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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3. 2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 13)

  본문 : 막 3:28-30

  제목 : 사하심을 얻는 죄와 얻지 못하는 죄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성경은 인간에게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죄를 짓고 어떤 벌을 받았는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후손인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죄를 범하고, 어떻게 그 죄에 대한 벌을 받는가를 기록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죄에 대해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으로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의인으로 인정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갈 수 있는 영원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 같이 교회를 다니는데 그 죄를 용서받는 방법은 아주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함으로써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그런 노력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만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개혁주의자들을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속에 있는 타락한 죄의 습성으로 인해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죄에 대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 그 죄 가운데 어떤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가 없고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사하심을 얻는 죄와 얻지 못하는 죄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설교를 잘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잘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가야 하는데 그 중요한 일에 방해가 되는 그 죄만은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함을 얻는 죄가 있습니다.

 

 본문 28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다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모독하는 일도 다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용서함을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죄는 다 용서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짓는 죄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짓는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에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든지 용서받든지 해야 합니다. 죄를 그대로 두고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참 불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도 죄짓고는 못 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에게 죄를 지었을 때 그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움을 당합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다가 병을 얻기도 하고 그런 마음 때문에 모든 일이 잘 안되어서 더 큰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가지 죄 용서받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이 세상에서도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고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 서로 화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서로 경쟁하고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서로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벌이고 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고 생명을 잃기까지 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는 것을 질투해서 죽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이 그런 죄를 짓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작은 잘못이라도 서로 화해하고 더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 산상보훈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죽인 살인죄나 사람을 미워하고 욕을 하는 것은 다 같은 지옥 불에 들어갈 죄라고 하시면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화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미워해서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해서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화해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원수 관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불행한 삶입니다. 서로 생각만 해도 화가 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관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런 사람이 생기면 하루속히 화해하고 관계를 풀어야 합니다.

 

2)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잘못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그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은 죄를 용서받고 바른 삶을 사는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죄들을 많이 짓고 삽니다. 잘못을 범하고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다윗왕은 그래도 이스라엘 왕 중에서는 제일 바르고 정직한 왕이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그도 악한 사람도 잘 범하지 않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신하를 치열한 전쟁터로 나가게 해서 거기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그 죄를 지적했을 때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서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회개로 인해서 그가 비록 악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또 특별히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으로 영광된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다 같이 죄를 지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유대인들에게 판 사람이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 난 후에 두 사람의 행동은 매우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알았지만 회개하려고 하지 않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회개한 베드로는 용서를 받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서서 귀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비참한 죽음으로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잘못한 것은 알았지만 회개하고 용서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다짐하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죄에 더 빠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더 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교만함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을 기회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게 되고 결국은 그 죄로 인하여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3)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 거기에 맞는 짐승을 제물로 드리고 죄 사함을 받게 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 죽게 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죄가 이렇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법칙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주심으로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고 바르게 살기 위한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나 모든 범죄자를 다 죽이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대신에 짐승을 잡아 죽여서 제물로 드림으로 죄를 용서받고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제사 제도를 통하여 용서를 받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 놓고 더 죄를 짓는 기회로 이용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보다는 죄를 짓고 또 제물을 드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죄를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더 짓게 되었습니다.

 

4)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죄를 용서받는 방법은 일시적인 것이고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하고 화해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화해를 하고 형식적으로 용서한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해한다고 그 화해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하는 것도 그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이지 모든 죄가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한다고 해도 또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늘 회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도 죄를 지을 때마다 바쳐야 하는 것이고 죄마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 제물을 바치고는 오히려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더 짓게 되기 때문에 완전한 용서의 길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죄를 사함받게 해주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속에는 앞에서 말한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이 믿음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가장 기초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약시대 때 죄 사함을 위해서 드렸던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짐승은 죄를 지을 때마다 잡아서 바쳐야 했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는 제물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 사이에서 화목한 사이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성도와 성도 간에도 믿음으로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지은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신 것은 결국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용서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본문 29-30절 말씀에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살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지은 죄들은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노력으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이 죄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죄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성령을 모독하는 자의 죄라고 했습니다. “성령 모독죄”, “성령 훼방 죄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했습니다. ‘모독이라고 번역된 단어(βλασφημέω)비방하다’ ‘훼방하다’ ‘욕하다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본문에서의 뜻은 신성한 것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고 모독하는 말을 하고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성령님을 모독한다는 말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비방하고 욕하고 방해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엄청난 일을 하는데 일개 인간이 그 하나님의 일을 우습게 여기고 방해하려는 가소로운 행동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바알세불이라는 귀신의 왕의 도움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렸고 성령님을 사탄의 졸개인 귀신이라고 모독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로 오심을 부정하고 비난하고 방해했습니다. 그런 죄가 성령 모독죄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흉악한 죄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 모독죄는 넓게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을 모독하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짓는 죄도 많이 있지만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해주시려는 그 귀한 뜻을 알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시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비웃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자신이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예수님을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고 하셨는데 그 은혜를 비웃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도 오셔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해주십니다. 그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을 거부하는 것이 성령님 모독죄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성령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믿는 자답게 세상 사람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게 해주시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진실되게 고백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훼방죄이고 모독죄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그러나 그런 죄들은 다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무슨 죄이든지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고 죄 사함을 받는 유일한 길을 거부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님을 통하여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 귀한 것을 거부하거나 우습게 여기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모독하는 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위대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진실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그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