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2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15)
  본문 : 행 8:1-3 
  제목 :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긴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죽음이 기록된 7장이 끝나고 이제 8장이 시작됩니다. 8장은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여러 의미로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님 예수님께서 하신 복음전도의 말씀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을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대로 복음이 이제 예루살렘을 지나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까지 전파되고 있는 과정을 8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8장을 시작하면서 빌립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스데반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내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경건한 사람들이란 베드로사도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설교 했을 때 이미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유대교에 대한 그들의 열심 때문에 혹은 그들이 가진 기득권 때문에 복음을 거부했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이미 복음을 받았고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지내고 귀한 복음의 전도자가 세상을 떠났음을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데반은 더 고생을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서서 기다리시는 천국에 올라갔으니까 슬퍼할 일이 아니라 기쁜 일일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에 남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복음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복음을 잘 알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세상을 떠난 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갑게 맞으시고 사람들은 그가 떠남을 슬퍼하는 그런 죽음이어야 하는데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시고 사람들은 잘 죽었다고 기뻐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죽음을 헛되어 이 세상을 마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죽음을 더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관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성도들의 죽음을 헛된 것이 아니고 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성도들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위해서 귀하게 쓰고 계십니다. 스데반이 이 세상을 떠났고 그로 인해서 복음에 대한 핍박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그것이 복음 전파를 막는 것이 아니라 박해로 인해서 흩어진 성도들이 유다전역에서 그리고 사마리아와 세계만방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이야기가 끝났고 빌립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이 시점에서 한 사람이 이 이야기에 슬며시 끼어들고 있습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7장의 끝에 그리고 8장을 시작하는 순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앞으로 이방세계에 복음을 맡아서 전하게 될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눈여겨보는 것이 사도행전 후반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배운 로마서나 에베소서의 이신칭의의 진리를 이해하고 따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바울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의 진리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로마서나 에베소서 같은 서신서들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이 사울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유명한 바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우리는 7장에서 사울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모습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스데반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스데반의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사울의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7장 57절과 58절에 사울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이 사울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울의 이런 모습을 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어서 자기 과거의 야야기를 본인 스스로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소개함으로 더 확실하게 알게 했을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을 끌고 성 밖으로 와서 돌로 쳐 죽일 때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가진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 외에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만든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율법이 있으면 그 율법을 지키는데 필요한 세부 시행규칙을 만들어서 사용하듯이 유대인들도 성경에 기록된 율법 외에 미쉬나나 탈무드 같은 다른 시행규칙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우리가 상세하기 잘 모르기 때문에 본문을 이해하는 데 좀 어려운 장면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다른 신을 섬기라고 유혹을 하거나 또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두세 사람 이상의 증인을 세우고 증인이 그의 죄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먼저 손을 대서 치고 그 후에 거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레24:13-14, 신 17:6-7)

 

  그런데 증인이 옷을 벗어서 어떤 사람 앞에 두고 어떤 사람이 그 옷을 맡아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성경에 기록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아마도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가지고 있던 시행규칙에 이런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서 그 시행규칙대로 하나하나 잘 진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증인들을 통하여 증언하게 하고 그 증인들이 자신들의 증언이 참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옷을 벗어서 형 집행 책임자쯤으로 보이는 사람 앞에 맡기고 증인이 먼저 돌로 치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돌로 쳐서 죽임으로 스데반을 사형시키는 것이 합법적으로 사형시켰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증인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 증인들이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다 똑바로 율법을 행하고 율법에 명시되지 않는 세행규칙까지도 다 잘 지켜서 정말로 합법적인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합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합법적인 행동만 볼 뿐이지 그들 마음속에 있는 것은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증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합법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위장된 행동을 하는 거짓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 6장에서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제거하기 위해서 매수된 거짓증인들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니까 유대인들이 능히 당하지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매수해서 거짓증인으로 세워서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과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증언을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서 스데반을 붙잡아 오게 하고 공회에 세운 거짓증인 매수된 증인들입니다.

