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1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전 19)

  본문 : 딤전 3:3 

  제목 :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이번 코로나 19사태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직접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서 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많은 고통을 당하지만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도 활동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19가 어디에서 어떻게 인간에게 전파되었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박쥐에게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박쥐를 식용으로 먹는 중국 사람들 때문에 인간에게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박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부정한 짐승입니다. 레위기 11장 19절과 신명기 14장 18절에서 박쥐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것들이 좋은 것이지만 개중에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금지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좋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시고 금하신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박쥐를 먹지 않아도 먹을 것 참 많은데 그것을 가까이하고 먹으니까 이렇게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을 통하여 퍼져나가는 것을 봅니다.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신앙생활도 잘하고 착하게 살던 사람도 바이러스에 노출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에 코로나 19가 초창기에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이 이단의 무리인 신천지를 통하여 들어왔는데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훈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날뛰는 교만한 이단의 우두머리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이단이나 이단으로 보이는 집단들에 의해서 바이러스가 퍼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단을 따르는 사람들이 각성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술 마시고 춤추는 사람들이 모인 클럽이라는 곳에서 그것도 동성애자들이 몰려서 노는 클럽에서 이 바이러스가 퍼져나가서 학교 개교가 중단되고 다시 긴장 상태가 되었습니다. 술이나 동성애 역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감독이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까지도 지켜야 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성경에서 술이라고 할 때 보통으로는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가 그들이 마시는 대표적인 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술을 먹지 말라고 하지 않고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술 곁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인데 술에 취할 정도로 마시지 말라는 말입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는 말도 될 것이고 너무 자주 마셔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말라는 뜻도 될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말하기를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술을 먹지 말라고 글을 쓸 수도 있고 술을 먹으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술에 대해서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주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삭이 말년에 야곱을 축복하면서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 27:28)라고 했습니다.

 

  야곱도 말년에 열두 아들에게 축복하면서 유다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창 49:11-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도주를 주시는 것이 복이며 유다에게는 아예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고, 옷을 포도주에 빨고 눈이 포도주로 인하여 붉어질 정도로 포도가 아주 풍성하게 주시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 행한 이적이 결혼식장에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것이었습니다.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셨습니다. 물만 가지고 만드셨지만 맛은 사람들이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고 했습니다.

 

  포도주를 권하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잠 31:6)라고 했습니다. 죽을 정도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는 독주를 주고 마음에 근심이 많아서 고통스러운 자에게는 포도주를 주라고 했습니다.

 

  또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포도주를 쓰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라고 했습니다. 포도주가 위장병과 또 다른 병의 치료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들으시면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 됐다. 그동안 양심 가책이 되어서 술을 못했는데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한 잔씩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술을 금하고 있는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술에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는 말씀은 많이 있습니다.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잠 23:2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라고 했습니다. 

  술에 취하는 것이 방탕한 것이고 또 가난해지게 하는 좋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도만 아니라 술을 아주 악한 것으로 취급하는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술을 음행과 우상 숭배와 이단과 함께 악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는 술 취한 것을 우상 숭배나 음행과 같은 죄로 취급하고 이런 죄를 짓는 사람과 함께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더 겁나는 말씀은 술 취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10).

  

  술 취한 사람은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속여서 빼앗는 사람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술에 한 번 취했다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악을 행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이런 악행들이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한 상태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술에 대해서 때로는 관대하고 때로는 엄하게 해두었을까요? 술에는 그만큼 다양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술을 먹는가 언제 술을 먹는가 왜 술을 먹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끄럼을 많이 타고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술이 용기를 갖게 해줍니다. 당당하게 가서 자기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전에 대전에 있을 때 권사님 남편이 술을 좋아하고 교회를 잘 오지 않아서 애를 태웠습니다. 그런데 아주 적당히 술 두세 잔 마시면 용기를 내서 교회에 옵니다. 교회에 와서 아멘도 잘하고 주여도 잘합니다. 두 주님을 섬기지 말고 한 주님만 섬기라고 했는데 술을 한잔 마셔야 용기를 내서 교회에 옵니다.

 

  그런데 그 용기가 지나치면 평소에 감정이 있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겁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온순한 사람이 술만 마시면 헐크처럼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평소와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술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너무 딱딱하여 융통성이 없습니다. 뭐든지 원리원칙대로만 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양보하는 일이 없습니다. 남이 잘못한 일에는 아주 살벌합니다.

