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1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28)
   본문 : 엡 2:14
   제목 : 우리의 화평이 되신 주님

  영국의 어떤 의학박사가 축구선수들을 상대로 가족관계를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형제가 많은 집안의 장남이 축구선수가 되면 공격수를 할 확률이 높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아들이 축구 선수가 되니까 수비 선수나 골키퍼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그런 기질을 타고 나는 것은 아니고 형제가 많은 집안의 아이들은 늘 경쟁상대가 많아서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성향으로 자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형제가 많은 집안의 아이들은 형제간에도 이런 경쟁 속에서 전투적으로 자라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즘 학생들이 학교에 가면 현실적으로 무엇을 가장 많이 배우게 될까요
  무엇보다도 많이 배우게 되는 것은 경쟁의식일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서 상도 받고 좋은 상급학교에도 가고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어떻게 하든지 다른 아이들과 경쟁해서 1등을 해 오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아이들 마음 속에 경쟁의식 전투의식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고 평생을 전투와 전투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직장에 다니거나 장사를 하는 것도 모두가 경쟁입니다. 치열한 전쟁마당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과 싸워서 이겨야만 살수 있는 경쟁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결혼생활을 시작 하면 반드시 첫 부부싸움에서 이겨야 한답니다.
  첫 싸움에 이겨야 평생 주도권을 쥐고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냐 한번 싸움만 붙어 보자 내가 첫 싸움에는 반드시 이기고 말 것이다 라고 각오를 단단히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부부간에 형제간에 교우간에 동료간에 친구간에 이웃간에 경쟁상대로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고 싸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처절한 싸움을 벌리면서 삭막하게 살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서도 힘이 있는 척 눈을 크게 뜨고 주먹을 불끈 쥐고 어디 덤빌 테면 한번 덤벼 보라는 자세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가장 힘이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로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하고 가장 큰 적대감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하시기에 충분하신 하나님께서 평화의 깃발을 들고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그는(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놀랍고 너무나 감격스러운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세계적인 강해설교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분은 영국의 런던대학에서 의학 박사가 되어 의사로 봉직하던 중 목사님이 되어서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주일 낮에 이 에베소서 강해설교를 했는데 그 분량이 5-60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 여덟 권으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제 1권은 에베소서 1장을 설교한 것인데 책의 제목이 "영적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1장의 주제가 이 "선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4)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1)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며 그 예정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2권은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이 2장의 말씀을 강해한 것인데 그 제목을 "영적 화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평화가 되셔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 2장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시작을 해서 이 "화평, 화목, 평안이라는 말씀이 여러 번 등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적 화해"를 주제로 한 말씀이 에베소서 2장의 주요 핵심이라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오늘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음식을 잘 먹는 미식가들은 식사를 할 때 천천히 그 맛을 느끼면서 먹는다고 합니다.
  음식 맛을 잘 모르고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사람은 허겁지겁 멀 먹었는지 모르게 빨리 먹어 버리니까 그 맛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영의 양식인 설교를 들으시면서도 그냥 듣지 마시고 하나 하나 음미하시면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로 정말로 너무나 유익한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1.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늘 본문 말씀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화평'(에이레네,ειρηνη)이라는 말씀은 구약의 '샬롬'(평화)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샬롬'은 전쟁이나 적대 감정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번영, 안전, 조화 등의 '인간 삶의 총체적인 행복과 평안을 의미한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화평'이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화평을 말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 생각하면 더 깊이가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이 되신다는 말씀은 전쟁의 시작이 되었던 아담과 대비되는 말씀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가끔 아담과 비교해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아담은 인간의 전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서 범죄하게 한 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3:15)라고 했습니다.

  여기 “원수가 되게 하리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전쟁이란 뜻입니다.
