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17.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22)
본문 : 마 6:1
제목 :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신학을 말할 때 크게 두 가지 신학으로 구별을 합니다.
하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신학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본주의신학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인본주의신학이 좋아 보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인본주의신학이 바른 신학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가 철두철미하게 신본주의신학을 실천하는 교회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바른 신학을 가진 교단의 교회라고 해도 대부분은 사람을 중심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이런 인사들을 합니다.
인사를 하고 축복을 하는 것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하나님 중심이 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맞추려고 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설교를 할 때도 그 중심이 사람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고 다윗이 어떻고 하는 설교들이 잘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가 마치 사람의 행위를 칭찬하는 것 같아서 좀 좋지 않은 생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우리 교단의 사상을 철저히 따르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배나 찬송이나 설교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이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신본주의의 신앙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 거룩하신 그 전지전능하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이 이우주만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본주의를 신봉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인간들 중심으로 살려고 할 것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절대적으로 섬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만들어낸 신이라면 겉으로만 섬기는 척 하고 뒤로는 딴 짓을 하면서 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이우주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특별히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산상보훈이 기록된 마태복음 5장에 이어서 역시 산상보훈의 말씀이 기록된 6장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6장 1-18절에는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구제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그리고 금식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중요한 세 가지를 행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일 즉 구제, 기도, 금식을 행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의 즐거움을 위하여 하는 일은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인본주의의 신학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신본주의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사람에게 보이려고
오늘 본문 말씀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람에게 보이려고” 라는 말은 단순히 사람에게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하다가 보면 사람들도 알게 되고 또 칭찬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주의하라는 것은 일부러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것을 목적으로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보이려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율법을 행했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겉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척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실 때 가장 많이 쓰신 말씀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속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선한척하는 것이 가장 큰 잘못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버리고 그 형식에만 집착을 하는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비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릇의 겉만 깨끗하게 닦고 안은 지저분한 채로 남겨두는 외식주의를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속 보다는 겉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체면치레를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속은 그렇지 않아도 겉으로 좋은척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속내는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실속 있게 살기 보다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겉 치례에 많은 공을 들입니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고 큰 차 비싼 차를 선호하고 옷도 메이커를 좋아합니다.
물론 비싼 것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비싼 만큼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속이 없는데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겉 치례로 많은 돈을 낭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앙생활도 마음 중심보다는 겉 치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좋은 옷을 입고 정장을 하고 점잖은 모습으로 교회에 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배도 그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배를 순서대로 드리는가, 찬송가는 곡대로 잘 부르는가, 기도는 얼마나 유창하게 하는가,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이런 외형적인 것들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외형적으로 잘 정리되고 그 속에 마음도 같이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만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외모를 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 중심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름다운 악기로 찬양을 한다고 해도 거기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찬송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늘 본문 말씀에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를 행함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행하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 의로운 행동이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다음에 말하게 될 세 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구제를 하는 것과 기도를 하는 것 그리고 금식을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행하지 말아야 할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구제를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교회의 집사제도가 생긴 것은 이 구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는 반드시 행하여야 할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좋은 구제라고 할지라도 이 구제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처럼 중요하고 좋은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것 성도의 호흡과도 같다고 하는 이 기도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식도 성도에게 가끔은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금식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단 이런 것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의 모든 것 이 세상사는 모든 것까지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가식적인 것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외식적인 것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없이 그저 형식적인 의를 행하는 것은 그 때만 즐거울 뿐이지 남는 것은 없습니다.
복지를 하다가 보니까 제일 많이 하는 일이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는 일입니다.
근거를 남겨 두어야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무슨 사업을 하든지 철저하게 사진을 찍고 그 근거를 남겨서 보관을 합니다.
정치인들도 가끔 좋은 일을 하면 사진 많이 찍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 보다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척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사람에게 많이 보여주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달라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 주의하라는 말은 단순히 조심하라는 말 정도가 아닙니다.
항상 생각을 하고 이 일에 마음을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좀 조심을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의를 행하지 않도록 해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꼭 항상 집중을 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이런 일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잘 보시는 중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중심이 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척 해서는 안 되고 우리 마음의 중심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착한 척 해서는 안 되고 우리 마음 중심에 착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 있는 척 해서는 안 되고 마음 중심에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 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는 진실 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보시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이새의 집안에 보내서 그 집 자녀 중에 왕으로 세울 사람을 뽑을 때 건장한 그의 형들을 뽑지 않고 가장 나이가 어린 소년 다윗을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다윗이 비록 외형적으로 어려보이고 들에서 양이나 치는 양치기 소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중심에는 형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후일 그가 골리앗을 물리치는 장면을 보면 그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가려 하니까 큰형이 화를 내며 말립니다.
전쟁이 장난인 줄 아느냐 네 교만과 악함을 아니까 잘난 척하지 말고 그만 두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으로 용기 있게 말합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6-47)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형들의 거대하고 튼튼한 외형적인 모습을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 중심에 있는 그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의 외모를 봅니다.
예수님 믿은 지 몇 년 되었는지 직분은 무엇인지 충성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그런 외형적인 모습만을 봅니다.
우리는 속을 볼 수가 없으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판단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보통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속에 있는 믿음이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와 정 반대가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하고 문제가 생기고 시험거리가 생기면 겉으로만 믿는 체 한 외식적이고 가식적인 믿음이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가끔은 내 중심에 믿음이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정말로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중심에 있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3.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상을 받기는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이 중요한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는 칭찬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칭찬을 받아봤자 그 순간만 기쁘지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때는 오히려 조심을 해야 합니다.
칭찬의 기준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그들의 악한 마음에 기준에 의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그 기준에 의해서 칭찬을 받는 것은 내가 그들의 마음에 맞는 악한 말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왕에 상을 받고 칭찬을 받으려면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 앞에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의를 행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 보다 그 중심을 중요하게 여겨야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보여드리기 위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