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도 여러분!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쌓아야 할 덕목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는 착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짊()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智慧)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용맹(勇猛)스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절(禮節)을 지킬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갖추어야 하고, 또한 쌓아가야 할 덕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겸손(謙遜)”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가장 가지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겸손이기도 합니다. 이 겸손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3절에서 정의한 것처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바로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낮아지는 것을 비굴하게 여기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겸손은 또 다른 오해를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고자 하지만 주변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접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겸손은 어렵습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성숙시키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진정 겸손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분열과 다툼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분쟁이나 다툼이 크게 일어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냥 놔두면 언젠가는 이것이 교회를 크게 어지럽히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 있는 이 틈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하든지 그 틈이 크게 벌어지게 만듭니다. 교회가 분열과 다툼으로 흔들리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교회가 깨어지고, 공동체가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있는 비록 작은 문제라 할지라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겸손(謙遜)”입니다. 이 겸손만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다툼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서로가 나 잘났다고 내세우면 교회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겸손하여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면 그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겸손이라는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겸손에 대해서 최고의 모범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즉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존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에서 기준이 되는 존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예수님처럼 한다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겸손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라고 말합니다.

 

본문 5절에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마음은 본래 이것(this)”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품으라(φρονέω)”라는 것은 얻으려고 애를 쓰라, 전념(專念)하라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추구하고 구현해내야 하는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인간에서 이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것을 반드시 구현해 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야만 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겸손의 궁극적인 모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겸손의 모습을 따라간다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겸손할 때 교회 안에는 허영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자신을 부정할 때 교회 안에서는 다툼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영과 다툼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겸손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그 겸손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29).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20:28).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13:12).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26).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요,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대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겸손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을까요?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겸손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겸손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진리 하나가 있는데 바로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3절에서 이 삼위일체에 관하여 신격의 일체로 한 실체와 능력과 영원의 삼위가 계시니,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께서는 태어나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으시며,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영원토록 태어나시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토록 나오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고귀하고 심오한 진리입니다. 이는 억지로 해석하려고 헤서도 안되고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단들은 바로 이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지식이나 이해, 경험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그 한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삼위 하나님은 나누어지지 않으시지만 분명하게 구별되신다. 다만 삼위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동일하시다. 따라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삼위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그분께만 충성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가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본문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본체(本體;μορφ)”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형태, 외적인 모습,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하나님에게 적용되면 하나님의 가장 깊은 본질,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질과 성격을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시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성(神性), 곧 하나님의 본체를 지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일체(一體)”의 부분을 해석하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이 본체는 창세기 126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라는 말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다라는 말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본체는 근본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하지만 형상은 본질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요, 일시적인 태도나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시다라는 것은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한 미래까지도 항상 하나님의 본질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결국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본문 6절에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아기 시절과 유년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아마도 청년기를 보내면서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가정의 장자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모습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 3년의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때로는 배고픔을 겪으셨고, 사탄과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마지막은 정말 비참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에 맞으셔야 했고, 십자가에 매달리셔야 했습니다. 끝내는 죽음의 관문을 지나셨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의 제약 속으로 오신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그 만물 안에 제약을 받으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모든 인류의 창조자요 주인이신 그분이 그 피조물들에게 매를 맞으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분이 생명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데 죽음의 관문을 지나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창조주요, 통치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많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비록 육신을 입고 계시지만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피조세계에 오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비록 시간의 제약 아래 있는 것처럽 보이지만, 그분은 모든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의 제약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은 만물을 초월하는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셨지만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참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인자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인도하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과 동일하게 모든 피조물로부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가 뭐라해도 우리가 ()”로 믿어야 하고 고백해야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창조물입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저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상속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분께 경배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분께 우리의 모든 삶을 맡겨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을 사랑해야 하고, 그분께만 충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셨습니다.

본문 6절에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되는 이러한 자신의 존재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비우셨습니다. 여기에서 취한다(ρπαγμός)”라는 것은 붙잡다. 빼앗다. 잡아채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본래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다른 이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계속 붙잡고 놓치거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이미 하나님과 동등됨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생각을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시며, 하나님으로서 누리실 모든 영광을 충분히 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당신이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분은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 사시는 그 어느 한 순간도 그분의 신성(神性)에 있어서는 제한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자신을 비우는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그분이 자신을 비우심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셨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분의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에 대하여 완전한 자유자이십니다. 그분 자신이 율법의 창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자신이 율법의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율법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는 분이심입니다, 오히려 그 율법이 그분을 향하여 존재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됨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은 그 율법을 어길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죄의 짐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율법 아래로 오셨습니다(4:4-5). 친히 율법에 순종하셨습니다. 나아가 그 율법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죄인이 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그 백성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고 죽으시는 한 마리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1:29).

 

둘째는 완전한 부요하심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분은 심지어 이 땅의 모든 생명까지도 당신의 소유에 두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또한 그 창조하신 만물을 당신의 영원한 뜻을 따라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에 오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서 사시는 모든 시간 동안 빌리는삶을 사셨습니다. 여인의 몸을 빌리셨고, 구유를 빌리셨고, 말씀을 전하시기 위한 배를 빌리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빌리셨고,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을 하기 위해 다락방을 빌리셨고, 끝내는 무덤까지 빌리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가장 부요하신 분이시면서도 가장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8:20).

 

셋째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고, 함께 누리셨던 것입니다. 모든 천사와 스랍들까지도 얼굴을 가리고 경배하던 그분의 영광입니다(6:1-3). 그런데 이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53:3).

 

넷째는 독자적인 직권을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에 있어서 당신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5:30).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종처럼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5:8).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가장 높은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가장 고귀한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은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가지시고 누리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마땅히 포기해야 할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포기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지금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권면은 단지 저들에게만 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오늘 광성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으로서 누리셔야 하는 모든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바로 우리를 위해서 포기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영원한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요?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나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땅히 그분께 드려야 할 것까지도 내 것처럼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주님의 겸손을 본받아 나 자신을 비우고, 포기하고, 오직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겸손과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