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8.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9)

  본문 : 딤후 2:3-6

  제목 :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
 

 

 “3.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을 주신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이 세상이 끝나서 결산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이 없이 영원한 천국 백성으로 분류되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사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고난도 없이 훈련도 없이 그냥 평안하게 살다가 천국에 갔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지만 그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 때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이나 훈련 같은 어려움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믿음으로 살기가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고 사탄의 세력들이 믿음을 가진 사람을 시기하고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돈이 없으니까 이렇게 평안하게 삽니다. 집안에 아주 튼튼한 금고 같은 것 만들 필요도 없고 대문도 대강 허술하게 해도 되고 누가 빼앗아 갈까 봐 염려할 필요도 없이 삽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현금이 수천억이 있고 금괴가 수천억이 있다고 하면 부자라서 뭐든지 마음대로 살 수 있고 돈 걱정 없이 살겠지만 누가 훔쳐 갈까 봐서 더 큰 걱정을 하고 살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은 어차피 그렇게 살다가 지옥의 형벌을 받을 사람이니까 아무렇게나 살면 됩니다. 죄를 조금 짓든지 많이 짓든지 똑같이 지옥에 갈 사람이니까 양심이고 뭐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적당히 죄를 지으면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짓는다고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이고 그런 죄들을 통하여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여 믿음을 빼앗거나 더 큰 고난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따라 살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복음을 따라서 살다가 복음을 전하면서 살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을 따라 살다가 고난 당하는 것을 세 종류 사람들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좋은 병사”, “경기하는 자”, “수고하는 농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병사나 선수나 농부도 다 나름대로 어려움을 통해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군인은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운동선수는 운동선수로서 최선을 다하고 농부는 농부로서의 최선을 다할 때 그들이 좋은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본문 3~4절에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나이가 되면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 군에 입대하여서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요즘은 군대도 편하고 자유롭게 군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규칙적인 생활과 세상과 분리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 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군 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소집이 되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서 싸워야 했을 것입니다.

 

  가정을 두고 온 군인은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군 생활을 하면서도 뭐가 이익이 되는 것이 있으면 가족을 위해서 일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가족 부양의무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늘 군인의 생활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사생활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취미 생활도 하고 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군인은 그런 사생활에 집착하지 않고 군인으로서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사생활은 접어두고 철저하게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 경우를 우리 목회자들에게 비유로 씁니다. 목회하는 일도 군인과 같이 자신을 불러주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도 가정이 있고 사생활이 있어서 때로는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생활에 더 중심을 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교회가 점점 어려워지고 코로나 19로 인해서 작은 교회들은 더욱 어렵습니다. 교회가 목회자의 최저생계비도 주지 못하니까 목회자들이 생활비 때문에 걱정해야 하고 다른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목회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보면 목회자로서 기도하는 일이나 설교하는 일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목회만 전념하라고 합니다.

 

  교단 총회에서도 목회자의 겸직문제에 고민이 많습니다. 목회자가 목회만 전념하게 하려면 교단에서 작은 교회 목회자에게 최저생계비라도 주어야 하는데 그럴 재정이 없습니다. 지난번 총회에서 결정하기를 정 어려운 교회는 목회자가 다른 일을 겸하는 것을 허용하되 1년이나 2년을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고 계속해야 하면 목회하는 일을 그만두도록 권장한다고 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목회에 최선을 다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목회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 말씀이 적용됩니다.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살기 때문에 이중국적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일에 또 이 세상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 때는 가족이나 육신의 삶이 더 중요하게 보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은 더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군인의 의무가 자신을 병사로 모집한 이를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생활이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본문 5절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나 우리 성도들을 운동선수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의 목표는 경기에서 우승해서 승리의 면류관을 얻는 것인데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하는 데 있어서 정해진 법이나 규칙을 제대로 지키면서 승리를 해야지 아무렇게나 이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프로야구 선수나 프로축구선수 가운데서는 연봉을 수십억 수백억씩 받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나도 운동이나 해서 저렇게 성공하고 돈도 좀 많이 벌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더러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운동선수가 그렇게 성공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천적인 소질도 타고나야 하겠지만 그런 실력이 나오도록 엄청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주변에 운동선수 해서 성공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훈련이 장난이 아닙니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고의 선수가 된다는 것은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운동선수가 경기에 임할 때 반칙을 쓰면 안 됩니다. 그냥 싸움하는 것이면 법이고 뭐고 필요 없이 힘으로 이기면 되겠지만 정식으로 경기에 임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그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경기에 임할 때만 법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받을 때도 규정에 맞게 바르게 잘 받아야 하고 선수로 선발 과정을 거칠 때도 정해진 법에 따라서 선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선수의 사생활도 올바른 사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선수 중에 중고등학교 다닐 때 다른 학생들을 구타한 것이 밝혀져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사람이 여러 명 생겼습니다.

