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12.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50)
   본문 : 엡 3:18-19
   제목 : 예수님의 사랑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우리말 속담에 "알아야 면장하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흔히 읍,면,동(邑,面,洞)의 면장(面長)으로 알고 있으나 그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원래의 뜻은 무식하지 않고 알아야지 담장(牆)에서 얼굴(面)을 면(免)한다는 면면장(免面牆)에서 온 말로 담장에서 얼굴을 면한다는 면장(免牆)이라는 말입니다.
  뭘 잘 모르면 담장에다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좀 알아야 담장에다가 얼굴을 대하고 있는 답답함에서 면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자꾸 전해 내려오면서 그 면장이 읍이나 면이나 동의 면장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럴듯한 이야기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시(市)는 별로 없었고 군.면 단위가 많았는데 일본 놈들이 강제 노역을 우리국민에게 많이 시켰습니다.
  그런데 모두 일본어로 지시가 내려와 그걸 면장이 읽어본즉 알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아는 글자가 하나 있었더랍니다. 그 글씨가 길도(道) 자였는데 눈치 빠른 면장이 아~ 마을 길을 고치라는 지시구나 생각하여 동네사람들을 시켜 길을 고쳤는데 그 지시가 맞았더랍니다
  그래서 이후로 내려오는 말이 길도(道) 자라도 알아야 면장을 해먹는다 하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혹 특별한 경우의 이야기이고 뭐든지 잘 알아야 편하게 살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알아야 면장(?)을 합니다.
  뭘 모르면 신앙에 대한 자부심도 없고 엉뚱한 길로 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서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능력이 있는 사랑
  오늘 본문 말씀은 "능히"라는 말씀으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이 "능히"라는 말은 "강건해지게"라는 말로 해석을 합니다.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강건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건해지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 없는 사랑도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능력이 있는 사랑은 더욱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할머니가 저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일은 한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과자를 몇 개 주신다든지 용돈을 좀 주신다든지 학용품을 좀 사 주신다든지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신다든지 하는 이런 일들은 언제나 해 주셨지만 그보다 더 큰일은 어떻게 해 주시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보내 주신다든지 출세를 하게 해 주신다든지 부자가 되게 해 주신다든지 병이 낫게 해 주신다든지 하는 이런 큰 일들에는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다 그런 수준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불치병에 걸리거나 죽음을 눈 앞에 두면 조금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연약한 사랑이 우리들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능력이 있는 사랑입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시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 자체는 어떻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심으로 인생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죽어가는 몸을 고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수명이 다했을 때 아주 완전하고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 몸은 고쳐 보았자 또 고장이 날 수 밖에 없는 몸이기 때문에 아예 새로운 몸으로 바꾸어 주심으로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을 해 주신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우리의 몸을 다시 살려 주시는 것만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왕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후사,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우리를 죄에서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영광스러운 하늘의 보좌까지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능하게 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높고 고귀한지를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시고 지위를 높여 주신 그 능하신 사랑을 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2.모든 성도와 함께 받는 사랑
  본문 말씀에 "모든 성도와 함께"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강건해지기를 간구하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예출신, 가난한 자들, 대부분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귀족도 있었고 로마 군인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피부색과 신분과 귀천과 종족에 관계없이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의 가슴은  모든 사람을 다 안을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서로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려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쟁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같이 함께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넓으신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방인들은 개나 돼지같은 짐승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만 보아도 우리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선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에 있는 144000명으로 구원 받은 사람을 제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촌을 건설했던 전도관의 박태선이 그랬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초창기에 그렇게 주장을 했고 요즘 신흥 사이비 이단들이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144000명은 상징적인 숫자로 해석을 합니다.
  만약에 문자적으로 해석을 한다고 해도 그 144000명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구원받을 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4절에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라고 했습니다.
  누구 중에서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뒤에 있는 7:9절 말씀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라고 했습니다.
  10절에는 그들이 소리로 외치기를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도 144000명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각 나라와 각 족속들에서는 누구도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144000명 하면 성경도 모르고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또 나타나서 헛소리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 사람이라면 양심대로 살고 율법도 어느 정도는 지키는 사람이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비록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 흉악한 죄인까지도 용서하시고 구원하는 넓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슴은 한없이 넓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품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품을 수 있습니다. 
  자유인도 노예도 품을 수 있고, 성녀도 창녀도 품을 수 있습니다. 
  그 품이 우리 성도들을 모두 함께 품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혹 오해를 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넓으시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믿거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까지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 즉 성도가 된 사람은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지식에 넘치는 사랑
  본문 말씀에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종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신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신으로 섬기고 나는 뭇 사람을 속이고 불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는데도 그 사람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무당이나 사주 팔자를 보는 사람들이 근거도 없는 이론으로 사람을 속이고 돈을 빼앗아 가도 그것을 사기로 여기지 않고 종교활동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소설도 진짜 있는 일처럼 여깁니다.
  흥부놀부전이나 심청전이나 춘향전이나 홍길동전 같은 소설도 사람들은 진짜로 있었던 일로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이야기만 나오면 비과학적이니 미신이니 하면서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과학을 근거로 살펴보아도 성경은 하자가 없습니다.
  역사가들이 역사를 가지고 살펴보아도 하자가 없습니다.
  고고학자들이 고고학을 중심으로 살펴보아도 흠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질실이기 때문에 사실이기 때문에 진리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역사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그 근거를 통하여 그대로 이루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 성경의 역사이기 때문에 거짓이나 모순이나 비상식적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이해력 부족 때문에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신비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다 사실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알면 알수록 이렇게 귀한 진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4.체험하며 알아야 할 사랑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고 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상식적으로 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상식적으로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신대 라고 단순히 상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안다는 것은 좀 더 깊이 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 속에 있는 진리를 좀 더 깊이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며 왜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가를 더 깊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깊고도 오묘한 심오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안다는 말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끼고 그 위대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살 때 사랑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 갑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말씀을 읽고 교리를 배움으로 그 사랑을 알아 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교리는 잘 모르지만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해서 그 사랑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교리로만 사랑을 아는 사람은 그 사랑을 상식적으로는 알지만 자신이 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을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의 방법을 함께 사용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교리를 통해서 철저하게 지식을 먼저 가지시고요 그리고 그 지식이 삶 속에서 나타나도록 체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한번 조심스럽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가 없이는 한시도 살수가 없는 이 세상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그 사랑을 알고 성도가 되어서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살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정도로 만족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충분히 알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많이 사랑하시고 더 많은 사랑을 받으셔서 영육간에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