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8.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전 10)

  본문 : 딤전 1:18-20  

  제목 :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18.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제가 항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제일이고 오직 그 복음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것이 성경의 핵심이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자주 드리는가 하면 이단이나 거짓 선생들이 믿음 외에 다른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가 아니고 자기들이 따르는 교주가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이단들이 있는데 통일교 문선명, 신앙촌 박태선, 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그리고 신천지 이만희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 외에 엄청 많이 있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로 따지면 이 사람들이 대표적인 이단입니다.

 

  문선명이나 박태선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인데 하나님이라는 사람이 죽고 말아서 그들이 사기꾼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잡신이거나 잡신이 들린 사람이라면 몰라도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닙니다.

 

  정명석이나 이만희는 자신이 하나님은 아니고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 말도 틀린 말입니다. 구원자는 하나님이시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할 때 우리가 잘 아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배울 때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이들인 성자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구원자가 되신다고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이렇게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는 많은 것이 따릅니다. 믿는다는 말 자체만 가지고 말만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는다는 말이 진실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도 있어야 하고 회개란 사탄을 떠나서 하나님 편으로 돌아오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디모데전후서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신앙인으로서 또 교회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과 함께 가져야 할 것이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착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착한 양심이 무엇인지 왜 착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본문 18절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신앙을 가르쳐주고 직분자가 되게 했기 때문에 육신의 아들처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니까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보다는 웬만하면 서로 사이좋게 평화롭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뭘 얼마나 살겠다고 그렇게 싸우면서 삽니까 대강 적당히 서로 이해하고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선한 싸움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움을 선하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선한 일인가 악한 일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데,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인데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워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움에 있어서 두 가지의 무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라는 말에서 ‘교훈’과,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에서 ‘예언’이 선한 싸움을 싸움에 있어서 가져야 할 무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이 교훈으로서 명하노니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바른 교훈을 따르느냐 바른 교훈과 거리가 먼 거짓 교훈이나 다른 교훈을 따르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배운 교훈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 교훈이 바른 교훈인가 거짓 교훈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하면서 그 명령하는 근거를 “이 교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은 11절의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라고 한 그 교훈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이 교훈으로서 명하노니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는데 이 교훈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른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고 어떤 것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 교훈은 복음을 따라서 복음에 근거해서 나온 교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교훈이 복음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대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을 따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대주의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인정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그런 교훈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도 마땅히 행하고 따라야 할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예언이라는 말처럼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도 잘 없습니다. 예언을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 미리 하는 말을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예언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의 핵심은 오실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장차 일어날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말씀해주셨는데 그 중심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입니다.

 

  신약성경의 예언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일어날 징조들 다시 오시면 일어날 일들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언이라는 말을 쓸 때는 주로 교회에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가르치는 교훈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예언을 방언과 비교해서 말하기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고전14:3)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14:31)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보면 본문에서 예언이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한 설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설교가 인간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할 때에 그것을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복음에 대해서 배우고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교훈을 배웁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목회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듣습니다.

 

  이 바른 교훈과 바른 예언의 말씀을 따라 선한 일이 무엇인가를 구분하고 선한 일을 따르기 위해서 바른 교훈을 따르기 위해서 투쟁해야 합니다. 이런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는 이단들이나 거짓 선생들과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구원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오직 믿음이 아닌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다, 재림 주다, 구원 자다라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자신이 평화주의자를 자처하고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이런 엉터리 이단들을 거짓 선생들을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을 용납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대항하여 싸우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본문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싸워서 쟁취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바른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그 믿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와서 수고하는 모든 것들이 다 헛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함께 가져야 할 것이 착한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착한 양심이란 앞서서 살펴본 바른 교훈과 예언을 따라서 가지게 되는 양심을 말합니다.

 

  사람마다 양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그 양심은 사람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가 다 자신은 양심을 따라 산다고 말은 하는데 모든 사람이 다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그 양심이 잘못된 양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자라고 누구에게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서 양심이 결정됩니다. 사람이 자신이 자란 환경이나 배운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선한 양심이란 바른 교훈 바른 믿음 바른 예언을 따라서 형성된 양심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서 나온 양심이 바른 양심입니다. 복음을 따라서 나온 바른 교훈에서 나온 바른 양심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은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도 성령님이시고 우리 마음에 착한 양심을 주시는 분도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 진실된 믿음이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 성령님께서 오셔서 바른 믿음을 알게 하심으로 고백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만 진실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신앙고백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성령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착한 양심을 가지고 살도록 역사하십니다. 칭의에 이르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살게 하는 성화를 동시에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바른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이 진실한가 아닌가는 잘 모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한 양심을 따라 사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삶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진실한 고백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읽습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합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기 위해서 매주 교회에 와서 예배시간을 통해 설교를 듣습니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서 착한 양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착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지 못할 때 사탄이 그 틈을 노립니다. 이단들이 우리의 착하지 못한 삶을 비난하고 사람들을 빼앗아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양심을 버린 사람들이 결국은 믿음도 버렸다고 했습니다. 착한 양심을 따라 살지 못하는 사람이 결국은 믿음도 버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착한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착한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면 세상은 좀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착한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이 세상의 삶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착한 양심을 따라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삶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금방 변질 됩니다. 무엇이든지 실천이 있어야 되고 삶이 있어야 됩니다.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이 변함없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그동안 행한 열심 때문입니다. 그렇게 충성을 다하고 이제와서 그만두고 나온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의심이 밀려오기도 하고 또 이런저런 유혹을 받으면 마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럴 때 신앙생활에 열심히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런 한 일도 없이 그냥 교회만 왔다가 갔다가 한 사람은 싫증 나면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을 낸 사람은 그 열심으로 그런 위기를 넘길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열심이 있는 사람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믿음도 있고 착한 양심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본문 20절에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지 못함으로 믿음에서 파선된 사람 두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본문을 통하여 잘 알 수 없습니다. 같은 이름이 다른 본문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이 두 사람은 착한 양심을 가지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착한 양심을 따라 살지 못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원래 그 믿음조차도 바른 믿음이 아니었는지 잘 모릅니다.

 

  믿음이 가짜라서 착한 양심을 가지지 못했든지, 믿음은 있는데 착한 양심을 따라 살기를 거부한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그들이 받은 처벌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사탄에게 내어준 것이 저주를 내려서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탄의 종이 되게 해서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징계를 내려서 사탄이 주는 질병이나 어떤 고통을 통하여 깨닫고 돌아오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같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하지 않으면 그 믿음이 가짜라서 다시 사탄의 종이 되든지 믿음이 진짜라고 한다면 징계로 인한 고통을 통하여 깨닫고 착한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한 양심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면 그러면서도 아무 일 없이 잘살고 있다면 내가 고백하는 믿음이 가짜 믿음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진짜인데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징계를 받아서라도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징계를 당하고 고통을 당한 후에 바르게 살려고 하지 말고 미리 자신을 살펴서 착한 양심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징계한 이유를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조금 잘못하고 사는 것은 그렇게 큰 죄가 되지 않습니다. 회개하면 되고 또 마음 고쳐먹고 잘 살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그런데 신성모독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입니다. 다른 죄는 좀 짓는다고 하더라도 신성모독 죄를 저지르면 절대 안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단들 자기가 구원자라고 하는 이단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가장 큰 죄는 신성모독 죄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보다 인간의 행위를 앞세우는 것도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방법밖에 없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신성모독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귀한 선물인 복음을 무시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는 일이 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착한 양심과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착한 양심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 믿음마저도 잃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과 함께 착한 양심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착한 양심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