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립보서 127-28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질문하면 대답을 해야 하는 사람은 참으로 막막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렵고 힘든 일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이지만, 같은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실 이 질문 자체가 너무나도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마다 내놓는 답변을 종합하면 하나로 모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사람답게, 남자답게, 여자답게, 아빠답게, 엄마답게, 아들답게, 딸답게, 어른답게, 아이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답게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말로는 참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 이를 나타내며 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자답게 살고 있습니까?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까? 목사가 목사답게, 장로가 장로답게, 집사가 집사답게, 권사가 권사답게, 성도가 성도답게 산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답게 사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옥에 갇힌 바울, 자신은 비록 옥에 갇혔지만, 이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이루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생사를 초월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자신이 석방되고 빌립보를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자신이 앞으로 만나게 될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을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어려움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저들의 어려움과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권면하는 내용을 통해서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 있었던 문제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무엇인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단지 저들 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제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교회는 이 땅에 없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아버지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라고 하지만, 아직은 죄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자들로 구성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권면하는 내용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를 말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 개개인이 성도답게 서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답게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됩니다. 복음의 영광이 회복되고, 교회의 영광이 회복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게 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권면한 첫 번째의 덕목으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상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본문 27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합당하다(ξίως)”라고 하는 표현은 어떤 기준이나 조건 따위에 꼭 알맞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4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0절에서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했고, 데살로니가 212절에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고, 에베소서 41절에서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오직(μόνον)”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헬라어 용법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빌립보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고,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최우선에 둡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최우선에 둡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나 권력에 최우선을 둡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들이 최우선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선순위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가장 많은 관심과 시간과 열정을 쏟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우선순위의 앞에 있느냐에 의해서 그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또한 생활하라(πολιτεύομαι)”라는 말은 시민이 되다,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의 헬라적 개념에서의 시민은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민이라 함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신의 극대화된 능력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와 책임을 다 감당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즉 참된 시민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시민답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코 무시하거나 뒤로 밀어놓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표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우리가 이후에 보겠지만 빌립보서 320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복음을 믿는 사람답게,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삶이 아닙니다. 공동체에 속한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요, 백성의 삶입니다. 이는 지금 빌립보 사람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시민이라고 하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이라는 것은 엄청난 자랑거리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자부심과 자랑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입니다. 나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즉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분의 생애,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재림의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는 소식입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능력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성도에게 있어서는 처음과 마지막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이요, 최종 목적입니다. 결국 복음은 성도의 전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면 우리는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서 최우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 세상 사람들이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을 우리도 우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호소하고 권면하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성도답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복음을 가장 우선하는 삶, 복음이 이끄는 삶, 복음을 목적으로 삶는 삶,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삶, 복음 때문에 하루를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이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아가는 삶이요, 이 어두워진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실 28절의 끝부분에 있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라는 표현이 본문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는 너희에 관한 이 일들을 듣고자 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같이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들에게 관련하여 듣고 싶은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바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원하는 빌립보 교회의 모습,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복음에 합당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두 가지의 모습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먼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서서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의 한마음(νπνεύματι)”같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선다(στήκω)”라는 것은 굳게 서다, 확고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선다는 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군사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아무리 전투가 치열할지라도 자기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전사들의 불굴의 용기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위협하고 도전하는 무리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확고하고 결연하게 서 있어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위협이나 고통이 따른다 할지라도 복음에 관하여는 그 어떤 양보나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서 조금도 물러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는 한 뜻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협력한다(συναθλέω)”라는 것은 군대나 단체 경기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군대나 단체 경기에서는 어느 한 사람만의 능력으로 승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얼마나 잘 뭉쳐지고 단합이 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가들이 모여있는 오케스트라라 할지라도 지휘자에 의해서 합해지지 않으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굳게 뭉쳐야 합니다. 서로의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장점과 단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단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복음의 신앙은 단순한 교리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생긴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리적입니다. 그래서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 알지 못하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배우고,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으로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그 지식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런 단순한 지식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복음은 근거로 하는 믿음에 굳게 서서 한 뜻을 가지고 복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유기적인 기관입니다. 나 혼자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정의할 때,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고 성령의 보증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합니다. 즉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모임입니다. 또한 교회의 기초는 복음입니다. 복음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져 가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협력해야 합니다. 복음이 흔들리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복음이 흔들리면 우리의 믿음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신앙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마음을 합하고 뜻을 합해야 합니다. 하나의 교회 안에 복음을 향한 두 마음이 있고, 두 뜻이 있다면 그 교회는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협력을 해야 세워집니다. 교회에서는 옳은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유익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참으로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삶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준을 내세우다 보면 교회는 방향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늘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 편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내 뜻과 달라도, 내 생각에는 맞지 않아도, 그 일에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더욱 유익한 일이라면 나 자신은 완전히 포기하고 그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 곧 천국 시민권을 가진 성도의 마땅한 삶입니다.

 

 

둘째로,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28절에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대적하는 자는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외부의 대적자입니다. 당시 빌립보는 완전히 헬라화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은 우상으로 가득 찬 이교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교회를 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내부에 있는 대적자입니다. 이들은 율법주의자들이요, 반도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흐트러뜨리고 혼란을 유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교회의 대적자요, 진리의 대적자요, 복음의 대적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입니다.

 

문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아직 연약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이러한 외부의 박해와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혼란으로 인해 그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즉 믿음의 길, 복음의 길을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바울이 두 번째로 권면하는 것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려워한다(πτύρω)”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는데, 원래 의미는 놀란 말들이 우르르 도망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타난 장애물 때문에 놀라서 매우 허둥대면서 뒤로 물러나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잔뜩 겁을 먹고 혼란스러워하며 흩어지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워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바울은 너희가 진정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믿는다면 이러한 위협이나 혼란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저 대적자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는 분명합니다. 본문 28절에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저 대적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들이 멸망의 대상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멸망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것입니다. 이 멸망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는 구원을 받을 기회가 없는 완전한 멸망입니다. 하지만 그 대적자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의 신앙을 굳게 지키는 것은 자신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구원은 안전한 곳으로 구출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장차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대적자들 앞에서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서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수많은 대적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핍박과 어려움이 닥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16:33).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용기 있는 자여야 합니다. 앞에 있는 대적자들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앞을 향하여 계속 전진하는 자여야 합니다. 저 대적자들에게 위압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기가 떨어져도 안 됩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그의 친구들처럼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용기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는 바가 있으니까 담대한 것입니다. 자신이 약한 것 같은데 든든한 백(Back)이 뒤를 바쳐주니까 당당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줄을 믿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그 어떤 대적 앞에서도 어깨를 늘어뜨리지 않습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당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복음을 대적하는, 교회를 대적하는 그 어떤 대적자들 앞에서도 두려움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복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복음으로 인해 구원에 이른 자들입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지만,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뜻으로 굳게 뭉쳐야 합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그 어떤 존재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믿음과 용기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어지럽고 혼탁한 시대에 오직 복음을 굳게 붙들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