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3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22)
   본문 : 엡 2:5-6
   제목 :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지으시고 느끼신 것이 사람이 독처하는 것 즉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을 하시고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들어 주신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롭게 되지 않으려고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친구도 사귀고 동창회도 나가고 단체도 만들고 돈도 벌고 권력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가 다 외로움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을 깊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없을 때 외로움을 느낍니다
  아무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주지 않을 때 외로움을 느낍니다.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 버렸을 때 느끼는 외로움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고
  사람들이 나의 편에 서 주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 주지 않을 때 외로움을 느낍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이런 외로움 속에서 자랐습니다.
  아무도 나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잘못했을 때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뭘 좀 잘했을 때 진정으로 기뻐하면서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내가 곤란한 일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 고독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 가장 쉽게 떠오르는 저의 모습은 깜깜한 밤에 혼자 벽을 향해 누워서 무서움에 떨었던 기억입니다.

  지금 생각할 때 아쉬운 것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아무도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로울 때 너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같이 동행을 해 주신다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나와 동행해 주시는 그 주님을 만났다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것입니다.

  "단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을 쓴 정태기 목사는 그 책에서 소록도에서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소록도 나환자 촌에서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통성기도 시간이 되어서 기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 저에게 주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큽니까 주님 제가 어찌하면 제가 주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지요"라고 계속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은혜를 그리도 많이 받았길래 이렇게 감격스럽게 기도를 하는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니 60이 넘은 듯한 흉칙하기 그지없는 늙은 노인이 그 기도의 주인공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오랜 나병으로 얼굴의 형태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흉칙한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난 뒤 그 노인에게 무슨 은혜를 그렇게 많이 받았는지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하는 말이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세상도 피붙이도 나를 버렸어 물론 친구들도 떠나 버렸고, 그런데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온 분이 계셨어 그리고 내게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할머니가 따라 오셨군요?"
  "아니야 할머니는... 예수님이 따라오신 거야"

  나병이 걸려서 눈도 코도 귀도 일그러져 버린 늙은 노인을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함께 동행하시면서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그 주님을 발견하고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과도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같이 계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고 한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감격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외롭고 힘들고 지친 고독한 우리의 마음에 찾아 오셔서 우리에게 귀한 것을 주시고 늘 위로하시고 친구가 되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말씀은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고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가 하나인 것처럼 아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지체가 된 것처럼 주님과 우리가 하나로 함께 같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같이 있는 유익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주님과 같이 함께 있다는 것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을 합니다.  
  하나는 대표성의 원리에서 설명을 합니다.
  아담이 모든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서 아담아래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죄 안에서 죄인으로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들의 대표가 되시어서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유기적인 연합에서 설명을 합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그 몸에 붙어 있음으로 포도나무가 주는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 함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함께(쉰,συν)"라는 말로 시작되는 세 개의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함께 살리다"(쉬네조오포이에센, συνεζωοποιησεν)",
  "함께 일으키다"(쉬네게이렌, συνηγειρεν)",
  "함께 앉히다"(쉬네카디센, συνεκαθισεν)"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심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 보시고 많은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1.함께 살리심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했습니다.
  "함께 살리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쉬네조오포이에센(συνεζωοποιησεν)"입니다.
  이 말은 함께(συν)라는 말과 생명을 얻게 하다(ζωοποιεω).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죽은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살림을 받아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기 새 생명이란 영적인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들은 영적으로 우리의 영이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육신이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듯이 영이 죽은 사람은 영의 눈이 영의 감각이 죽은 상태로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진리를 알 수도 없으며 영원한 세계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새 생명이 우리 속에도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진리를 알게 되었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구원의 계획과 복된 소식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비로소 말씀을 하심으로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이렇게 그 진노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도 이미 그 형벌을 받아 버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하여 그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다시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전에 어떤 유명한 목사가 불교학교에 특강을 하러 가서 질분 시간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교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말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게 되었다는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리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양심적으로 바르게 산다고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산을 가려고 하는데 서울역에서 반드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부산행 열차표를 사고 부산행 기차에 오르는 일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광주나 목포로 가는 열차표를 사고 그 차에 올라서 부산으로 가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부산행 열차가 아닌 다른 열차에서 아무리 선행을 하고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부산에는 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석가모니와 함께 모하메트와 함께 공자와 함께 있으면 나름대로 좋은 일을 하겠지만 구원에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어야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자만이 주님과 함께 새 생명을 얻는다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함께 일으키심
  본문 6절 말씀에 "또 함께 일으키사"라고 했습니다.
  "함께 일으키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쉬네게이렌(συνηγειρεν)"입니다.
  이 말도 함께(συν)라는 말과 일으키다(εηγειρω)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무덤에서 일어나시사 다시 사신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육신도 부활의 몸이 될 것입니다. 
  다시 아프거나 병들거나 늙거나 죽거나 하는 일이 없는 완전한 몸 신비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본문은 영적으로 해석해서 또 다른 의미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영적인 의미가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더 큰 의미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무덤에 있지 않고 일어나신 것처럼 우리도 더 이상 죽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 즉 영의 무덤에 누워 있는 상태이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상태에서 누워 있지 않고 일어나서 산 사람으로서 이렇게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무덤에 누워 있는 것처럼 진노의 자리에 정죄받는 자리에 누워 있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일으킴을 받아서 진노와 정죄 밖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 있는 새 생명을 가진 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가전제품에 전기가 들어 왔을 때와 나갔을 때의 차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가전제품에 전가가 나간 상태였습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력이 공급이 된 가전제품처럼 우리가 가진 기능을 발휘하여 주님을 위하여 맡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시체로 누워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나 정죄 받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전기가 나간 가전제품처럼 무용지물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죽음의 자리에서 일으킴으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함께 앉히심
  본문 6절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앉히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쉬네카디센(συνεκαθισεν)"입니다.
  이 말도 함께(συν)라는 말과 앉게 하다(καθιζω)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나라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그 날이 오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두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살리셨고 이미 일으키셨고 이미 하늘에 앉히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 이렇게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한 몸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벌서 하늘에 가 계심으로 우리가 비록 지금은 여기 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가지의 의미는 우리가 이미 하늘나라에 속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렇게 세상나라에 속해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이미 소속은 하늘나라 소속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비록 험한 세상에서 나 혼자 사는 것처럼 외롭게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와 동행을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즉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를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리시고
  주님과 함께 일으키시고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 앉히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