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4. 1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14)
본문 : 요일 2:3-4
제목 : 예수님을 아십니까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2:3-4) 

오늘은 "예수님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 예수님을 아시지요
아마 우리 나라에 살면서 나는 예수님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잘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까잇거 대충"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어떤 개그맨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그까잇거 대충"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웃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대충대충 대강 적당히 알고 사는 이 시대를 풍자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안다"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히 대충 안다는 말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좀 더 심도 있게 깊이 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을 다 압니다.
그 사람 이름이 노무현이고 대통령이 되었고 좀더 아는 사람은 그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고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라는 것과 그의 아내가 누구며 형이 누구고 자란 배경이 어떠했는지를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 안다고 해서 나는 노대통령을 잘 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좀더 깊이 그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한두 번 만난 적도 있고 함께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눈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는 노대통령을 잘 안다 
만나서 함께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고 같이 일도 해서 잘 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오늘 본문이 말하는 안다는 말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노대통령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그의 아내일 것입니다.
그와 함께 늘 살아왔고 그 속 내막을 잘 알뿐 아니라 함께 부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안다는 경우는 이런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연애를 해 보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을 소개 받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 사는지 어떤 학교를 나와서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를 들어서 압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것을 안다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잘 알기 위해서 가끔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함께 식사도 하고 구경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아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을 해서 함께 살아야 비로소 좀 안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함께 살아 보면 연애할 때 볼 수 없었던 장점이나 단점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는 이렇게 형식적으로 외형적으로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처럼 함께 살면서 알아 가는 속 깊이 아는 것과 그 아는 것을 실천하고 사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어보시고 나는 예수님을 어디까지 아는가를 한번 체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실천하면서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예수님만을 아는 것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셨던 모습만을 듣고 배워서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에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배경과 일어난 이야기들이 잘 소개되어서 다들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 까지도 성탄절을 알고 그 풍습들을 따라서 즐겁게 보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시는 모습도 조금은 소개가 되어서 알고 있으며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가르치셨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을 많이 읽어보셔서 잘 아실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까지도 사랑해 주셨던 예수님의 고마우신 마음도 많이 아실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것도 들어서 알기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외형적인 것을 아는 것도 참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런 것을 안다고 예수님을 안다라고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런 외형적인 모습만을 듣고 배워서 알고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목사님들까지도 예수님의 이런 모습만을 보고 그 모습을 흉내내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예수님처럼 기도해서 병을 고쳐 보려고 평생을 애쓰며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편에 서서 살면서 그것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겠다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보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사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자체를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외형적인 모습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깊이 알 수 있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박 겉핧기 식으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초지식만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참된 신앙생활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 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직접 성부 하나님께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고 어려운 삶을 사셨고 가난한 것이 복이라고 하셔서 별 관심이 없어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모든 생사화복의 주인이시고 이 세상에서의 복도 많이 주시는 분 같이 생각되기 때문에 교회도 아예 기독교나 예수교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바로 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늘 성령충만을 외칩니다.
성령충만을 받아서 예수님을 잘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을 받아서 기적들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보다는 성령님을 더 좋아하고 더 가까이 하고 성령충만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다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고 다 같이 하나님으로 모시고 섬겨야 할 분이심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섭섭하지 않으시겠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오라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의 뜻을 따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의의 기준으로 삼으신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이 예수님을 알게 하고 만나게 하는 것 보다 어떤 프로그램들을 더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오면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된다라는 자랑보다 우리교회에 오면 병이 낫는다, 우리교회에 오면 사업이 잘 된다, 우리 교회에 오면 가정이 화목해진다라는 것을 자랑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잘 아는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2.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
4복음서가 예수님의 외형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서신서들은 예수님 속에 있는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나 에베소서를 비롯한 서신서들은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실은 목회를 하기 전에는 굉장히 율법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나 스스로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함으로 복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지옥에 가고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 벌을 받고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같은 사람을 본받아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새삼 더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더 깊이 알기 시작을 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가장 감명 깊게 들었던 말이 이 말입니다.
세계역사의 중심은 구속사이다(즉 성경이다)
구속사(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교회를 통하여 전파되며 
교회의 강단을 통하여 선포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의 강단은 역사의 가장 핵심부에 자리잡고 서 있다.
이 역사의 중심부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이 일을 위해서 세계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세상의 중심인 이 강단에서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강해하여 설교했던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 있는 더 심오한 진리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에 대한 기록이라면 서신서 특히 로마서와 에베소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뜻이 있는지를 설명해 줌으로서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고 내가 또한 세상을 향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난 뒤에 세상적으로는 망한 사람입니다.
공부도 많이 했고 권력도 있었고 야망도 있었고 잘 나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알고 난 뒤 여기저기 쫓겨 다니며 굶주리고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 잘못 만나 망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난을 당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자기 자신도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보훈 천국의 비유들 보배로운 말씀들을 우리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한 기적들 우리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그리고 세상에서 괄세 받는 자들을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만큼 자랑스럽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는 그 귀한 능력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진리가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3.그의 계명을 알고 지키며 사는 사람들
본문 3절 말씀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로 알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장 깊이 안다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면서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외형적인 모습을 아는 것도 아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들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고 해서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진정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자이거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계명을 지키며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계명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계명은 십계명을 포함한 신구약 성경의 모든 계명들을 포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더 적극적으로 이기에 계명은 그 모든 계명들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배우게 되겠지만 7절 이하에는 오늘 본문이 말하는 계명 즉, 그 새 계명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은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새 계명을 실천함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서 살펴 본대로 가장 잘 아는 것은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부부관계처럼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함께 살 때 서로를 아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지고 함께 동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함께 동행하면서 살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계명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 보다 그것이 부귀영화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천국보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좋아하고 산다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그 아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안에 있는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거나 그 아는 앎이 초보에 불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아십니까
이 질문 앞에 확실한 답변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외형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고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진리를 실천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