 

  목사 장로님이 모이는 노회나 교회의 당회나 제직회는 화기애애하고 사랑이 넘쳐야 할 모임인데 그렇지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이니까 화기애애하고 회의 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모든 일을 순조롭게 잘 처리합니다.

  

  그러나 큰 교회의 당회나 제직회나 그리고 노회의 모임에 가보면 법을 주장하고 원칙을 주장해서 법적으로 애매한 일들이 잘 처리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끔 혼자 이런 생각을 합니다. 노회의 모임이 세상 모임만 못하다. 세상 모임 같으면 뭐가 잘 안 풀리면 술이나 한잔하면서 서로 마음을 통하다가 보면 해결이 잘 되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귀한 것입니다. 외롭고 힘든 사람에게 용기를 가지게 하고 근심을 털어버리게 하는 좋은 것입니다. 몸에 질병이 있을 때 치료하는 치료제 역할도 하고 이웃과 불화를 털어버리게 하는 유익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금하는 것은 그런 용도 외에 술을 마시기 때문이고 적당히 술을 마시지 못하고 과음을 함으로써 오히려 이웃을 해롭게 하고 자신의 건강도 해치기 때문입니다.

 

  술로 인해서 오는 유익보다는 과음 때문에 오는 화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술 때문에 실수하고 사고를 저지르고 술 때문에 죄를 짓고 술 때문에 병이 생기고 술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서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술로 인한 엄청난 불행을 알면서도 눈앞의 작은 기쁨 때문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짓입니다. 한 잔만 먹고 안 마실 것으로 생각하고 시작하지만 술은 중독성이 있어서 술이 술을 계속 마시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술은 마시지 않았으면서도 술을 마신 것처럼 마음이 훈훈한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5장 18절의 말씀처럼 술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방탕함에 빠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술 취한 사람처럼 용기 있고 훈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술 취함이 주는 좋은 것들을 더 충분하게 줍니다. 마음의 불안이 없어지고 남을 의심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사랑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여기 구타하지 않는 것이나 관용하는 것이나 뒤에 나오는 다투지 아니하는 것은 비슷한 말입니다. 구타한다는 것은 난폭한 싸움을 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먹질을 잘하고 폭력을 잘 휘두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폭력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언어의 폭력도 안 되지만 육체적인 폭력을 행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어야 하고 다툼의 대상이거나 폭력을 행하여야 할 그런 대상은 더욱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은 많이 싸우고 많은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부모들이 자녀를 구타하고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제일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런 폭력적인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영화나 연속극들이 폭력적인 장면이 너무 많고 게임을 해도 난폭한 것을 주제로 게임을 합니다. 그런 폭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남에게 맞고 오는 것을 싫어해서 싸우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태권도나 합기도나 복싱 같은 운동을 가르쳐서 남에게 맞지 않고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운동을 배운 사람이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싸울 줄 무르면 그런 자리를 피해버리고 마는데 싸움할 줄 알면 덤비고 싸웁니다.

 

  오히려 관용하라고 했습니다. 온유하며, 합리적이며, 친절하며 동정심이 많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은 일에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라는 것입니다.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않는 것과 다투지 않는 것은 다 같이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구타하지 않는 것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다투지 않는 것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다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유난하게 손익과 관계되는 일에 민감해서 자기의 것을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많이 다툽니다. 자기 것을 빼앗기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익을 얻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이익을 챙기려고 하면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간에는 내가 적게 가지면 우리 형제가 많이 가지는 것이기에 그렇게 지독하게 이익을 챙길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좀 희생하면 우리 형제자매가 이익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돈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며 돈을 움켜쥐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거기 너무 얽매여서 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욕심은 우리를 살게 하는 소중한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열심히 일도 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들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없는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신도 남의 신세를 져야만 먹고 살고 자신의 가족들도 어려움을 당하게 한다면 그것은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책임한 사람이고 게으른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이 너무 심하게 되면 다툼이 일게 되고 미움을 받게 되고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고보서 1장의 말씀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라고 했습니다. 지나친 욕심은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죄가 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은 돈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보다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순간 그 사람은 거짓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이 세상 출세나 돈을 버는 목적이 된다면 그 순간 진리는 사라지고 천국 복음은 사라져버리기 마련입니다.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용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술을 즐기지 말아야 합니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여 이권을 위해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죄를 짓게 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