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8a.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전 41)
  본문 : 딤전 6:1-2
  제목 :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1.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16세기에 종교개혁을 하기 이전에는 교회가 우리가 말하는 천주교회였습니다. 로마 가톨릭이라고 하는 천주교회가 유일한 기독교회였습니다. 그 시대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미 초대교회의 복음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구약 성경 66권의 하나님 말씀보다 교황의 말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칭의의 교리보다 인간의 선행이 구원을 받는다는 이행득구의 교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도 스스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의에 이르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던 사람들이 로마서에 있는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구원의 교리를 발견하고 잘못된 교리를 가진 교회를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이나 루터같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잘못된 로마 가톨릭교회를 개혁하여 오늘날의 개신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천주교에 가지 않고 이렇게 개신교회에 온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가 교회를 개혁한 지 오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이 점점 달라지고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다시 개혁 이전의 천주교로 돌아가서 그 잘못된 신학과 신앙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서구의 많은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선행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보다 인간의 선행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해서 다시 타락했던 중세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중심의 사상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인간 스스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만듦으로써 교회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기보다는 인간의 복지 인간의 평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서 세상 종교 중의 하나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보다는 여성 해방운동, 노동자 해방운동, 소외된 자나 가난한 자를 그 어려움에서 구원해내는 일에 중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주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성 소수자들 까지도 그들을 정당화시키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노력으로 모든 사람이 다 공평하게 잘 사는 평등한 나라를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만들고 심지어 공산주의까지 만들어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공평한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서 시행한다고 해도 그 제도를 따르는 인간들의 마음이 부패해 있기 때문에 그런 제도를 잘 따르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그 힘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그 머리로 법을 활용하거나 악용해서까지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부조리를 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상전이 있고 그 상전의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도 상전과 종들이 함께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세상에는 상전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종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세상의 신분 차이가 있는 성도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본문 1절에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는 신분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이나 노예가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양반이나 상놈이 있었고 요즘도 경제나 직업에 따른 눈에 보이지 않게 구별된 신분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이런 신분제도가 아주 뚜렷하게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신분의 차이가 상전과 종일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종을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짐승처럼 멍에를 메고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이런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이 인구의 거의 절반 내지 삼 분의 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시대는 로마가 유럽의 전 지역을 지배하는 나라였습니다. 로마가 다른 나라를 점령함으로 점령을 당한 나라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서 종으로 사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먹고 살기 어려워서 남의 돈을 빌렸다가 못 갚았거나 남에게 손해를 입혔거나 죄를 지어서 종이 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종들의 가장 큰 소원은 그 종의 멍에를 벗는 것이었습니다. 종으로 사는 것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종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종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 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연히 종노릇 하는 데서도 구원해 주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떼를 쓰든지 주인에게 나는 자유인이 되었다고 항의하든지 도망가든지 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상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범사에 모든 일에 마땅히 공경할 사람으로 여기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사람이 종으로 사는 것을 보고 마음이 평안하셨을까요? 하루라도 속히 종의 멍에를 풀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거기서 나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상전을 섬기면서 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제도를 바꾸시거나 모든 사람이 잘살 수 있는 나라로 바꾸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은 각기 주어진 대로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그런 세상을 만드시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뒤엎어서 상전을 다 제거하고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을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그 반란을 막으려고 할 것이고 복음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현재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그런 큰일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종은 종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영원한 천국을 기대하고 살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그때처럼 꼭 복종해야 할 상전이 있거나 멍에를 메고 살 종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무상 사용자가 있고 종사자가 있습니다. 종사자들 가운데도 이사니 부장이나 과장이니 평사원이니 해서 상하의 구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구별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하기 때문에 상하 구별을 없애고 자기 마음대로 하기 시작하면 이 세상의 질서가 엉망이 되고 말것입니다.

 

 

  상하 구별이라는 것이 인격의 상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무상의 상하를 말합니다. 일을 떠나 회사 밖에 나오면 똑같이 다 평등한 사람들이지만 일을 할 때는 직무상으로 그 상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주로 사용자 편에서 일한 사람이라서 회사나 단체의 대표는 참 어려운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의 사장이나 복지시설의 대표나 심지어 교회의 담임목사까지도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은 참 외롭고 힘듭니다. 일이 잘못되면 모든 책임을 져야 하고 대재벌이나 엄청나게 큰 교회가 아닌 이상 대표의 자리는 참 힘듭니다.

