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2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 08)

  본문 : 막 2:1-5

  제목 :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1.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중국 속담에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박완서라는 유명했던 작가가 갑자기 쇠약해진 자신을 보면서 이 중국 속담을 상기시키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이루고 싶어 안달하며 무리를 한다. 땅 위를 걷는 것쯤은 당연한 일인 줄 알고 말이다.”

 

 살아가면서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건강입니다. 스스로 일어날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서는 그렇겠거니 생각하지만 젊은 사람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 불행을 겪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는 기적 같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중풍 병자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이 사람의 나이가 몇 살쯤 되었는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분위기로 보아서는 나이 들어서 걸린 병이 아니고 아마 젊은 사람이 몹쓸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중풍은 뇌의 혈관이 막혀서 발생하는 병을 말합니다.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거나 전신이 마비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중풍 환자는 사람들이 들것을 가지고 옮겼다는 것을 보아서 전신이 마비되어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셔서 어떤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가버나움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질병을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셨음을 보았거나 소문을 들어서 알았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풍 병자도 그 소식을 들었고 마침 그를 아는 친구들이 들것에 중풍 병자를 눕히고 네 사람이 들고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그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환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지혜롭게 방법을 찾았는데 예수님이 계시는 집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그것을 본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에 걸린 환자를 고쳐주셨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들것을 들고 일어나서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2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중풍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는 장면을 살펴볼 것입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서론에서 본문의 내용을 대강 말씀드렸습니다. 중풍 병자가 고침을 받는 장면에서 특이한 점은 그들이 지붕을 뚫으면서까지 환자를 예수님 앞에 내렸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를 고쳐주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환자나 그들을 메고 온 사람들은 환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있음을 아시고 그를 고쳐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심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쳐주실 때 대부분은 그냥 아무런 조건 없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시거나 조건을 제시하시거나 믿음을 요구하시지도 않으시고 그냥 병든 자가 예수님께 오면 다 고쳐주셨습니다.

 

 개중에는 그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신 일도 있습니다. 1장에 기록된 나병 환자를 고쳐주실 때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된 맹인 두 사람을 고쳐주실 때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20장에 기록된 나인성에 사는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신 것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살려주셨다고 했습니다. 한 과부가 아들 하나 키우면서 그 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는데 청년이 된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시신을 메고 나오는 사람들 뒤에서 슬피 우는 과부의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거나 그들이 어떤 좋은 일을 해서도 아닙니다. 죄로 인해서 앞을 보지 못하고 몸이 썩어가고 병들어 죽어가는 인생들을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여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배반자들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당연히 병들고 죽어가는 인생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참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우리가 그 죄로 인하여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불쌍한 인간임을 알 때 복음을 알고 구원의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십니다. 작은 선한 일 하나 하고 대단한 사람처럼 자랑하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세상의 돈이나 출세를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초라함을 잊고 자신이 죄임임을 잊고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사람임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믿음보다는 알량한 선행에 의지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2)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심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실 때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것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혈류 증을 앓던 여인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시면서 그녀의 믿음이 병 고침을 받게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맹인을 고쳐주실 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할 때 그들이 믿음으로 행한 행동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중풍 병자는 믿음으로 지붕을 뚫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맹인들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붕을 뚫는 용감한 행동이나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고쳐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행동이나 그냥 예수님의 옷만 만지는 작은 행동들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언제든지 그런 행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 믿음을 따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기 위해서 그 앞으로 오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때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는 좀 다릅니다. 죄 사함을 받거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 육신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에도 행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믿음은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하는 엄청난 믿음이요 위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이 믿음도 진실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믿음을 진실되게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위대한 믿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진실되게 고백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된 고백이란 고백할 때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진실한 고백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 고백은 진실한 고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최소한의 삶의 법칙이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배드리며 사는 삶입니다. 나쁜 짓 하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삶입니다. 나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의 진실된 고백이 우리에게 엄청난 복을 받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일시적으로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질병이 영원히 걸리지 않도록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살게 해줍니다.

 

 그런 질병의 근원인 인간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받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외치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이 정말 위대한 믿음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본문 5절을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붕을 뚫고까지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병이 나았으니까 일어나서 가라고 하셨으면 별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마침 어떤 서기관들이 와서 보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자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7)라고 했습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만이 죄를 사해주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개 한 인간이 죄를 사해준다고 하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사칭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서기관들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겉모양뿐만 아니라 속마음까지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 죄 사함과 병 고침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2:9)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라고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잘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죄 사함을 받는 일이 어려운 일이고 병을 고치는 일도 사실 어렵기는 하지만 죄 사함보다는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어려운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서기관들은 그 어려운 말씀에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생각은 죄 사함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일개 인간이 하나님인 척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병을 고쳤으면 그냥 일어나 걸으라고만 하면 되는데 왜 죄 사함까지 이야기하면서 신성 모독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아마 예수님이 사람들을 속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어나 걸으라는 말은 당장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중풍으로 꼼짝 못 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병은 고쳐주지 못하고 그냥 거짓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거짓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죄 사함보다 병 고침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 사함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죄 사함보다 병 고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영적인 일보다 육신 적인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죄 때문에 지옥을 가고 말고는 별 관심이 없고 우선 육신의 건강이나 평안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죄 사함이니 그런 말 하지 말고 육신의 병이나 고쳐주시고 이 땅에서 복을 받아서 잘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의 마음을 아시고 병을 고치는 것보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으로 죄 사함이 더 어렵고 중요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죄를 사하는 권세

 10절 말씀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일어나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시비 걸 것을 아시면서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서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중요한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병이나 고치고 귀신이나 쫓아내려고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라고 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문제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해결해야 하는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영원한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고 난 후에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젊어서 마음대로 살다가 나이 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까짓 죄 용서받는 일에 뭐 일생을 허비하고 즐거운 삶을 포기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믿음을 가질 기회가 점점 줄어듭니다. 금방 세월이 가고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엄청나게 중요하고 꼭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해결해야 할 이 죄 사함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빨리 확실하게 믿음을 가지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3)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작은 자로 번역된 단어는 나이 많은 사람이나 스승이 아랫사람이나 제자를 부를 때 쓰는 다정다감한 호칭이라고 했습니다. ‘얘야혹은 아들아라고 부르는 다정한 부름입니다.

 

 그동안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사람이고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영원한 지옥에 갈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다정다감한 호칭으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몸을 쓰지 못하고 드러누워서 남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살았던 중풍 병자는 모든 사람에게 눈치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다정한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살았을 것이고 늘 눈치나 살피면서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이런 다정한 음성으로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너무나 가슴 벅차게 하는 부르심이었을 것입니다. 그 부르심을 받고 또 죄 사함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에 다른 능력이 아니라도 벌떡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다정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사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진노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중풍 병자가 예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아서 죄 사함을 받고 그 지긋지긋한 투병 생활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흉악한 죄인에서 예수님의 다정한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변함없이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