  뱀과 여자 사이에는 상호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류의 전쟁은 아담을 대표로 하는 인간과 인간을 범죄케 만든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간의 전쟁으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평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대감이 생기게 하고 원수가 되게해서 전쟁을 하면서 살게 만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가까이에 와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부분적으로 그 평화를 맛보면서 아직 사탄과 싸워야 하는 전투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서 영원한 평화의 나라가 오리라는 소망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산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그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화평이 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힘이 있는 나라가 그 힘을 가지고 다른 나라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잘못하면 무서운 무기로 공격을 가함으로서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처럼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가진 무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더 강한 무기를 만들어서 공격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엄청난 위력의 핵무기를 만들어서 힘을 과시해 보지만 잘못했다가는 서로 다 죽으니까 함부로 사용을 못하고 있고 그 약점을 알고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더 강력한 무기로 우리를 꼼짝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게 만들어서 질서를 유지하실 수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압적인 힘으로 평화를 주시는 것은 일시적이고 완전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은혜를 바르게 이해함으로 이 평화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이 특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고 우리도 그런 방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누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 나라 사람들도 만나면 자연스레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 악수의 유래를 알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경계심이 앞서 몸에 지니고 있던 칼이나 총과 같은 무기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면서 서로를 경계하며 얼굴을 마주본 채 상대에게 천천히 다가섭니다. 
  그러다가 서로 싸울 뜻이 없음을 알게 되면 무기를 거두고, 무기를 쓰는 오른손을 내밀어 적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 악수를 하게 된 유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손에도 이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무기를 거두시고 손을 내밀어 우리에게 평화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신 그 희생의 손을 우리에게 내 미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긍휼히 여긴다
  내가 너희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내가 너희들을 구원으로 영생으로 인도하겠다 
  내가 너희들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를 이루겠다 라고 하시면서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그 주님의 평화의 손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손을 내밀 때 그런 마음으로 내미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당신과 경쟁하여서 당신을 밟고 내 욕심만 채울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당신에게 평화가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평화의 손을 내미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둘로 하나를 만드사
  또 오늘 본문 말씀에 "둘로 하나를 만드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개나 돼지 같은 짐승으로 취급하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평화가 사라지고 서로 싸우는 전쟁이 시작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차별해서 자신은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열등감을 가지게 하는 이 차별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앞에 서 보면 서로에게 많은 차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계명을 잘 지키고 어떤 사람은 잘 지키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선을 많이 행하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악을 행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착하고 어떤 사람은 좀 악하고 그래서 서로의 장점을 내세우며 자신의 의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 보면 우리 모두가 다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인이나 무지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나 바른 사람이나 다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보혈에 의지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고 천국백성이 되며 같은 믿음으로 같은 소망을 가지고 같은 길로 가는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평화가 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이렇게 차별이 없이 다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같은 자격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우리가 다 같은 신분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고 시기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적대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교만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화평으로 인해서 우리가 다 같은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서로 그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이 신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룬 형제요 자매로서 서로에게 평안이 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서로에게 행복이 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오늘 본문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 성소와 이방인의 뜰 사이를 분리하는 성전난간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율법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을 의미하든지 직접적으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사이에 막혀 있는 차별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도 많은 벽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바깥 뜰과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안 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바깥 뜰과 안 뜰 사이에는 아주 높은 벽을 쌓아서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이 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경고문이 써 있었는데 유대인만 출입이 허용된 성전 구내에 침입하는 이방인은 누구든지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은 그 벽을 넘어서 성전에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가장 중심에는 지성소가 있고 그 다음에 성소가 있습니다.
  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도 15Cm 두께의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지성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지성소에는 아주 거룩한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인간의 신분에 차별을 둔 여러 제도들을 예수님께서 허물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가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벽을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없애 버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여자들이 나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벽, 이방인들이 들어 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벽 그리고 대 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없도록 만들어 놓은 휘장 이모든 것들을 예수님께서 허물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죄로 벽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 죄를 두고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죄의 벽을 예수님께서 허물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거나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율법도 성전도 유대인도 또 나 자신의 어떠한 죄악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런 장벽을 허물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했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그 장벽을 막힌 담을 깨끗하게 제거시켜 버리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던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과 원수가 되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죄로 물든 욕망 때문에 우리 서로도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밟고 일어서야 하는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새 생명을 부여 받고 한 몸을 이루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서로도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벽을 허물고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