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2. 부활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부활20-01)

  본문 : 고후 1:8-10

  제목 :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라.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최근에 존 파이퍼라는 개혁주의 목회자가 쓴 “내가 바울을 사랑하는 30가지 이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분은 저보다 더 바울을 좋아해서 60여 년 동안 바울서신을 통해서 바울에게 배우고 바울을 본받으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저도 20여 년 동안을 바울 서신서를 강해 설교하면서 바울에게 배웠습니다. 저는 바울보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랑하고 그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제가 이 주제로 책을 다시 쓴다면 제목을 “내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랑하는 30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바울보다는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파이퍼 목사님이 바울을 사랑하는 이유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도 물론 복음을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지만 복음을 믿는 바울의 삶을 통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전하기만 하고 자기는 복음과 관계없는 삶을 살았다면 그가 전한 복음을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이 신뢰하고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일부 극소수의 사람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지만 대부분이 이 부활을 교회의 가장 핵심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얼마나 부활을 믿는 사람처럼 사는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믿는 것처럼 살지는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든지 정말로 믿기는 하지만 바울처럼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위대한 믿음의 핵심은 부활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나 고난의 삶이나 죽으심이나 모든 것의 목적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부활을 위해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가 매주 토요일인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일요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고 일요일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라고 하며 주일이라고 합니다.

 

  매 주일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일 년에 한 번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을 기념하여서 부활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활을 잊지 않고 부활을 믿고 기다리면서 살라는 뜻으로 부활주일을 지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부활 신앙을 볼 수 있는 본문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고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라”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고 부활시킬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계시고 우리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다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본문 8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였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고통도 한두 번이면 참고 넘어가겠지만 수시로 고통을 당하였고 그의 삶 전체가 고통스러운 삶이었습니다.

 

  그가 당한 고통이 한두 가지라면 다시는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이라도 하겠지만 셀 수 없는 여러 가지 고통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쫓겨 다니는 일, 매를 맞고 돌에 맞는 일, 붙잡혀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일,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는 일,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는 일.... 이런저런 고통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심한 고난을 당해서 살 소망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했고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거기 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이 바울 자신이 당한 고통을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고생했다는 것을 알아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해서 너희들이 복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나의 노고를 알아주고 감사하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이유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고 부활의 생명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한 것을 보면서 우리도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에 고난을 각오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은 고난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고난을 받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이 복음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순교를 자청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거저 주신 것이지만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일부러 주시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탄의 세력이 우리를 그냥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우리의 육신이 수시로 죄의 길로 가려고 하고 믿음을 포기하려고 하고 이 세상에서 재미있게 사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수시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연약한 우리가 고난을 통하여 훈련을 받으면 더 강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이 힘들다고 외면하고 피하면 믿음이 점점 연약하여집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당하면 고난 당할 때는 힘들지만 고난을 이겼을 때 우리는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엄청난 훈련을 받습니다. 그 훈련을 통하여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군과 용감하게 맞설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훈련이 없다면 전쟁이 일어나면 도망가기 바쁠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전 세계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생전 처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제지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이렇게 예배라도 드리지만 대형교회들은 전 교인이 가정에서 영상을 보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몸이 허약해서, 열이 있거나 외국에 다녀오거나 환자와 접촉한 것 때문에, 일하는 직장의 특수성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믿음이 없거나 겁이 많아서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가기 싫은데 잘 됐다고 하면서 핑계 삼아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번 코로나 19사태를 통하여 믿음이 없거나 연약한 사람들이 사태가 끝나도 교회를 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는 연약한 교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방해할 많은 세력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믿음은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쉽게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마치는 그날까지 이 믿음은 포기해서 안 됩니다. 누가 육신의 목숨을 빼앗아간다고 해도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어려움을 당할 때 조금씩 이기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자꾸 움츠러들기 시작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더 힘을 내고 더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담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9절 말씀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특별한 일을 하는 바울 같은 사람에게 고난이 없으면 더 일을 잘하고 많이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고난이 백해무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그것도 이렇게 극심한 고난이 있는 것은 고난을 통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죽이는 고난이 와도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 걱정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성도에게서 가장 큰 능력에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늘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를 의지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구약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늘 그런 것을 중심으로 역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항상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스스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노아 홍수의 사건도 결국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타락한 인생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홍수 후 바벨탑 사건도 하나님의 홍수심판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노아 홍수처럼 온 세상이 물에 잠긴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높은 탑을 세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았습니다. 온 인류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언어가 갈리고 각 언어를 따라 흩어져서 살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하는 척박한 가나안 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살 수 있는 애굽을 택한 것입니다. 그 형벌로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이나 인간의 지배를 받고 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셔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라는 특별한 나라를 그들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며 자기들 마음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이웃 나라와 전쟁에서 대다수 죽임을 당하고 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 강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수금을 나무에 걸고 옛날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시편 137편 1절 이하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라고 했습니다.

 

  그런 악한 인간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기회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하여 죄에서 멸망에서 구원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인간들은 그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스스로 행복하게 살려고 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만들어주시고 거기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해주셨지만 인간들은 그 나라를 믿지 않으려고 하고 오직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자유롭게 잘 살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죄이니 구원이니 천국이니 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우리들을 어리석은 바보라고 비웃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생각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필요 없고 하나님의 간섭은 받을 필요도 없고 자기들 마음대로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일까요?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무시할만한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모든 힘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대항할 수 없는 엄청난 분이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코로나 19 사태를 우연히 일어난 재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이 박쥐를 먹는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죄에 대한 징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의 구원을 전하지 않고 세상 복음 잘못된 진리를 전하는 데 대한 하나님의 분노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전에서 목회하시는 선배 목사님이 말라기서 2장 3절의 말씀으로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라는 제목으로 코로나 19 사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며 회개해야 한다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형식적이고 가식적으로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의 얼굴에다가 희생제물로 바쳐진 그 짐승의 똥을 발라서 내치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예배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인간의 기분에 맞추고 자기들 마음대로 드리면서 하나님을 오히려 경멸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천국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 철학 성공학 이런 것을 설교라고 하고있는 강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들끼리 연합하고 협력하여 스스로 잘살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간들끼리 서로 협력하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도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도 오히려 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19는 그런 인간의 생각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뭉치고 하나가 될수록 더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19사태를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아닌가 하고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본문 10절 말씀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렇게 엄청난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건져 주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그렇게 지켜주시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서 장래에도 건져 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언제 순교를 당할지 모르는 위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비록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도 다시 살려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구원과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오히려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키고 맡겨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말로만 부활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진실로 부활을 믿었으며 부활을 믿는 자답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을 끝까지 잘 담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신 날입니다.

 

  우리도 부활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수 있으시고 다시 살려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형편이나 환경들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