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1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42)
   본문 : 엡 3:8-9
   제목 :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에서 가장 큰 수는 무엇일까요
  일(一), 십(十), 백(百), 천(千), 만(萬), 억(億), 조(兆), 경(京)까지는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10에 20자승을 하면 해(垓)가 되고(1에다가 동그라미 20개를 치면 그 말입니다.),
  1에 동그라미 24개는 시(枾)가 되고, 28개는 양( 穰), 32개는 구(溝), 36개는 간(澗)이라고 합니다. 
  (10^40 정(正), 10^44 재(載), 10^48 극(極), 10^52항하사(恒河沙), 10^56 아승지(阿僧祗), 10^60 나유타(那由他)가 있고요) 
  1에 동그라미 64개는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고 68개를 하면 제일 큰 수 단위인 무량대수(無量大數)가 됩니다.

  그렇다고 무량대수가 제일 큰 수는 아닙니다.
  거기에다가 1을 더하면 무량대수보다 큰 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려서 아이들끼리 자기집이 부자라는 것을 자랑할 때 우리 집에는 쌀이 100가마가 있다 그러면 다른 아이가 우리 집에는 그것보다 하나 더 많이 있다 그래 버리면 이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수란 없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함을 나타내려고 할 때 가장 큰 수를 쓰고 싶은데 가장 큰 수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측량할 수 없는"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언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너무 커서 우리가 가진 수량으로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일은 너무나 신비해서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너무 영광스러운 나라라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3장의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영적인 충만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13절까지는 바울 자신이 복음의 일꾼이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전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절 이하에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한 것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우리가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이 풍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시고 그 풍성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일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측량할 수 없다"는 말은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 말은 "한계가 없는" 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의 무한함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우리 인간이 도무지 헤아려 그 큰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왜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뭘 좀 잘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은 너무나 보잘 것이 없는 빈약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부분적이고 그러면서도 100% 다 옳은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에 보면 주님께서 라오디아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책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바르게 볼 줄 모르는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나마 안다는 것이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부자다 라고 하지만 실상은 참 곤고하여 가련하고 벌거벗은 것 같이 부끄럽고 눈먼 봉사처럼 바르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일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은 늘 보아서 조금은 알지만 내 모습은 볼 수가 없어서 잘 모릅니다.
  길을 가다가 좀 뚱뚱하다고 생각이 되는 사람을 보면 우리 집사람을 보고 여보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뚱뚱해 더 날씬해 하고 물어 봅니다.
  제가 얼마나 뚱뚱하게 보이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는 내 자신이 참 좋은 사람 같은 데 돌아서서 내 흉을 보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을 보니까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나는 어떤 정도의 사람일까 늘 궁금합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이라도 아이구 목사님 참 훌륭하십니다라고 하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는 좋은 것을 깨닫게 해 주니까 참 감사하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나의 위치는 어떤 것일까
  그저 바람에 날아다니는 티끌과 같은 무의미한 존재일까 아니면 어떤 의미가 있는 존재일까  
  이 우주 공간에서 나라는 이 존재가 아무런 의식도 없는 상태로 없어져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이 우주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 우리 인생이 어찌 감히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속에 있는 지혜와 지식들을 우리가 감히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과학이 굉장히 발달을 하여 이 우주만물의 원리들을 조금씩 밝혀 내고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라든지 이 우주가 어떻게 생성이 되었는지 중요한 것은 알아내지 못하지만 그 만들어진 우주의 구조나 인간의 구조같은 것은 조금씩 그 형성되어 있는 질서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아주 조금 알게 된 것이 인간의 머리로 생각하면 너무나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다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왜 악이 존재하는지 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더 잘 살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가난해지고 어려움을 당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너무 신비하여서 우리가 측량할 길이 없고 너무 광대하여 그 크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만 우리의 지식이나 지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측량할 수도 없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며 그 지혜를 배우고 그 지식을 알고 그 지혜로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이 성경 말씀은 그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보고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들을 많이 발견하시고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그 하나님의 지혜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입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인이 되고 사탄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히 멸망을 받을 진노의 대상이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기 때문에 이 구속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우리대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먹다가 남은 음식 좀 주신 것이 아닙니다. 쓰다가 남은 돈 몇푼 주신 것도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시면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구속의 사랑입니다.
  요즘 뜻있는 사람들이 유산을 자녀에게 상속해 주지 않고 좋은 일에 쓰도록 하는 운동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죽을 때 유산을 자식들에게 상속해 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물론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사람보다는 낫겠지만 죽을 때까지 그 재산을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재산을 자신이 쓸 수 있을 때 자기의 쓸 것을 쓰지 않고 희생을 하면서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은 이런 희생이 들어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드리면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신 그 구속의 사랑은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풍성함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구속을 통해서 받는 축복이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에서 구속을 받는 것 죄값을 치르는 것 그것은 단순히 의인이 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는 교회에 드나들면서도 이 십자가의 구속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드나듭니다.
  많은 목사들이 이 십자가의 구속 이 십자가 안에 있는 풍성한 축복을 전하지 않고 부스러기들만 잘 포장을 해서 팔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에다가 잡동사니를 잔뜩 섞어서 요리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구속의 풍성함을 알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잡동사니 부스러기 축복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이 구속의 풍성함은 그 수혜자들이 구속을 받는 방법에 있어서 너무나 풍성한 축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 공부를 많이 해야 되고 좋은 보석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소중한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십자가 안에 있는 구속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너무나 작다는 것입니다.
  고행도 아니오 선행도 아니오 정해진 어떤 규칙을 지킴으로도 아니오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믿고 그렇게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선물을 줄 때 손을 내밀고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오해를 하는 장면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성경 속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의 훌륭한 모습들을 보고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나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지 못했을까 왜 나는 요셉과 같은 절개를 가지지 못했을까 왜 나는 모세와 같이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가 되지 못했을까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실패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을 합니다.

  예화를 들면서도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많이 듣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기도했더니 부자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주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을 했더니 어디서 석유가 쏟아져 나와서 거부가 되었고...이런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잘못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하는 것에 대해서 나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런 것들 때문에 이 구속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된 것은 요셉이 요셉되고 모세가 모세 된 것은 그들의 삶이 훌륭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그들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실패자들의 못된 점만 부각을 시켜서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라고 만 하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구속의 풍성함을 알지 못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생은 다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들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어떤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십자가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다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십자가 안에 있는 구속의 풍성함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됩니다.

3.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그리고 또 하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함이란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생명의 원천이 무엇일까 이 생명은 어떤 형태로 남아 있을 수 있을 까 아니면 어떤 순간에 완전히 소멸해 버리고 마는 것일까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짐승과 우리 사람의 다른 점은 짐승에게는 육체의 생명만 있고 영혼이 없다는 점이 다른 점입니다.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불신자는 그 영혼의 생명이 죽은 상태이고 성도는 영혼이 거듭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면으로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그저 존재할 뿐이지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거듭나서 영혼의 생명을 가진 자는 육신의 생명이 끝이 나도 그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고 주님이 재림을 하실 때 육신의 생명이 부활하여 부활체의 육신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함이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다시 부활하고 그 육신과 영혼이 다시 결합을 하여 영원토록 살게 되는 그 생명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원천이 그리스도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도 그 생명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이 나고 마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영원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몇 년쯤 더 사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고 또 살고 또 살아도 끝이 없는 풍성한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함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이 풍성함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지식을 배우시면서
  그 구속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 풍성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