 

  자기들의 자리가 없어져서 밥 먹고 살기가 힘들어질까 염려하고 또 자신들이 누려온 온갖 영화와 권력의 기득권을 빼앗길까봐 염려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돈을 받고 매수된 거짓증인들이 합작하여 벌린 이 재판이 아무리 절차가 합법적으로 똑바르게 진행이 되었다고 해도 이 재판은 엉터리 재판이고 불법에 의한 재판일 뿐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거짓 증인들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들을 매수한 종교지도자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인용하고 합법이라고 강조하지만 그들 속에 숨은 거짓 때문에 욕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저급한 신비주의를 동원합니다. 그리고 거기 매수된 거짓 증인들도 동조를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고 싶어 하는 욕심이 성경을 가장하여 합법을 가장하여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 세상의 축복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거기 거짓 증인들도 동조를 합니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해서 복을 받았다. 나는 헌금을 많이 해서 복을 받았다. 나는 충성을 많이 해서 복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물론 그 복들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세상의 욕심을 채우는 복을 복이라고 충동하여서 사람들이 세상의 복을 소중하게 여기게 만들고 그로 인해 자기 자신도 세상 재물을 차지하려는 거짓 증인들입니다.

 

  참된 기도는 다른 사람들이 더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헌금과 참된 충성은 그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충성할 때 참된 기도요 헌금이요 충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율법을 행하고 선을 행할 것을 강조합니다. 많은 거짓 증인들이 거기 동조를 하여서 자신은 마치 모든 율법을 다 잘 지키고 선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처럼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똑바로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똑바로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율법을 강조해서 위선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심을 고백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악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그런 악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탐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매수된 몇몇 거짓 증인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는 것을 방해하는 엄청난 비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울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입니다. 이악한 일에 동조하는 것으로 바울에 관한 기록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물론 사울이 처음부터 증인을 매수할 때부터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사울이 청년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 아마도 그 사실을 모르고 동조한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젊은 혈기 때문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후좌우도 살펴보지 않고 무조건 따르는 청년 시절이었기 때문에 증인이 매수된 증인인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보지 못하고 그냥 사람들의 주장에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이 교회를 진멸할새

 

  본문 3절 말씀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잔멸”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잔멸(殘滅)이란 잔인할 잔(殘)자와 꺼질 멸(滅)자를 써서 “쇠잔하여 다 없어짐”이라는 뜻이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합니다.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교회를 다 없애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는 뤼마이노마이(λυμαίνομαι)라는 단어를 쓰는데 “난폭한 짓을 하다, 심하게 해치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기 이전에 기독교에 대해서 이런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조금 반대하고 조금 미워하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맹렬하게 교회를 반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나운 맹수처럼 달려들어서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집집마다 찾아가서 거기 모인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끝까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사울도 바울이 되기 이전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진리를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가 배운 곳이 유대교였고 그의 스승이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는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고 거기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나 이단으로 간주하고 죽여 없애야 된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배우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젊었을 때에 엉뚱한 곳에 가서 잘못된 것을 배운 사람은 평생 그 잘못된 것이 바른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잘못된 일에 열심을 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정말로 열심입니다. 바른 진리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열심도 내지 않고 그럭저럭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은 정말로 열정적으로 전도도 하고 자식도 남편도 다 버리고 전 재산 다 팔아 바치면서 충성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에게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구나. 그러기에 저렇게 열심이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있기는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기꾼들이 이용해 먹으려고 온갖 감언이설로 세뇌를 시켰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로 믿고 열심을 내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과거에 유대교에 이렇게 헌신적인 사람이었음을 공개하는 것은 당시에 그것이 교회에 큰 어려움이었지만 나중에 유대인들로부터 교회를 방어하는데 크게 사용을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나도 옛날에는 당신들처럼 생각한 사람이다. 당신들보다 훨씬 더 기독교를 반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감옥에 넣고 그들을 죽일 때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이었음을 이야기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본문 1절 말씀에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의 순교를 시점으로 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박해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극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도저히 거기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자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한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끝까지 남아서 그들이 받은 복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들마저 도망을 가버린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격이 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남아서 모진 박해를 견디며 끝까지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예언이자 명령인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부인하고 도망을 간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이주를 했고 거기서 그들이 가진 복음을 전함으로 복음이 세계만방에 펴져가는 이 귀한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복음만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살면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설교하면서 제목으로 잡은 것이 1절의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입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정당한 일로 생각했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사형을 당하는데 찬성표를 던졌고 조금도 안됐다거나 그런 생각이 없이 아주 잘한 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정말로 바르고 선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서고 그런 악한 일을 마땅한 일로 여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악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지도 그 일을 잘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마땅하다는 듯이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과 반대되는 이 세상의 복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도 그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슬며시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둥 예수님을 믿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야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따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 진리를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사울과 같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거짓선생들에게 잘못 배워서 엉터리로 알고 있는 것을 진리로 착각을 하고 따르는 사울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여기면서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이 진리를 마땅히 여기고 이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스데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마땅한 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사니까 세상에서 잘 사는 일에 더 열심을 내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시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이 진리 우리가 받은 이 복음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영원한 천국을 향해서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먼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