고 벗고 하는 것도 그런 기본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벗은 신발을 신발장에 잘 정리하고 나갈 때 실내화도 잘 벗어서 정리하고 나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데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면 나중에 누가 정리를 할까라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컵을 씻지 않고 두면 누가 씻을 까 휴지를 아무렇게나 버리면 나중에 누가 청소할까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치우겠지 그런 생각을 무의식 속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것 하나 생각하면서 배려하는 사람이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 설교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에 어떤 예수님을 잘 믿으면서 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농사철이 되면 논에다가 물을 잘 넣어 주는 것이 큰일입니다.
저수지에서 물이 내려오면 그냥 물이 들어오는 곳도 있지만 배수로 보다 논이 좀 높으면 물을 퍼 올려야 합니다.
요즘은 전기 모터로 퍼 올리는 펌푸가 있지만 옛날에는 일일이 손으로 퍼 올려야 했습니다.
이 농부의 논도 좀 높은 지역이라서 물을 퍼 올립니다.
잔뜩 수고해서 물을 퍼 올렸는데 다음날 가니까 물이 다 없어진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바로 아래에 논을 가진 사람이 논둑을 뚫어서 물을 다 빼 가 버리는 것입니다.
한번은 참았는데 그 다음 날 또 그러고 그 다음날도 또 그렇게 하니까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서 멱살을 잡고 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한판 해 댈 판인데 예수님 믿는 사람이 그럴 수도 없고 해서 믿음의 형제들끼리 모여서 기도를 하고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하고 의논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의 논에 물을 빼 가는 일은 나쁜 일이며 그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혼을 내주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옳은 일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기회에 옳은 일 보다 더 큰일을 합시다.

옳은 일보다 더 큰일이란 논에 물을 댈 때 먼저 그 이웃 사람의 논부터 물을 먼저 퍼 올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자기 논에 물을 퍼 올리면 그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조언에 따라서 그 믿음 좋은 농부는 자기 논에 물을 대기 전에 그 이웃 사람의 논부터 물을 퍼 주고 그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니까 논에 물이 그대로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논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배려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그도 역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렇게 남을 먼저 낫게 여기고 배려할 줄 아는 자세가 배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버리고 자기 고집도 버리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것이 겸손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으로 기본 자세를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온유
온유하다는 말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얌전하고 친절하고 온순한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뜻하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온순한 그런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라는 것입니다. 
딱딱하고 거칠고 인정머리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백령도에 갔을 때 동글동글하고 맨들맨들한 자갈로 된 해수욕장에 갔습니다.
와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돌들이 어떻게 이렇게 똑 같이 동글동글 맨들 맨들하게 되었을까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참 놀랍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모양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 모가 나고 거칠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돌들이었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바람과 물과 서로 서로에게 부딪침으로 모난 것이 없어지고 거친 곳이 없어지고 이렇게 둥글게 부드럽게 만들어 졌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점점 성화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상처를 주지 않는 둥글등굴한 자갈처럼 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된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무심코 찌푸리는 인상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 표정하나 인사 한번 하는 것 상대방에게 활짝 웃는 미소 한번 짓는 것 이런 것이 다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온유함에는 어떤 절도와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친절하고 아무렇게나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참된 것 안에서 따뜻한 마음이 되는 것이 참된 온유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온유한 사람을 성경은 모세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2: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보다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그렇게 힘이 없고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낸 지도자였습니다. 
그를 보고 누기 힘이 없고 연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28-29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따뜻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몰아 부치기도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시고는 판을 지어 던지시면서 분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온유함이란 힘이 없고 연약해서 다른 사람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원칙을 지키면서 따뜻하게 대하는 것 그것이 참된 온유입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라고 했다고 아무에게나 어떤 일에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행동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닌 일에는 거칠게 항의하고 아니오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진리를 멸시하는 이단들 앞에서는 손을 털어 버리고 인사도 하지 말고 집에 들이지도 않는 그런 냉정함이 있어야 됩니다.

목사나 성도들을 대할 때는 쌀쌀맞게 하면서 세상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가족이나 부부 사이에는 쌀쌀 맞게 하면서 밖에 나가서 남의 부인에게 남의 남편에게 남의 자녀에게 아주 친절한 척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친절이 아닙니다. 참된 온유가 아닙니다.
때와 장소와 모든 일에 있어서 온유해야 할 때 온유하는 것이 참된 온유입니다. 

3.오래 참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함당한 삶을 살기 위한 기본적인 원리로 오래 참는 것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 만큼 좋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참을 인자가 셋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속에 있는 울분을 참지 못하면 끝내 살인도 할 수 있는 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다 안 좋다 하는 평가는 얼마나 많이 참을 줄 아는가 참지 못하는가 하는 것에 평가가 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라고 금방 해 버리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느낀 대로 솔직히 말해 버리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 같겠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나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다 나쁜점과 좋은점이 있습니다.
대부분 나쁜점이 더 많고 좋은점은 작습니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의 좋은점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좋은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참을 줄을 모르는 사람은 바로 눈앞에 많이 보이는 나쁜점을 말해버리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도 조금만 더 참으면 해결할 수 있는데 그 잠시를 참지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라톤 경주와 같은 것입니다. 
단거리 달리기처럼 금방 달리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평생을 달려가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는 꼭 인내가 필요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딘다는 각오가 없으면 중간에 포기하고 타락할 수 있는 기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좋을 때도 있고 때로는 나쁠 때도 있습니다.
은혜가 풍성할 때도 있고 메마를 때도 있습니다.
형통할 때도 있고 하는 일마다 꼬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비고비들을 참고 견딜 때 영원한 나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을성이 있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어떤 성도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참고 사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 방법은 없는데 그냥 참고 사세요 했더니 그러면 인내심을 기르게 해 달라고 기도라도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 사람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형제에게 환난을 주시옵소서 어려운 고통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더니 이 사람 발칵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얼른 성경 한 구절을 찾아 읽어 주었습니다.
롬 5: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환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했으면서도 이 인내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고 인내를 배운 사람은 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합당한 삶의 원리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겸손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자랑할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배려할 줄 아는 삶을 사시기를 바립니다.

온유한 성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참고 견디는 힘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길이 참으면서 이 신앙을 굳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오래 참을 줄 아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