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7. 2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82)
본문 : 엡 5:3,5
제목 :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사람들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라는 문제를 가지고 끊임이 없는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계란이 먼저라고 생각을 합니다.
진화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새가 알을 낳았는데 빨리 부화가 되지 못하고 있다가 그 속에서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켜서 닭 모양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해 놓고도 그들은 스스로 모순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다른 알이 스스로 변화를 일으켜서 계란이 되기까지는 수 천년 수 만년의 시간이 필요한데 알이 썩지 않고 수 천년 수 만년을 버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최근에 과학자들이 모든 생명이 그냥 마음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세포 속에는 아주 정밀한 설계도가 있어서 꼭 그대로 성장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닭이 먼저라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정자나 난자를 통해서가 아닌 장성한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모든 생물들도 씨나 알이 아닌 성장한 모습으로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교리 속에도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와 같이 끊임없이 논쟁이 계속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칭의가 먼저냐 성화가 먼저냐 하는 문제입니다.

칭의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하고 성화는 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하여 어떤 단계에 도달을 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이 견해는 천주교나 감리교 계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주장입니다)
기독교도 불교나 유교처럼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고 인간이 할 의무를 다 이행을 할 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칭의가 먼저이고 성화는 그 다음의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개혁주의 교회 주로 장로교회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성화되지 못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먼저 칭해 주시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장로교 목사이니까 당연히 이런 말을 하겠지만 성경은 분명히 칭의가 먼저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해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의로운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점점 그 의로운 사람으로 성장을 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서론에서 먼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순서상으로는 닭이 먼저요 칭의가 먼저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로 봐서는 알에서 닭이 태어나기도 하고 닭이 알을 낳고 하기 때문에 무엇이 먼저인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칭의가 먼저인 것은 사실이지만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동반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로서는 무엇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끊임이 없이 성화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매일같이 우리는 더 거룩한 모습으로 성장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없으면 결국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성도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음탕함과 더러운 것과 탐욕은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 자체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렇게 죄와 함께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된 삶을 사는 사람은 중생받지 못한 사람 즉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다녔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도 아니라 그냥 구경꾼으로 왔다가 갔다가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서론부터 좀 복잡하게 헷갈리실 것입니다.
정리를 해 드리면 계란이 계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면 계란이겠지 해도 닭으로 성장하기 전에는 무슨 알인지 잘 모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닭이 되었을 때 아 그것이 계란인줄로 알긴 했지만 이제와서 계란임이 확실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에 성장과정에서 닭이 아닌 오리가 된다고 하면 오리 알을 계란으로 착각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더 확실히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성장을 했을 때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성장을 하지 못하고 신앙인답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 때 사탄의 종을 하나님의 자녀로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반드시 그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성장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도로서 의롭게 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임을 기억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1.음행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본문 3절 말씀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행위나 탐욕은 그 이름조차도 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에게 합당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음행은 그 이름이라도 입에 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행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포르네이아'(πορνεια)입니다.
이 말에서 포르노(porno pornography)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합법적인 결혼 생활 이외에 빚어지는 모든 성적 부도덕을 지칭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것은 다 선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 선한 것을 잘못 사용함으로 악한 것들이 되어버린 예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이라는 것입니다.
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만들고 자녀를 낳고 하는데 너무나 필요한 것이 이 성이라는 것입니다.

성생활만큼이나 부부 사랑을 돈독하게 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부부 사이가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보다 각별하게 가까울 수 있는 것은 이 성이라는 것 덕분입니다. 
부부를 한 몸이 된다고 지칭하는 것도 이 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성 생활을 통하여 남남이 부부가 한 몸이 되어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게 되고
성 생활을 통하여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부의 사랑을 위해 가정의 형성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성이라는 것을 그 목적 외에 사용함으로 인해서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부부 사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이 성이라는 것이 잘못 사용되어짐으로 인해서 많은 가정들이 파탄에 이르고 많은 사람들이 비극을 체험하게 되고 많은 범죄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스럽고 신비하고 선해야 할 성이 악한 것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잘못 상용된 성으로 인해 가정이 파탄되어서 고통을 당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잘못 사용된 성으로 인해서 범죄자가 되고 감옥으로 가는 비극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잘못 사용된 성으로 인해서 병을 얻고 신세를 망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잘못 사용된 성으로 인하여 에이즈라는 아주 심각한 병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목회자 하기 수련회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님의 보고를 들었는데 지금 아프리카는 이 에이즈 때문에 심각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에이즈라는 잘못된 성으로 인한 병은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데 심지어는 어떤 한 동네는 온 주민들이 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에이즈를 잘못 사용된 성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 성을 잘못 사용함으로 인간 자신에게 나타나는 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심각한 경고로 이 에이즈라는 질병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으로 인한 범죄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악해지고 점점 더 확산되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의 성생활 이외에는 어떤 형태든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주 절대적으로 철저하게 반대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고 생각하지도 쳐다보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2.온갖 더러운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더러운 것"이라는 말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추한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에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온갖 더러운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더러워진 것은 성에 대한 윤리였습니다.
공개적으로 매춘이 성행을 했고 이미 동성연애가 성행했으며 신을 섬긴다는 사당에서조차 매춘이 자행되는 실정이었습니다.

당시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비록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와 있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런 지저분한 것들 사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하게 경고를 하지 않으면 교회 내에서도, 성도들 사이에서도 이런 더러운 일들이 자행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그런 더러운 것들은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철저하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성도라면이름조차 부르지 말아야 할 더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더러운 것에서 구원을 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다시 우리가 그 더러운 것을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너무나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거기에 물들지 않고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철두철미하게 경계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물들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28절 이하에 성도들에게 합당하지 못한 일 즉,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의 죄악상을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윤리에서 벗어난 이런 일들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덕에서 어긋나는 이런 일들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에서 어긋나는 일이라면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3.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하나님께서 선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잘 못 사용하여 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욕심이라는 것은 참 필요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식욕을 잃어버리면 건강을 잃게 되고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늘 식욕이 왕성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욕심이 있을 때 병마도 쉽게 물리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잃어버릴 때 쉽게 병들고 쉽게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도 오랫동안 영생토록 살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욕망이 없이 내버려 둬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을래 하는 사람에게는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욕심이 있는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만 그 욕심이 지나쳐서 탐심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탐심은 단순히 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탐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잘 살기 위해 더 축복을 받기 위해 노력은 해야 할 것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갖고자 하여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탐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입니다.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라고 했습니다.

욕심이 과한 나머지 나의 소유가 아닌 남의 소유를 빼앗아 오려는 것이 탐심입니다.
이웃의 것은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재물을 사랑하는 나머지 그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심은 우상숭배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이라고 했습니다. 


4.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문 5절 말씀에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것과 탐욕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성도라면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정도가 아니라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받게 됩니다.
그 특권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서론에 말씀 드린 칭의와 성화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그 의롭다 칭함을 받고 의롭다 인정을 받은 사람이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이 성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마치 의롭게 살아야 성도답게 살아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천국백성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음행이나 더러운 것이나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이 그렇게 오해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앞서서 말씀을 드린 대로 여기서는 그 순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를 보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십자가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결국에는 이렇게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이 계속해서 음행을 행하고 더러운 일을 행하고 욕심에 사로잡혀 이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위선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미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서 따로 세우신 성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악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저들과 어울려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신분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행할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