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14.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7)

  본문 : 딤후 1:15-18

  제목 :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15.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6.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생각하고 따르는 근본적인 인식의 체계나 이론의 틀을 패러다임이라고 합니다. 이 패러다임이 세월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사람들의 패러다임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 지구가 사각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지구가 둥근 것을 몰랐기 때문에 배를 타고 멀리 나가면 낭떠러지가 있어서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안 후에 사람들의 생활은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배를 타고 멀리 가서 신대륙을 발견하기도 하고 힘센 나라는 배를 타고 가서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기도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뭘 배우고 연구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면 먹고 안주면 굶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공부하기 시작하고 연구를 하기 시작하여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지금은 포스트 모던(post modern)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원칙들을 다 부정해버리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신도 죽었다고 선언하고 무엇이든지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시대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과학의 발달로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원리가 바뀌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오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바뀌고 발전한다고 해도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은 다 불쌍하고 또 아무리 편리한 세상이 온다고 해도 인간의 삶은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친다고 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좀 늘어나기는 했지만 몇십 년 늘어날 뿐이고 몸뚱이 전체를 기계로 바꾼다고 해도 결국은 죽고 마는 인생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고 연구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도 그것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해서 수천억을 가진 부자가 된다고 해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렇다고 편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잘 살려고 노력할수록 인간은 더 비참해집니다. 차라리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사도바울의 기도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 이 세상을 살 때나 이 세상을 마칠 때 아주 중요한 것임을 생각해보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우선 본문 강해로 들어가기 전에 긍휼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엘레오스(ἔλεος)라는 단어입니다. 긍휼, 자비, 동정심, 은혜, 친절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말에서는 자비라는 말과 함께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가엽게 여기고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거기서 구해주실 때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을 씁니다. 동정을 받을 여지가 없는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우리 스스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이 엄청난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나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은혜가 그 긍휼히 여기심이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본문 15절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선 하나님께 긍휼히 여기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이 나를 버린 사람이라고 했지만 바울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복음을 믿는 믿음을 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고 재판을 받게 되고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게 될 사람들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노잉이라는 영화를 잠깐 보았는데 지구가 불에 타서 완전히 없어지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주인공이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고 그 종말을 피해 보려고 노력하는데 종말에 관한 이상한 숫자가 기록된 문서에서 비밀을 풀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 종말을 피해서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입구에서 종말을 피해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신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선택받은 사람만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과 딸은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서 구원을 받았고 아버지는 선택을 받지 못해서 지구가 불에 탈 때 같이 죽고 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작가가 성경을 잘 알고 기독교적인 배경으로 만든 영화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냥 공상적인 이야기 같지 않고 언젠가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여기 숫자로 된 문서는 우리가 가진 성경이고 신의 부르심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통하여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음을 가진 것으로 보아서 우리는 지구가 멸망할 때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확실합니다.

 

  그때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천사들과 함께 천국으로 가게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타는 지구와 함께 불에 타고 멸망 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옛날 우리가 잘 부르던 찬송에 웬일인가 내 형제여라는 찬송이 있는데 3절에 웬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건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선택을 받고 구원의 복음을 알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처럼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끝까지 믿지 않고 복음을 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시아는 지금 터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수도가 지금 디모데가 시무하고 있는 에베소입니다.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일곱교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에베소교회도 그대로 있고 디모데도 목회를 잘하는데 다 복음을 버리고 믿음을 버렸다는 것은 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아주 확실하다고 믿었던 몇몇 사람들이 바울이 어려움을 당하자 믿음을 버리고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울이 로마에서 붙잡혀서 억울한 옥살이를 할 때 와서 바울의 편이 되어서 같이 복음을 증언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하고 믿음도 버리고 떠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라고 했는데 부겔로와 허모게네라는 사람이 그 증언을 거부하고 떠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정말로 복음을 잘 믿는 것 같고 복음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바울이 어려움을 당하자 슬그머니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도 늘 한결같은 사람이면 좋겠지만 세상은 어차피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늘 같은 길로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이 믿음은 버려서도 안 되고 변질되어서도 안 됩니다. 꼭 변함없이 간직하고 지키고 사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본문 16~17절에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버리고 바울을 떠난 사람들과 달리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고난 당하는 바울의 편이 되어서 바울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는 본문 외에 기록이 없습니다.

 

  바울을 자주 격려해 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에서 격려라는 말은 다시 숨을 쉬게 해주다”. “시원하게 해주다”, “유쾌하게 해주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에서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로 번역했습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여 실망하고 있을 때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베소에서 로마 감옥에까지 자주 찾아와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기분 좋게 해주고 다시 용기를 내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보로라는 이름의 뜻이 이익을 가져오는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뜻과 같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쇠사슬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편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떠났을 때 오네시보로는 오히려 그런 바울을 가까이 하면서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오네시보로의 집에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긍휼은 구원을 주시는 은혜를 말하기보다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변호하고 편이 되고 돕기 위해서 로마로 자주 왔다가 갔다가 하니까 집안일은 돌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원래 돈이 많았던 부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자라고 해도 가장이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나돌아다니니까 집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위하다가 어려움을 만난 오네시보로의 집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비록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런 어려움도 이길 수 있고 또 그런 가운데서도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믿음을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은 손해를 보는 삶입니다. 신앙 때문에 때로는 이익도 포기하고 출세도 성공도 포기하고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오히려 더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 은혜가 임할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과 은혜가 늘 넘치시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본문 18절에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긍휼은 그날,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면 그 최후의 심판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도우심을 받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최후의 심판대에 어떤 모습으로 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네 시보로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를 기도하는 이유를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사도바울에게만 잘해준 것이 아니라 에베소에 있을 때 에베소교회를 위해서 많은 봉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복음 전도로 인해서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지고 디모데는 그 교회의 목회자로 일했고 오네시보로는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맡아서 봉사하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도움이 되고 또 복음을 믿고 모인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헌신이나 봉사가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받을 최고의 혜택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한 사람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헌신이나 봉사가 없으면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긍휼히 여기심을 받습니다. 다만 믿음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일에 복음을 믿고 따르는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도와주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를 위해서 봉사했다고 강조하는 것은 오네시보로에게 믿음이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그의 삶이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도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목회자들에게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바울처럼 잡혀가고 감옥에 가고 순교를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어렵고 힘든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한마디 위로나 격려가 답답한 마음에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 됩니다. 엄청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아 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고 작은 봉사나 헌신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도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실 때 어려움 속에서도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마감할 때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이 세상이 끝날 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서 은혜로 사랑으로 대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도 복음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삶에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