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 1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02)
본문 : 요일 1:1
제목 :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완전한 사귐, 충만한 기쁨"이 요한일서의 기록목적이고 2007년도 우리교회의 표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바른 사귐이 있을 때, 성도와의 사이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이 되고 바른 사귐이 있을 때 참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좋은 집이나 좋은 차나 인간적인 출세가 불행과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이웃간에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지 못한 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방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중간에 서서 나쁘게 말을 옮기는 사람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면서 좋은 말만 하고 좋은점을 전해주면 사이가 좋아질 것인데 왠지는 모르지만 말을 옮기는 사람의 대부분은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로 옮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죄악된 인간의 마음은 사람들이 서로 좋은 사귐을 갖고 행복해 하는 것을 배아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자기를 좋아 보이게 하기 위해서 남을 나쁘게 해야 되기 때문에 자기를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 때문이라고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다른 사람을 흉보기를 좋아하고 쓸데없이 나쁜 말을 옮기는 사람이 있으면 조심을 하시고 그 사람의 말을 가슴에 담지 말고 흘려 들으시기 바랍니다.
직접 들은 말이 아니면 그 말에 너무 크게 반응을 하지 말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각없이 사탄의 종 노릇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행동하는 사람은 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말만 옮기시기 바랍니다.
나쁜 말은 다 듣고 흘려 보내시고 좋은 말만 기억하고 옮기시면 됩니다.
내 말 한마디가 사람과의 바른 사귐을 방해하고 그 사람의 기쁨을 방해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관계의 사귐도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좋은 것들을 그대로 우리가 받고 안다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좋은 사귐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세력이 자꾸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을 나쁘게 인식을 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귀는 것보다는 피하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탄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가리고 하나님을 나쁘게 인식을 시키고 하나님은 없다고 인식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쁘게 인식하게 만들고 교회를 비판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목회자를 나쁘게 인식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하는척하면서 나에게 기쁨을 빼앗아 가는 사탄의 세력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시대의 배경도 사실 이런 하나님을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고 왜곡시켜서 올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신앙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세력들이 교회 안에 많이 침투했기 때문에 요한이 다시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가 40여일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부활을 증거하시고 승천하신 후 약속대로 성령님께서 오셔서 기독교의 교회가 시작을 했습니다.

교회가 시작이 되고 한 동안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직접 배웠던 열두 제자들과 여러 성도들이 교회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시작된 후 4-50년이 지난 후에는 당시의 제자들과 성도들이 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이야기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그 귀하신 분이 천한 사람의 몸을 입을 수가 있었겠는가 아마도 사람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게 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시작을 해서 여러 가지 잘못된 이야기들이 등장을 하게 되어서 성도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보고 듣고 만져 본 바 확실한 사실들을 바르게 전해줌으로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바르게 하게하고 성도와의 사귐을 바르게 해서 참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요한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을 하면서 직접 듣고 보고 만진 바 확실한 사실들을 우리도 다시 배움으로서 신앙생활에 새로운 활력소를 집어넣어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진리의 길에 대한 확신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구원을 이미 받았고 천국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없는 사람은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즐겁고 기쁘고 소망이 넘치고 행복해야할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함으로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함으로 우울하고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왕 신앙생활을 하실 것이라면 머뭇거리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진리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지심으로 기쁘고 즐겁게 힘있게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1.생명의 말씀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가진 복음의 핵심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십자가의 복음이 가는 목적지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생명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이 짧은 세상 잠시 잠깐 살면 없어져 버리는 허무한 생명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허무한 생명을 가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가지게 해 주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처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말씀이란 때로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리키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1)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말씀 즉 로고스라고 했을 때 그 단어 안에 숨은 뜻을 이미 말씀 드려서 잘 아실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의 질서를 제정하시고 그 질서대로 운행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이심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우주만물의 주인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2)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천국 복음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시고 우리가 그 영원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 복음만을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이 천국 복음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고행이나 선행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교회 내에 많은 이단 사상이나 이단적인 가르침이 많이 들어와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한 중요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여기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믿음에 관해서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그렇게 심각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에는 별 관심이 없고 육신의 짧은 인생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성경의 중요한 핵심이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본문 말씀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태초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아르케(αρχη)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문처럼 "태초부터"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또 "처음부터"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을 처음부터라고 번역을 하면 기독교의 교회가 세워지던 처음부터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회의 처음 시작부터 이 생명의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중간에 누가 만들어 붙이거나 삽입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처음부터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진리는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시작된 그대로 변함이 없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일점 일 획도 없어지거나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뀜에 따라 교회가 여러 가지의 모양을 변한 것은 많이 있습니다.
찬송가도 바뀌고 예배 드리는 형태도 바뀌고 전도의 방법도 바뀌고 기도하는 모습도 바뀌고 신앙생활을 하는 형태들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떤 때는 성경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찬양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회의 봉사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성령님의 은사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언제나 변함이 없이 교회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것이 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천국을 우리가 사모하면서 살아야 하고 그 천국을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목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변하는 세월 따라 이 생명의 말씀까지 변하게 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해도 처음부터 시작된 이 생명의 말씀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또 이 태초라는 말씀은 기독교의 교회가 시작되는 그 시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세상이 생긴 처음부터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우리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그 시점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타락하여 쫓겨난 그 시점부터 교회는 생명의 말씀은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하여 이미 배운 대로 예수님은 태초이전부터 이미 계시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 시작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태초부터 맨 처음부터 이렇게 표현을 할 뿐이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또한 태초나 처음이나 이 말씀은 제일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이 처음이요 핵심이 처음이요 가장 우선적인 것이 처음입니다. 

교회에 다니시면서 모든 것은 다 모르셔도 됩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핵심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 이 중요한 핵심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만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는 기적들에 마음이 있었습니다.
병이 낫고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먹고 남았을 때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선포할 때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실 때 다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라고 했습니다.


3.우리가 체험한 생명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란 수식어 외에 몇 가지 수식어를 더 붙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들었던 것','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은 그저 누가 전해준 것을 들었거나 책이나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 자신이 직접 듣고 보고 주목하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 그들이 말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나 또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때 그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태반이나 살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 직접 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그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부활의 증인들 중에 핵심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특별히 주목하여 보고 만져 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했습니다.
노아의 이야기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나 모세 다윗 시대의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한 가운데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키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성경말씀의 모든 이야기가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단군을 우리의 시조로 생각하고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단군의 이야기는 신화 일뿐 역사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사실 불교의 경전은 한 시대를 산 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깨달음의 기록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저 보통 사람들 보다는 좀 더 많은 생각을 한 사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의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인 예수님에게 직접 말씀을 듣고 직접보고 주목하여 만진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는 증거들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들 생명의 말씀을 이론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의 삶에서 체험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기도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헌금을 바쳐 보고 선한 일을 해 보라고 하는 것은 그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해 보고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구하면 할수록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을 하면 할수록 신앙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고 듣고 만진 바이고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지는 못해도 말씀의 순종을 통해서 체험을 하고 증거를 받았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