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16)
본문 : 행 8:4-8
제목 : 빌립이 사마리아성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함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7장이 스데반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이라고 한다면 8장은 빌립이라는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록한 장입니다.
성경에는 빌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 사람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일먼저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스데반과 함께 사도들을 도와서 일을 하기 위해서 뽑았던 일꾼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빌립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구제를 위한 일꾼 혹은 집사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집사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7장에서 살펴본 대로 스데반도 구제의 일보다는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빌립이 사도 빌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서 본대로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교회에 핍박이 시작될 때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고 다른 성도들은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로 내려온 사람은 사도가 아니라 집사 빌립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파할 새
본문 4~5절에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흩어진 사람들이란 스데반의 사건으로 인해 교회의 박해가 시작이 되자 예루살렘을 떠나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지방까지 흩어진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흩어져서 숨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서도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흩어지다’라는 말은 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디아스페이로(διασπείρω)’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서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방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이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이방나라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 디아스페이로라는 단어는 스페이로(σπείρω)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이 스페이로는 “씨를 뿌리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마13:18)를 말씀하실 때 거기서 씨를 뿌린다는 말이 바로 이 ‘흩어지다’로 번역한 스페이로라는 단어입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이 온 유다와 사마리아에 흩여져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하셨던 그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과 같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모이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영광을 돌리고 흩어지면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하나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곡식의 씨를 뿌려 추수를 해서 감사를 드렸지만 오늘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의 씨앗을 뿌려서 그 복음을 듣고 알곡이 된 성도들을 보고 감사를 드리는 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감사할 일이 적습니다. 추수감사주일에는 이 복음의 열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시기 바랍니다.
1)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빌립이 사마리아에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온 유다로사마리아로 흩어질 때 빌립은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성은 이상한 성입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방인도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성은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으나 이방나라의 침공으로 인해서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여서 혼혈족이 되어버렸고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유대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혀 유대인과 관계없는 이방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비록 모세오경만 가지고 있었지만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성에 들어가셨을 때 우물가에 있던 한 여인을 만난 이야기가 성경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 역시 어디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때 그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도 유대교 지도자들도 하지 않은 선한 일을 사마리아인이 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에게도 필요한 것이고 어중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마리아인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더더욱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하고 또 어중간하게 그냥 교회에 왔다가 갔다가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성경을 알고 믿고 따른다고는 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지만 아직 복음의 진리를 모르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2)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면서 전한 것은 ‘복음의 말씀’이었고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전파한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결국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성도들이 전하고 전파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 이유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먼저 쓴 글에서 즉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과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일과 부활 승천하신 일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 나가는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기록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나라의 일이라고 하셨는데 그 하나님나라의 일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년에 우리교회 표어로 쓰고 있는 6장 7절의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라고 할 때 여기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점점 왕성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또 성경 말씀을 읽고 상고하면서 그리고 설교의 말씀을 들으면서 꼭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교회의 핵심이 성경의 핵심이 진리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한마디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그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복음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사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나가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역사 속에서 그 증거들을 충분히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복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펴볼 마음만 있다면 성경의 역사 곳곳에서 교회가 흘러내려온 역사 곳곳에서 또 우리 인간이 사는 역사 현장에서 이 증거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하나는 그 복음이 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복음을 믿고 그 복음과 함께 살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을 알기는 하는데 그 복음과 관계가 없이 사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놓치면 교회에 다니나 마나입니다. 성경을 읽으나 마나이고 설교를 들으나 마나입니다. 그것을 놓치면 수십 년의 신앙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리가 듣고 보고 따르더라.
본문 6절 말씀에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라고 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들은 무리들이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리가 들은 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복음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예루살렘이 살기가 어떻고 거기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으며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빌립이 예루살렘교회에서 경험했던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자신이 일꾼으로 뽑힌 일 일꾼으로 뽑혀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한 일이나 스데반이 붙잡혀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일 등 얼마나 말하고 싶은 자랑거리가 많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전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면서 말로만 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표적도 행하였다고 했는데 그 표적이 시시한 표적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쫓겨나가고 중풍병자와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걷게 되는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무리들이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또 표적도 보았는데 무엇을 따랐다고 했습니까? 복음을 잘 몰랐다면 복음을 시시하게 여겼다면 또 복음의 소중함을 알고도 세상의 욕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면 복음을 따르기보다 표적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표적을 더 보여 달라고 하든지 그 표적만 요구하지 않고 표적은 복음이 진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임을 알고 표적을 따르지 않고 복음을 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날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세상 욕심 때문에 복음을 무시하고 표적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복음을 전하기보다 자기 경험을 세상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합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삶에 기적이 일어나서 세상에서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고 저급한 신비주의자들은 기적을 일으켜서 세상에서 복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성공주의자들은 성경 말씀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왜 그런 것을 거부하느냐고 항의 합니다. 성경에서 기도해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중풍병자나 앉은뱅이 같은 중환자를 살렸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따라하지 말라고 하느냐고 항의 합니다. 이런 표적이 있어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 아니냐고 복음만 전해야 한다고 하는 우리들을 비웃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가를 살펴보십시오. 복음은 그저 하나의 들러리에 불과하고 기적을 일으켜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많은 기적적인 일들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충분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수많은 표적들을 남겨두고 계십니다. 과거에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아서 진리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말씀이 완전히 완성이 되어서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 표적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전하다가 전 재산을 잃고 전 가족을 잃고 목숨까지 잃는 순교를 당하면서도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새 사람이 되어서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이 바른 복음을 위해서 연구하고 연구해서 오늘날 우리가 쉽게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오늘 여기 이렇게 앉아 있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알 수 있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기적적인 역사가 아니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다 이 복음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본문 7~8절 말씀에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의 눈으로 볼 때 귀신이 들어서 생긴 병이 있고 귀신과 상관없이 생기는 병이 있음을 알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사탄의 졸개들이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와서 귀신들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정상적인 사람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또 당시의 불치의 병인 중풍이나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낫는 것을 보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환자들이 다 낫는 것도 아니었고 병에서 나았다고 늘 건강하게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기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기뻐한 것입니다. 이런 죄와 사망이 있는 세상에서 그래서 늘 아프고 늙어가는 세상에서 영원히 구원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절망에서 소망을 보았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절망적인 인생에서 소망의 빛을 보았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읽어도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뜻을 이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가서나 역사서나 선지서를 다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했는데 모세오경만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기뻤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만족주지 못할 것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물가에 있었던 사마리아의 여인처럼 그들도 만족주지 못할 이 세상의 일에 매달려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 그들에게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 기쁨이 이 은혜가 여러분의 삶속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복음을 듣고 따랐으며 그로인해 그 성에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과 전하는 우리들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