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2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로마서 종합 10)
   본문 : 롬 10:1-4
   제목 : 하나님의 의(義)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그들이 진리를 바로 알고 구원을 받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바른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의의 기준을 알려고 하지 아니하고 자신들 스스로가 내 세운 의의 기준을 따라 행하였고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복종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여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신이 세운 의의 기준에 의해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많이 들으셔서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가장 귀한 지식입니다.
  그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삶입니다.

  로마서 강해설교를 통하여 너무나 많이 말씀을 드린 사실이지만 종합하여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이 진리의 말씀을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1.바른 지식
  앞서 인용한 본문 2절 말씀에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열심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열심만 낸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방법을 바로 알고 가는 길을 바로 알고 그 방법에 의해 그 방향으로 열심을 내어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도 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지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지식이라는 말이 그노시스(γνωσιζ)라는 말과 에피그노시스(επιγνωσιζ)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노시스라는 말은 단순히 사실적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에피그노시스라고 하는 말은 경건함을 따르는 지식 혹은 깨달음을 지닌 지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 말하고 있는 지식이란 에피그노시스라는 말입니다
  즉 경건함에 이르는 지식 깨달음이 있는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저 사실적인 지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이르는 참된 지식 깨달음을 동반하는 그런 지식은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도 잡다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아이들도 수없이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뭐라고 하면 저도 알만한 것은 다 아니까 잔소리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아이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지식들 때문에 참된 지식을 알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는 지식 참된 회개에 이르는 지식 참된 진리를 깨닫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한 보병 소대가 공산군에게 포위되어서 전쟁 포로 수용소에 잡혀 있었다고 합니다.

  수용소 생활에 물자가 부족하여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본국에서 필요한 몇 가지 필수품들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미군들이 참 좋아하는 물건이 있었는데 모노폴리라고 하는 게임도구였습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게임을 하는 것인데 그 주사위보다는 그 게임에 사용이 되는 게임용 가짜 화폐가 그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 수용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게임용 돈을 똑 같이 나누어 갖고 그 날부터 그 게임용 돈을 진짜 돈처럼 사용을 하게 되었답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그 돈을 받고 팔아서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하고 그것으로 게임도 하고 재미있게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게임도 잘 하고 물건을 잘 융통하는 사람이 있어서 야금 야금 그 돈을 모으기 시작을 했고 나중에는 그 사람이 혼자 그 게임용 돈을 다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전쟁이 끝이 나고 포로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답니다
  수용소에서 게임용 돈을 다 모았던 사람이 귀국을 해서  은행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게임용 돈을 은행에 예치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은행의 직원이 그 사람에게 이 것은 돈이 아니라 게임을 할 때 사용하는 장난감이라는 것과 이 돈은 현실적으로 쓸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 먹지 않고 쓸 것 쓰지 않고 고생 고생해서 모은 돈이 하나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은행에 예금을 하기 위해서는 은행에서 인정하는 수표나 돈을 가져와야 하는 것입니다.
  은행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내가 아무리 우겨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도 남이 먹는 것 먹지 않고 열심히 온갖 재주를 다 부려서 그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아무 소용이 없는 열심히 되고 말았습니다

  그 가짜 돈이 게임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리고 세상에 나와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도 이렇게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에는 아무 필요도 없는 열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른 지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어떤 열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하나님의 의(義)
1)하나님의 의 라는 말의 의미.
  우선 의(義)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의"라는 말은 로마서에만 33번이나 사용이 되는 말로 성경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의"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시네(δικαιοσυνη)라고 합니다
  이 말은 디케(δικη)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디케라는 말은 아주 자명할 정도로 올바름, 공의, 정의, 원리, 원칙이라는 말입니다. 
  정확하고 바르고 옳고 공정하고 원리 원칙적이다라고 할 때에 이 의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1)죄나 악의 반대말로서 의로움
  성경에는 우리 인간이 해서는 안될 이들과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길 때 죄라고 하고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을 지키고 순종할 때에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2)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라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좀 덜 악하고 조금 더 의로운 사람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로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3)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말할 때
  신약성경에 와서는 이 의로운 사람의 기준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말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의로운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을 종합하여 볼 때 의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별하는 원칙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의라는 기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기도 하고 버림을 받기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의라는 기준을 통하여 우리가 천국에 가기도 하고 멸망 길로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의라는 기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도 하고 사탄의 종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인생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기준을 잘 못 알고 있다가 최후의 순간에 낭패를 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는 고쳐서 할 수 없는 한번의 선택이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의 기준
  앞서 인용을 했듯이 오늘 본문 말씀에 참된 지식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의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의 기준을 인간 스스로가 세우고 그 기준에 의해서 의롭다 악하다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천차만별이요 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리고 남의 이야기나 올바른 기준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1)무신론 자들은 종교 자체를 악으로 봅니다.
(2)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은 유일신을 믿는 우리를 악하다고 합니다
(3)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의를 잘 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선한 행실을 많이 하고 종교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 의롭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일들은 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고 있는 의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합당한 의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사람들  
  본문 3절 말씀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의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의를 내 세우기에 혈안이 되어서 다른 것을 생각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그 참된 의의 기준을 불복종하고 오히려 대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1)이 사람들은 자기의 의로 만족합니다
(2)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3)이 사람들은 율법을 오해하고 잘 못 다룹니다
(4)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4)하나님의 의의 기준
  그러면 결론적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의의 기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 4절 말씀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순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3.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
  본문 4절 말씀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의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모두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침"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텔로스(τελοζ)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일이 도달하는 목표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무엇의 완성이나 성취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어떤 일의 종국 혹은 종결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말에는 단순이 마침이라고 했지만 헬라어에서는 이런  큰 세 가지의 뜻으로 해석을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해석에 따라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세 가지의 뜻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율법의 목표가 되시는 그리스도
  갈 3:24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은 학생을 선생님에게 데려다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의 진짜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을 잘 읽어보면 그 모든 말씀들이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율법 앞에서 이 율법의 목적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그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어 보려고 하다가 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율법 같은 것은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팽개쳐 버림으로 그 율법의 목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2)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빌립보서 2:8절 말씀에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조금도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그 율법에 조금도 위배됨이 없이 사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죄가 있으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 때문이지 우리의 죄를 인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율법의 요구까지 성취하셨습니다
  율법은 범죄한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과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 대신 죽여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성전으로 가져와서 대신 죽게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해결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행함이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율법의 요구를 이미 성취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3)율법을 종결하신 그리스도 
  율법을 종결하셨다는 것은 율법을 폐하셨다거나 그 역할을 중단하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3장 31절 말씀에 이미 배웠듯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7장 12절에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로 미루어 보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하셨다거나 율법 자체를 없애거나 그 효력을 중단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하셨다는 것은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원 받을 백성이 되기 위해서 율법에 있는 할례를 받거나 절기를 지키거나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일에서 자유케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율법의 틀에 속박이 되어 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정신을 가지고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의식들에서 자유함을 얻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그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으며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그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를 그 율법의 멍에에서 완전 자유를 누리게 해주심으로 율법을 종결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하나만 가져도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진리의 말씀을 확인하시고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이 갖는 놀라운 효력을 바로 아시고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들이 되어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