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4. 22.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15)
본문 : 요일 2:5-6
제목 : 예수님을 아십니까 2.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라는 사람이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해서 사회가 변화되어야한다는 책들을 썼다고 합니다.
어떤 청년이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먼길을 달려서 이 톨스토이의 집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 와서 그가 사는 집을 본 순간 청년은 그만 실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서 그런 훌륭한 글을 쓴 사람이라면 가난하게 검소하게 살 줄 알았는데 엄청나게 호화로운 집에서 잘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톨스토이를 불러내어서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글은 그렇게 쓰면서 사는 것은 그렇게 살지 않는 위선자라고 몰아 부쳤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얼굴이 빠개진 이유"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일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이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일부러 고의적으로 그러는 사람이 간혹 있겠지만 대부분은 잘 알지 못해서 고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믿고 생활했던 것들이 신앙생활의 일부이긴 하지만 핵심은 아니거나 목적이 잘 못되었거나 삶이 뒷받침되지 않은 이론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으로 두 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알되 어떤 사람은 외형적인 겉모습만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좀 더 깊이 그 속에 있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앎이란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계명대로 그의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 즉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
본문 5절 말씀에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 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신약성경의 가장 위대한 말 중에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많이 강조한 구절이고 또 그 의미가 참 소중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라는 찬송을 잘 아실 것입니다.
또 "주 안에 있다"라는 말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 안에 있다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알고 난 후의 바울의 삶은 예수님께서 그의 안에서 사는 삶이요 자신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삶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예수님 안에 있는 참된 축복을 누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우리 스스로는 결단코 의로운 사람이 될 수가 없는데 아주 간단하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의 주이이 되시며 인간을 망하게도 흥하게도 하실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가지신 분이시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는 공식 칭호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죄책감으로 시달립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책감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일 것입니다.

요즘 검찰청이라고 전화가 많이 온다고 합니다.
저도 한번 받았으니까 대부분 한 두 번씩 받은 것 같습니다.
여기 검찰청인데 1차 기일에 안 나왔으니까 2차 기일에는 꼭 출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알고 싶으면 9번을 누르라고 하고 9번을 누르면 이름이 뭐냐, 주민등록 번호가 뭐냐, 은행구좌번호, 비밀번호, 이런 정보를 다 빼내 가서 사기를 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조금씩은 죄가 있으니까 검찰청하면 벌벌 떨고 전화를 해서 묻는 대로 다 대답을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못 믿고, 남편은 아내를 못 믿고 부모는 자식을 못 믿어서 혹시 가족 중에 사고를 치지 않았나 해서 전화를 해 본다는 것입니다.

죄책감 서로간의 불신 이런 것들이 엉뚱한 사기를 당하게 하는 것이니까 서로 불신이 쌓이지 않게 이번 기회에 노력을 하셔서 서로 믿고 사는 가정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기를 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당신 내가 기도해 보니까 죄가 많아 당신 죄 용서 받으려면 헌금을 좀 많이 해야 되겠어 기도 생활도 좀 더하고 어려운 사람도 좀 많이 도와주고 그래야 되겠어라고 하면 홀랑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맨날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어디서 이상한 사람이 한마디 하면 어찌 그리 잘도 속아넘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다고 해도 주님 앞에서 회개함으로 이미 다 용서를 받아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2)예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내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나를 위하여, 나의 기쁨,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 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쁨, 예수님의 자존심, 예수님의 명예, 예수님의 영광,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속에 오셔서 나를 운전하셔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어 나가실 때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시 12: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 즉 손이나 발과 같은 각 지체가 되어서 그 몸이 워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2.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따라 행하는 사람
본문 6절 말씀에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온 환경에 따라서 그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누구를 많이 만나고 누구를 닮아 가느냐에 따라서 그의 성격이 형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가운데 욕을 심하게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살펴보면 가정에서 부모님이나 아니면 친구 중에 욕을 잘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본을 보이신 대로 사는 것이고 세상을 가까이 하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행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42:2-3)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예수님께서 능히 그것들을 제압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상한 갈대같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연약한 존재인 우리를 아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작은 권력만 있어도 그 권력을 휘두르려고 합니다.
작은 힘만 있어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성도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 연약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보호해 줄줄 아는 사람이 참된 성도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은 그 마음도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겸손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 예수님을 아는 사람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라고 하고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참 고집도 세고 좀 잘되면 교만하고 힘만 있으면 휘두르려고 하고 만나기가 무섭고 만나면 잔소리나 하고 꾸짖기나 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너무나 예수님 같지 않은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기 때문에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 가기보다는 이런 세상 사람들의 좋지 않은 성품을 닮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부드러운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교회에 가면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기대를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그리고 집사님이라도 머리가 하얗고 얼굴은 은혜롭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그런 분을 교회에서 만날 것을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많이 계시겠지만 그런 분들과 교제를 할 수 있는 자리에 서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도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늘 기도도 하고 노력을 하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만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저의 손을 잡는 사람이 예수님의 손을 잡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해 주시고
제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되게 해주세요
아직은 멀었지만 세월이 흘러 백발이 되면 그런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우리 청년들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장례식을 하게 되면 거기에 이런 말을 적어서 현수막 하나 걸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만나서 행복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미 그런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남은 생애를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번에 기호일보라는 곳에서 취재를 하고 갔는데 그 기사가 어디에 났는지 모르시죠
월요특집 "당신이 있어 행복한 세상"이라는 코너였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다짐을 하는 마음까지도 기특하게 여기셔서 별로 한 일이 없는데도 그렇게 칭찬을 해 주시고 격려를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만나 보고 싶어하는 사람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당신 만나서 정말 행복했어 이런 말을 듣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완성된 사람
본문 5절 말씀에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이라는 해석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의 사랑이라는 해석과 
우리가 우리 서로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완성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잘하나 못하나 모두다 주님 안에 있으면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 사랑이 더 강하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때 그 사랑이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그 사랑이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때 그 사랑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면서 산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저 형식적이고 위선적이고 말로만 사랑하는 사랑만 있을 뿐입니다.

제가 여러 성도님들을 사랑한다고 늘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보면 참 한심합니다.
먹다가 남는 것 좀 나누어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쓰다가 남은 것 좀 주면서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좋은 것 소중한 것은 주지 않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나누어주거나 소중한 장기를 떼어서 나누어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있으나마나 한 것 가지고 나누어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 희생하신 그런 사랑입니다.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좀더 귀한 것을 좀더 많은 희생을 가지고 나누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해지게 하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아십니까 라는 주제로 두 차례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외형적인 예수님의 모습만을 보고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진리 즉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를 아는 것이 더 깊이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즉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정말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 안에 즉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이 되어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마시고 실천을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여러분 안에서 완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도 성숙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사랑도 더 깊이 있는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