 

 

  제일 힘든 것은 사장이나 대표를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직원들을 착취나 해서 잘 먹고 잘사는 사람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사업주 가운데는 그런 악덕 업자도 있고 복지시설이나 교회의 목사도 불법으로 운영하고 자기 마음대로 돈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려운 가운데 많은 것을 투자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젊어서 회사를 운영해보았는데 재산도 많지 않았지만 논을 팔아서 빚을 내서 힘들게 회사를 차리고 회사를 키워보려고 애를 썼는데 그런 희생도 없이 월급만 받아가는 직원들이 그런 사장을 우습게 보고 노고를 알아주지 않을 때 참 서글펐습니다.

 

 

  아동센터도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참 어렵게 시작했습니다. 친척에게 돈을 빌려서 사무실을 얻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후원을 받고 사재를 털어서 어렵게 운영을 했습니다. 다행히 나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서 지금은 아쉬운 대로 직원들 월급도 주고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할 때는 월급도 받지 못했고 조금 받을 때는 다시 후원금으로 넣어서 월세 맞춰주고 했습니다. 지금도 정부에서 지원하는 돈으로 운영을 못하기 때문에 아는 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아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에 한 번 교회에 다니지 않은 사람을 직원으로 썼는데 제가 엄청나게 무시를 당했습니다. 옛날에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운영을 한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돈이나 착취해가는 악덕 복지사업가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뭘 했다고 시설의 대표처럼 행세하고 저는 무시를 당하고 나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때 감히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해서 우리에게 주셨는데 피조물인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이 왕처럼 주인처럼 생각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고 원망이나 하고 불평이나 합니다.

 

 

  아주 작은 이런 시설하나 만들고도 감사하는 마음 없이 불평하니까 마음이 화가 나고 서글픈데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버르장머리 없게 대할 때 얼마나 기분이 나쁘시겠습니까?

  나 같으면 다 쓸어 없애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 속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시고 참으시니까 이렇게 세상 사람들도 사는 것이지 우리가 없으면 세상을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회사에 다니시는 분들은 기업주가 좀 나쁘게 보이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기업 하기가 참 힘들 때입니다. 저는 기업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바보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채용해서 일을 시킨다는 것이 매우 힘 드는 때라서 웬만하면 가족끼리 하고 맙니다.

 

 

  그들은 그런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 전 재산을 투자하고 죽기 살기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회사에 몸을 담고 있는 한 그런 마음을 이해하시고 최선을 다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본문 2절에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라고 했습니다.

 

 

  종 된 사람의 상전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세상 사람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성도일수도 있습니다. 1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상전을 대하는 법이라고 한다면 2절은 교회에 다니는 상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 형제자매들입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믿지 않는 세상의 상전보다 더 잘 섬기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나쁜 상전도 잘 섬기는데 교회 안에 있는 상전은 더 잘 섬기는 것이 도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상전이 역시 그리스도인이 된 종을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종이 아니고 남의 종이기 때문에 자유를 줄 수 없었을 것이고 자신의 종이라고 해도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었을 때 그 종이 스스로 살아갈 방법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라고 했습니다.

 믿는 상전이 있으면 더 잘 섬기라고 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섬김으로 인해서 유익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유익을 받고 사랑을 받는 자가 누구인지를 문장을 보아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잘 섬김으로써 상전에게 유익이 되고 상전이 사랑을 받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잘 섬기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상전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는 말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다 해당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종이 상전을 잘 섬김으로써 섬김을 받는 상전에게도 유익이 되고 섬기는 종에게도 유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종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힘들게 일하고 사장은 놀고먹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적은 돈을 받고 사장은 돈을 많이 벌어간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사장은 더 어려움을 당하고 가져가는 것 없이 빚만 느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장이 망하지 말아야 종업원도 계속 일할 수 있으므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사장 돈 버는 꼴 보기 싫다고 아무렇게나 하면 나도 같이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장이 잘 되는 것이 나도 잘 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면 당연히 사장이 유익해지고 사랑을 받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사장을 잘 섬기는 것이 사장에게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전을 잘 섬길 때 상전도 사람인 이상 그 충성심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대우해주지 않는 나쁜 사람도 혹 있을 것이지만 대부분은 그 충성스러운 직원을 더 사랑하고 더 유익을 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상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종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서로의 자리를 인정해주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상전이 된 자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잘 되도록 그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살도록 잘 대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상전에게 최선을 다해서 잘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상전에게 또 낮은 자리에 있는 자신에게 함께 유익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