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6.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전 16)

  본문 : 딤전 2:11-15  

  제목 :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1.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섬기면서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최우선적으로 따르는 나라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는 그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직은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좀 완전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나라입니다.

 

  반면에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세상의 나라입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 인간의 뜻을 따라서 세운 나라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인간이 잘되게 하고 인간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게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나라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아무리 서로 협력하여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나라는 되지 못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돈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뜻을 따르게 하기 때문에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비교적 불행한 나라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대책이 없습니다. 그동안 의술이 발달해서 많은 불치병이 정복되고 인간의 평균수명도 다소 늘었지만 조금 더 살다가 결국은 병들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만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도 환경도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할지라도 결국 자폭해서 없어져 버릴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어쩔 수 없이 이 세상 나라에 속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알고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임시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상 나라의 원리나 법칙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잘못된 것처럼 보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따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 법칙에 따르면 이해가 되지 않고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고 오히려 여자들이 더 힘이 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여자들은 순종하고 조용히 지내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특별히 여자들에게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질서원리가 우선이라는 것을 알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본문 11~12절에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현대 사회에서 바라본다면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본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말씀이고 현대인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문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진보주의 사상을 가진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본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이 없는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 다행스럽게도 미국 장로교와 함께 보수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선교사들에 의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이미 이 자유주의 사상이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자유주의 사상이 문제가 된 것은 1934년 23회 총회 때 있었던 김춘배 목사의 여성 치리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김춘배 목사는 기독신보에 기고한 글을 통하여 오늘 본문의 여자는 가르치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것은 2천 년 전 한 지방교회의 풍습에 불과한 것이고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총회에서 이것을 문제 삼아 박형룡 박사 등에게 연구하여 보고하라는 결의를 했고 연구결과 김춘배 목사의 주장은 자유주의적인 사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치리해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결국 김춘배 목사가 이 글을 취소하고 사과함으로 일단락된 사건이었지만 역사가들은 이때부터 한국교회에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침투한 시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수주의 혹은 개혁주의라고 부르는 신학을 가진 교단에 속해있습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시대가 달라도 하나님의 법칙은 그대로 유효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 길이 더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배우라”고 했습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고 배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이고 살아가는데 편리합니다.

 

  특별히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나 활동을 할 때 주로 남자들이 앞에 나와서 예배를 인도하고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합니다. 그럴 때 여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고 배우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앞 절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하고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과 좀 다릅니다. 당시에 여자의 지위는 오늘날 같지 않고 남자와 차별을 두었습니다. 여자는 숫자에도 넣지 않았고 공부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했고 바보로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했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의 견해와는 달리 여자들을 남자들과 동등하게 구원의 대상으로 보고 가까이 해주셨습니다. 여자들을 열두 제자 중에 넣지는 않으셨지만 많은 여자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문제는 당시의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성경을 많이 배우거나 남을 가르칠만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가르칠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배워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신분은 남자들과 동등하게 상승했지만 가르칠만한 위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가르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친다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 다 엉뚱한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사회나 교회나 그 단체를 이끌고 갈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지도자가 되어서 가르치고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본문 13~14절에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가르쳐서는 안 되고 조용히 배워야 하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순서가 남자가 먼저이고 여자가 나중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여자가 먼저 속아서 죄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후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먼저 남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으셔서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의 갈비뼈를 꺼내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는 좀 강하고 여자는 좀 연약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돕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런 원리가 항상 적용되어서 남자는 앞장서서 큰일을 하고 여자는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항상 뒤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남자들 앞장서서 나가는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여자를 무시하던 구약시대의 드보라 라는 여자는 사사와 선지자의 역할을 잘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때도 유명한 설교가인 아볼로를 데려다가 가르친 브리스길라라는 여자가 있었고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인 자매 뵈뵈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 유오디아, 순두게, 마리아, 드루배, 드루보사 등의 일꾼도 여자였습니다.

 

  여자들 중에는 남자들보다 더 믿음이 좋고 더 많이 알고 더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보다 앞서서 리더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가 먼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남자보다 더 감성적으로 창조하신 것 같습니다. 남자는 누구를 잘 믿지 않지만 여자들은 잘 믿습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여자들이지만 잘못된 이단의 교리에 잘 넘어가는 것도 여자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주신 특성에 의해서 각각 자기에게 맞는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늘 놀면서 사랑이나 받는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앞서서 힘있게 일하는 남자를 부러워하는 여자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로 여자가 남자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질서나 특징이 그렇다고 해도 때로는 남자가 할 일을 여자가 하기도 하고 여자가 할 일을 남자가 할 수도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성격에 따라서 조금씩 그 능력이 다른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대로 서로에게 맞는 역할을 잘해나가면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질서를 깨트리면 모두에게 불행해질 뿐이며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본문 15절에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숙함이란 단정, 절제, 진지, 분별력 등으로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 앞 절에서 말한 여자가 속아서 죄에 빠졌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유혹에 넘어가서 죄에 빠지지 않고 감정을 절제하여 바른 분별력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진리를 아는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고 믿음을 가진 자답게 구별된 삶을 살게 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남을 가르치고 지도자가 되고 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죄에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자가 유혹에 넘어가서 타락하게 되어 죽게 된 그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 구원은 교회의 지도자가 되거나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앞장서서 일을 함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은 오직 믿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본문 중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해산하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자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조건에 순종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를 낳아서 양육하는 일을 잘 감당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여자는 해산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하나 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 죄가 엄청난 것이어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해산하는 고통을 통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흉악한 죄를 범한 여자의 후손이지만 그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 하지만 죽음에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분별력을 통해서 복음의 진리를 알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믿음을 따라서 구별된 삶을 살게 된다면 비록 어떠한 죄를 짓고 어떠한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에서 여자들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일체 순종함으로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고 여자가 유혹에 잘 넘어가는 습성을 가졌기 때문에 남을 가르칠 수 있도록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하게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따라 살면 비록 그런 연약한 여인이라고 할지라도 구원을 얻는 데는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지도자가 되어서 남을 가르치는 일보다는 바른 진리를 잘 배워서 믿음을 가지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교회에 와서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