 

  그때는 어려서 그것이 큰 문제가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또 당시에는 학생들 사이에 구타하는 일이 많았고 또 지도자가 선수들을 구타하면서 가르치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선수 생활에 지도자 생활에 걸림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사이좋게 지내고 또 좀 실력이 안 올라도 말로서 잘 타일렀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목회자에게 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도덕적인 문제도 물론 포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진리를 전해야 하는 목회자가 이런저런 죄를 짓는다면 그가 전한 복음이 믿을 수 없는 거짓이 되기 때문에 목회자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목회자에게 정말로 중요한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르치는 것이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해서 엉뚱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단들은 정말로 열심히 충성과 헌신을 다합니다. 그런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하는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알면서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복음을 믿는 믿음이 아닌 다른 믿음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더 나쁜 사람입니다. 작은 자기 이익 때문에 한 영혼을 지옥으로 가게 하는 아주 비열한 사람입니다.

 

  돈 몇 푼 빼앗으려고 남의 생명을 앗아가는 강도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교회를 부흥시켜서 좀 더 대우받고 잘살아보려고 복음이 아닌 잘못된 것을 가르쳐서 그 소중한 영원한 생명을 빼앗는 흉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승리의 관은 경기에 우승한 사람이 받는 면류관을 말합니다. 요즘 같으면 목에다가 금메달을 달아줍니다. 최고의 우승자에게 주는 상이며 승리자의 상징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평생 훈련을 쌓고 노력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 성도가 받을 면류관은 의의 면류관이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 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살았는데 그 법을 잘 모르고 규칙을 어겨서 면류관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 이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데 엉뚱한 것을 믿고 있다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면 참 억울한 일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라고 했습니다.

 

  법대로 경기 한 사람 즉 복음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이 이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본문 6절에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도 수고를 해야 합니다. 저도 어려서 시골에서 농사를 조금 지어보았습니다. 부모님이 농사하는 것 보면서 조금 거들었습니다. 씨앗이 자라서 알곡이 되기까지 참 많은 손길이 필요합니다. 농부가 게으름을 피우면 농사는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농부가 혼자서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햇빛을 주시고 물을 주시고 공기를 주셔야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은혜로 주셨을 때 우리가 농사를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돈 주고 쌀 사 오고 반찬거리 사 와서 식사를 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가 준 돈은 농부의 수고비이고 모든 식물은 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주셨기 때문에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도 노력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때를 따라서 씨도 뿌리고 잡초도 제거하고 물도 주고 추수도 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잘함으로써 많은 알곡을 거둘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은 수고의 대가를 먼저 받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성도들을 열매로 생각해서 그 열매에 따라서 수고비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도해서 양육해서 성도들이 알곡이 되면 그 대가를 목회자가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알곡은 하나님 나라의 곡간에 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수고의 대가로 사례를 받기는 하지만 그 열매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가 복음의 씨를 뿌려서 전도하고 양육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자신도 그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알곡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은 실컷 전도하고 양육해서 알곡을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여보내면서 자신은 알곡이 되지 못하면 큰 낭패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게 한 목회자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 사람이 자신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우리가 모두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알곡이 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그 은혜로 받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군인이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충성하는 것처럼 운동선수가 법을 지키는 것처럼 농부가 수고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이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수고스럽지만 그런 노력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소중한 것임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